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47화 (47/305)

47화. 걔는 빼고(5)

조규찬은 오늘 자신의 공이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결과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았다.

4회 초 투 아웃.

총 열한 개의 아웃 카운트 가운데 삼진만 다섯 개. 출루에 성공한 타자는 오직 최수원 하나뿐이다. 물론 그 출루가 홈런이라는 점이 상당히 큰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서였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머릿속 한편에서 꿈틀댔다.

어쩌면 최수원한테 던졌던 공이 실투가 아니었을까? 너무 어정쩡한 코스로 들어간 탓에 두들겨 맞은 건 아니었을까? 차라리 원바운드였다면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들.

하지만 이내 그가 고개를 저었다.

백하민 그 앞뒤 안 가리는 멍청이라면 여기서 감독님한테 굳이 한 번 더 싸워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눌러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조규찬의 시선이 힐끔 전광판을 향했다.

1:0

그래, 1:0이다.

언제까지 팀원들이 점수를 못 낼 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경하고등학교. 전국 최강이었으니까.

-뻐엉!!

고의사구.

최수원이 1루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경기가 계속됐다.

***

경하고의 감독 최중찬이 턱을 만지작 거렸다.

1:0이라는 숫자는 좀처럼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조규찬의 투구수는 어느새 54개. 이제 4회가 끝났음을 고려한다면 효율적으로 피칭을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

고교야구의 규정에 따라 45개부터 60개까지는 하루의 의무 휴식일이 부여되고 60개 이상부터는 그 이상의 의무 휴식일이 부여된다.

결승전은 모레다.

결국 여기서 조규찬이 공을 더 던진다면 결승전에서 공을 던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의 시선이 팀의 두 번째 옵션인 이지민에게 향했다. 나쁘지 않다. 아니, 어지간한 팀에 간다면 에이스 자리 꿰차기 충분한 투수다. 실제로 이번 드래프트에 못해도 3라운드는 들어갈만한 실력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괜찮을까? 요즘 핫한 중앙고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그 순간,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최중찬의 손이 멈춰 섰다.

‘무실점?’

어째서? 왜 어째서 자연스럽게 자신은 중앙고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운드의 최수원이 공을 뿌렸다.

-뻐엉!!

빠르고 강력한 공이 포수의 미트를 꿰뚫었다.

쉽게 공략하기 힘든 대단한 공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국 최강 경하 고등학교였다.

장담하건대 지금 당장 프로에 가도 1군에 이름을 올릴만한 선수가 적어도 셋은 된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 고등학교 경기다. 투수의 105구 투구수 제한은 절대적인 규칙이다. 최수원이 아무리 잘 던진다고 해도 대기록만 아니라면······.

-뻐엉!!

“스트라잌!! 아웃!!”

맙소사!!

논리는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그저 강렬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을 뿐이다. 하지만 최중찬은 자신의 뇌리를 스친 그 예감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고교야구라는 것이 그렇다.

가끔 뜬금없이 대기록이 나온다. 심지어 프로에도 못 가는 투수가 명문팀을 상대로 대기록을 세우는 일도 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최중찬이 생각했다.

박진경, 김태윤, 최영재, 정병철로 이어지는 상위 타선은 분명 고등학교 레벨을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4회가 아니라 5회, 혹은 6회나 7회. 그 시기까지 노히트가 이어진다면? 그때도 손을 쓸 수 있을까? 아무리 준결승이고 1점 차 박빙의 승부라고 해도? 하지만······. 김태윤에 최영재에 정병철이다. 한 번 정도는 더 믿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건 하위타순에게 맡기는 게 더 좋을······.

-뻐어어어엉!!!!!

“스트라잌!!”

미트에 틀어박히는 포구음이 그야말로 굉음 같았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소리. 정확한 구속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조규찬이 던지는 가장 빠른 공보다 더 빠르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다. 155?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정병철이 직접 이야기하기로는 백하민의 속구보다 구속과 구위 모든 면에서 더 낫다고 했다.

“신코치.”

“네.”

