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45화 (45/305)

45화. 걔는 빼고(3)

이번에 3학년이 된 경하고 103기는 명백하게 황금세대다. 기본적으로 지금 저기 라인업만 보더라도 내가 아는 얼굴투성이다.

당장 에이스인 규찬이 형이야 함께 병역면제를 위해 애를 썼던 사이다. 게다가 주장인 병철이 형도 내가 29년에 첫 번째 MVP 딸 때 경쟁했던 상대였다. 아마 당시 마린스가 조금만 더 사람 같이 야구를 했더라면 MVP를 가져가는 건 병철이 형이 아니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미국 가기 전까지는 나한테 밀려서 매번 물만 먹었는데, 미국에 간 이후로 일루수 골든글러브를 4년 연속으로 챙겼던 영재 형, 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은 계속 들락날락했지만 결국 상무로 군대에 갔던 태윤이 형 그리고 지금 타석에 들어오는 진경이 형까지 적어도 프로야구에 핵심 멤버급 선수만 무려 다섯이다.

박진경.

야구에서 흔히 말하는 5툴 가운데서 어깨 빼고 다 가진 내야수다. 회귀 이전에 나도 어깨를 다친 덕분에 송구가 영 별로였던지라 같은 4툴 취급을 받았었고 덕분에 나랑 종종 비교됐었다. 나도 메이저에 가서는 폐급판정이었지만 사실 한국 있을 때만 하더라도 준수한 일루수 소리를 들었었으니까.

‘솔직히 박진경이 조금만 더 터지면 최수원 아님?’

‘응, 아님. 그리고 더 터질 것도 없음. 이미 실력 대신해서 얼굴이 완전히 터졌음.’

대충 뭐 저런 식의 이야기가 오고 갔었다.

아무튼 박진경은 수비로는 KBO 전체 통틀어서 손에 꼽을만한 내야 수비에 2할 8푼은 나오는 컨텍, 도루도 마음만 먹으면 20개는 거뜬하고 잠실을 홈으로 무려 15홈런을 치는 이루수였다.

그가 타석에 들어와서 헬멧의 위치를 세밀하게 조정하고 타석의 흙을 발로 다졌다. 타석에서 루틴 많기로 유명한 박진경의 루틴이 고작 두 가지인 것을 보고 있자니 아직 어리다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조유진이 미트를 펑펑 두들기며 박진경의 몸쪽 깊숙하게 낮은 코스를 요구했다.

물론 녀석이 거길 요구하고, 내가 거길 노리고 던진다고 무조건 공이 거기 들어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박진경은 타자석의 인 코너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 말은 몸에 맞는 공이 나올 위험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평소였다면 조유진은 절대 나에게 이런 공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녀석도 오늘은 뭔가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사실 최근에 멍게를 가르치면서 느꼈던 깨달음 몇 가지를 요 며칠 조심스럽게 내 피칭 연습에 적용했었다. 당연히 갑자기 뭔가를 확 바꾸는 미친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밸런스 포인트에서 멈춤 동작을 삭제한 만큼 스트라이드에서 중심을 끌고 나가는 타이밍을 살짝 늦췄고 거기서 힘을 모으는 만큼 백스윙의 스피드를 의식적으로 아주 조금 높였다.

당연히 이 과정만으로 나의 커맨드가 갑자기 미친 듯이 상승하고, 로케이션이 완벽하게 안정될 수는 없었다. 애당초 거기서 기대할 수 있었던 최대 효율은 탄착군이 조금 좁혀지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영점을 잡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오늘 연습에서 공이 완벽하게 잘 들어갔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냥 그런 날이라서다. 왜, 가끔 그런 날이 있지 않던가. 이상하게 몸이 가뿐하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뭐 그런 날. 바이오리듬과 같은 유사 과학이 성행한 것이 이해될 것 같은 그런 날 말이다.

메이저리그에서 뛸 적에 그런 날에는 과장 조금 보태서 날아오는 공이 대문짝만하게 보이고 실밥만으로 구질들이 세세하게 구분됐었다. 오늘도 비슷했다. 물론 조규찬이 조금 전에 던졌던 공은 너무 대놓고 커브라서 컨디션이 안 좋아도 구분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몸쪽 깊숙하게 낮은 코스.