“기습 번트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4회 말.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이제 두 번째 타석에 들어간 2번 타자에게 기습 번트를? 물론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중찬 감독은 평소 작전을 즐기는 감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문은 하지 않았다. 감독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초구는 몸쪽 깊숙한 코스 속구였다.

제구도 그렇게 잘 되는 것 같지도 않은 녀석이 이미 한차례 빈볼도 던진 주제에 도무지 몸쪽 공을 던지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타자들이 공에 맞을까 두려움을 갖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투수 역시 타자를 맞출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두 번째.

덕아웃에서 사인이 들어왔다.

‘기습 번트?’

김태윤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느냐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상황에서 도저히 최수원의 공을 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다만 문제는 이게 될까? 하는 부분이었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공을 던지는 타이밍은 이제 슬슬 눈에 익었다. 미리 봐뒀던 비디오 자료와는 조금 달랐지만 팔을 휘두르는 타이밍이 조금 빨라졌을 뿐 적응이 불가능할 만큼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이 너무 빠르다는 점이었다.

최고 156km/h의 구속? 그래 물론 대단하다. 흔히들 프로의 조건이 로케이션을 알 때 150km/h의 공을 칠 수 있느냐 없느냐라고 하는데 156km/h면 그보다 무려 6km/h나 빠른 공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릴리즈 익스텐션의 길이다.

팔을 휘두르는 타이밍은 빨라졌는데 공을 끌고 나오는 지점은 더 멀어졌다. 릴리즈 포인트는 낮아졌지만 자연스럽게 릴리즈 익스텐션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팔을 휘두르는 속도는 공이 날아오는 속도보다 빠르다. 더 먼곳까지 팔을 휘두르는 만큼 그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

-뻐엉!!

기습 번트 자세에 들어갔음에도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물론 바깥쪽 높은 코스로 제법 크게 빠진 공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냥 바깥쪽 높은 코스로 하나 빼려던 것일까? 아니면 기습 번트를 눈치챈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김태윤은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라면 어쩐지 후자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카운트 0-2.

마운드에 선 투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덕아웃을 향했다.

강공? 번트? 페이크 번트 슬래시?

세 번째.

역동적인 투구폼. 그리고 뒤로 돌아갔던 손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머릿속에 다른 구종은 없었다. 속구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투수였다.

공이 날아왔다.

0.1초도 채 되지 않는 타이밍. 그의 눈동자가 공의 궤적을 추측했다. 몸쪽으로 낮게 절묘한 코스. 번트를 대기는 힘들다. 빠지는 공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김태윤이 방망이를 회수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두 타자 연속 삼진.

조유진이 3루로 공을 돌렸다. 3루수에서 유격수로, 유격수에서 2루수로. 다시 1루수까지. 내야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나이스 피칭’부터 ‘파이팅’까지 내야수들의 응원이 담긴 공이 최수원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삼진을 잡은 직후의 작은 세러모니인 셈이다.

이어지는 3번 타자.

최수원이 그 내야수들의 마음을 져버리지 않았다.

-딱!!

내야 뜬공.

이루수로 출전한 임지민이 그 공을 가볍게 받아냈다.

4회 말 또다시 삼자범퇴.

조유진의 머릿속에 있던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어느새 ‘이대로라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등이 축축했다. 물론 7월의 더위는 무더웠지만, 단순히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선 이닝 운이 좋았다. 거기서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바깥으로 많이 빠진 공이 아니었다면 아마 기습 번트를 허용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김태윤의 발이라면 타구의 코스가 어지간히 나쁘지만 않았다면 1루에 살아나가기 충분했을 테고 말이다.

확실하다. 오늘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당장 아침부터 지금까지 컨디션도 컨디션이지만 행운의 여신이 나를 향해 자꾸 손짓을 보낸다. 물론 이왕 쓸 거면 화끈하게 퍼펙트까지 해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 그래도 노히트가 어딘가.

살짝 뒤로 돌아가 상의를 벗고 물수건으로 몸을 한차례 닦아낸 후 마른 수건으로 다시 몸을 닦았다. 더운 날씨를 고려해서 언더 셔츠는 세 벌이나 더 준비해왔다.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제법 기분이 상쾌했다.

물론 경기의 상태는 나의 기분과 달리 그리 상쾌하지 못했다.

조규찬이 마운드를 내려가지 않았다.

경하 고등학교가 모레 있을 결승전보다 당장 오늘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걸 의외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이것 역시도 나에게는 기록을 세우라며 행운의 여신이 보내는 신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저기 불펜에 멍게를 보고 있자니 이거 뭔가 슬램덩크 엔딩이 눈에 선하기는 한데······.

-뻐엉!!

“스트라잌!! 아웃!!”

그 순간, 조규찬이 마침내 5회 초, 일곱 번째 공으로 두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다.

투구 수 61개.

이걸로 이제 조규찬은 모레 있을 결승전 등판은 물 건너갔다. 이미 1회에 점수를 내줬으니 대기록을 세워서 105개 이상을 던지는 것은 무리겠지만 아무튼 앞으로 44개는 더 던진다는 뜻이다.

마운드에 선 조규찬의 시선이 잠시 우리 덕아웃 쪽을 향했다.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과 잠시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언론은 종종 선발 투수들의 이름을 올리며 선발 맞대결이니 뭐니 하며 호들갑을 떤다. 사실 본래의 난 그런 호들갑을 상당히 싫어했었다. 기본적으로 야구는 타자와 투수의 1:1 대결이다. 마운드에 선 투수와 맞붙는 것은 결국 타자라는 뜻이다.

헌데 선발 투수 맞대결이라니. 우스웠다.

나는 그건 그저 투수를 띄우기 위한 언론의 개수작, 혹은 투수 놈들이 자기들 이름값을 높이기 위한 개수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째서인지 나는 내 가슴 속을 채우는 호승심이 타자로서의 그것이 아닌 투수로서의 그것임을 느꼈다. 애당초 타자로는 호승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수도 아니고 몇 수 아래의 상대에게 호승심을 느끼는 멍청이는 없었으니까.

-부웅!!!

“스트라잌!! 아웃!!”

뚝 떨어지는 커브볼에 헛스윙 삼진.

이번에도 조규찬이 삼자범퇴로 우리 타선을 막아냈다.

내가 다시 글러브를 챙겨 들었다.

현재까지 투구 수는 51개.

감독님은 나에게 별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셨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 했지만 양세준 코치가 옆에 달라붙어 뭐라고 뭐라고 피칭에 관하여 떠들었다. 물론 딱히 들어줄 만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마치 마음에 새겨 넣는다는 듯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가 계속됐다.

***

“아,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지금까지 테드 씨께서는 최수원 선수의 타자로서의 면모만 강조하셨는데 사실 최수원 선수 하면 본래 투수로 유명했던 선수란 말이죠. 실제로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인데 156km/h를 던지기도 하고요. 혹시 투타겸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최경아 PD의 말에 테드 박이 너털웃음으로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투타겸업이요? 아, 물론 저희 회사는 그것에 그리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로스터의 가치는 점점 커지고 있고 투수 로스터 한자리를 대신해 주는 야수라는 건 그만큼 매력적이니까요.”

“그 말씀은 최수원 선수도 투타겸업에도 도전해볼 만하다. 뭐 그런 뜻인가요?”

테드 박은 지금 굳이 오타니 쇼헤이 이후로 얼마나 많은 선수가 투타 겸업에 도전했으며 실패했는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200만 달러 이상을 사용한 외국인 유망주에게 팀이 투타겸업과 같은 어정쩡한 것을 원할 리 만무하다는 이야기 역시 굳이 꺼내지 않았다. 물론 연간 수억 달러를 사용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에게 200만 달러라는 금액은 로또로 질러볼 만한 금액이긴 했다. 그러나 그게 그냥 200만 달러가 아닌 외국인 유망주 슬롯 머니 200만 달러라면 이야기는 또 다르다.

하지만 그의 그런 합리적인 생각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선수의 의사뿐이다. 그것이 아직 계약서에 도장도 찍지 않은 ‘잠재적인 고객’인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기에 테드 박은 그저 웃으며 가장 원론적인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최수원 선수의 재능은 제가 본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아,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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