지금 컨디션이라면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존의 경계에 공을 꽂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간다.

연습할 때는 의식적으로 몸을 컨트롤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그렇게 몸에 박아넣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최대한 편안하게 활용한다.

한껏 잡아당긴 몸이 쏜살처럼 쏘아진다. 몸통의 회전을 따라 등 뒤로 돌아간 팔이 빠르게 튀어나온다. 귀를 지나 눈썹을 넘어 모자챙보다 더 먼 곳까지.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 완벽하게 공을 긁었다.

그리고 그 결과

-뻐억!!

시원한 포구음 대신 시원한 타격음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아······.

애석하게도 면도날과 같은 예리함은 아무래도 나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공이 한 개 반 정도 바깥으로 빠졌다.

-커헉······.

박진경이 허파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공이 허벅지에 맞았다. 물론 156km/h 짜리 공은 좋은 자리에 맞아도 더럽게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어디 관절이나 뼈에 맞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박진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1루를 향해 절뚝절뚝 걸어갔다. 내가 슬쩍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다. 메이저리그라면 뭐 이런 것 얄짤도 없겠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한국에서는 이런 거 꼭 해줘야 한다. 나도 타석에 서는 마당에 내 156km/h 강속구만큼은 아니지만, 조규찬의 150km/h 강속구도 처맞으면 피멍 드는 건 마찬가지다.

아쉽지만 1회 초 첫 번째 타자, 초구 몸에 맞는 공으로 퍼펙트는 무산됐다.

오늘 느낌이 좋은 것이 딱 퍼펙트 각이었는데 아쉽게 됐다. 뭐, 어쩔 수 없지. 지나간 것에는 미련을 버리겠다. 아쉽지만 그냥 노히트노런 정도로 만족하자.

두 번째.

경하고의 2번 타자 역시 타석의 인코스에 섰다.

메이저리그에는 ‘몸쪽으로 붙는 타자는 그게 내 할머니라도 맞혀버리겠다.’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격언이 무색하게 조유진의 미트가 살짝 센터로 옮겨왔다.

‘이 새끼가?’

내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눈빛을 본 녀석의 얼굴에서 나는 너를 믿어. 하지만 우리 조금만 센터로 던지는 게 어떨까 하는 신호가 전해진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두 번 젓고 한 번 더 강하게 녀석을 쏘아봤다.

그리하여 슬금슬금 옮겨간 미트의 위치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 초구는 어디까지나 영점을 잡는 용도다. 게다가 공 한 개 반 정도면 영점도 사실 그렇게까지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몸쪽에 붙는다고 무조건 피해 가는 승부를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강속구 투수가 제구가 안 좋다? 그러면 알아서 피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야구다.

일본 놈들이 맞아서라도 출루하는 걸 강조하는 바람에 거기에 영향을 받았던 한국 야구도 좀 그런 경향이 있는데, 솔직히 야구공 맞으면 몸이 보통 축나는 게 아니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하지만 시즌 144경기, 162경기 뛰려면 최대한 안 맞고 시즌을 풀어가는 게 좋다. 또한 내가 생각할 때 그게 수백억을 연봉으로 받는 선수의 미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자, 어디 한 번 바짝 붙어봐라.

2번 타자인 김태윤은 우타자. 저렇게 바짝 붙은 우타자에게는 딱 좋은 공이 하나 있다.

공의 실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1루를 한번 힐끔 살폈다. 적당한 리드폭. 박진경은 워낙 발이 빠른 타자다. 여차하면 2루로 뛰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공이 느리면 모르겠는데 내 공은 충분히 빨랐고 조유진의 어깨도 나쁘지 않았다. 피칭 타이밍만 뺏기지 않는다면 도루는 아무 의미 없다.

와인드업.

손끝으로 강하게 긁어낸 공이 나의 손을 떠났다.

140대 중반? 어쩌면 그보다 조금 느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공이 자기 머리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오는데 태연한 타자는 존재할 수 없다. 김태윤이 화들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뻐엉!!!

“스트라잌!!!”

슬라이더.

우타자의 몸쪽에서 바깥으로 휘어나가는 슬라이더였다.

“이 미친 새끼들이?”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던 박진경이 발끈했다. 그리고 1루에 서 있던 규혁 선배가 그런 박진경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야, 스트라이크잖아.”

“아니,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제구도 제대로 안 되는 강속구를 몸쪽으로 막 집어 던지는 새끼가 어딨어.”

“그런 투수가 마운드에 섰는데 타석 안쪽에 딱 붙어서 변화구에 엉덩방아 찧는 건 뭐 정상이고?”

“아······.”

물론 이게 빈볼이었다고 해도 벤치 클리어링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고교야구에서 벤치 클리어링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뭐 전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30년 전에 한 번, 그리고 거기서 또 한 20년 전에 한 번. 이런 식이라서 사실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그런 사태를 일으켰던 학교들은 둘 다 이후 1년간 전국대회 출장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었고.

2번 타자 김태윤이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위치는 여전히 타석 안쪽.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 그거겠지. 하지만 미묘하게 엉덩이부터 상체가 뒤로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다. 잘됐다. 저런 어정쩡한 자세로는 절대 타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조유진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복판.

빠른 공.

이번에는 또 기가 막히게 내가 원하는 데로 정중앙에 공이 빨려 들어간다. 1회 초 아직 몸이 덜 풀린 탓에 최고 구속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150 초중반의 강속구였다. 정중앙이라고 해도 쉽지 않다.

-딱!!

유격수 정면 땅볼 타구가 유격수, 이루수, 일루수를 거치는 깔끔한 6-4-3병살로 이어졌다.

순식간에 투 아웃.

타석에 3번 타자인 최영재가 들어왔다.

회귀 이전, 고교 시절에는 정병철에게 밀려서, 그리고 프로에 가서는 나한테 밀려서 이인자의 이미지가 좀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메이저에 진출한 이후로는 꾸준히 일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던 타자로 공격력 하나만큼은 리그에서 한 손에 꼽을 수 있다.

고등학생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얼굴과 덩치.

프로필상으로는 180cm에 100kg이었지만 실제로는 179cm에 112kg 정도 나간다고 알고 있다. 그야말로 타석을 꽉 채우는 거대한 느낌이다.

초구.

몸쪽 높은 코스.

-부웅!!

방망이가 늦었다.

조금 움찔한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첫 타자를 맞추고 나니까 경기가 좀 쉬워진다. 내가 메이저 있을 당시 우리 팀의 두 번째 투수였던 조지 콕이 헤드헌터라는 자신의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은 순간이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몸쪽 깊숙한 코스.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제구된 공이 아주 낮게 잘 깔려 들어갔다.

-뻐엉!!

“스트라잌!!”

최영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세 번째.

한복판.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맞으면 무조건 내야를 꿰뚫을 만큼 압도적인 힘이 실린 스윙. 확실히 힘 하나만큼은 규혁 선배조차 뛰어넘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물론 그 터무니없는 힘도 일단 공을 맞혔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존을 빠져나가는 140km/h 초반의 슬라이더가 타자의 헛스윙을 끌어냈다.

삼구삼진.

이닝이 종료됐다.

***

“잘했어.”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길.

조유진이 최수원의 엉덩이를 툭 두들기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오늘 공 엄청 좋더라. 경하고 타자라고 해도 함부로 공략하기 어렵겠던데?”

“쉿!! 더는 말하지 마. 부정 타니까.”

“어?”

“퍼펙트야 이미 깨졌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그 단어’는 함부로 쓰지 마라.”

최수원의 얼굴이 한없이 진지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 단어'를 말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조유진은 그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타이밍에 그 단어라면 노히트 맞지?? 그러니까 대뜸 선두타자한테 초구로 빈볼을 던지더니 이제 1회 끝났는데 노히트노런을 선언한다 이거네? 이 새끼 이거 역시 미친놈인가?’

하지만 묘하게도 머릿속 한편에 슬며시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그 미친놈이 최수원이기 때문일까?

이어졌던 2회 초 중앙고의 공격에서는 조규찬이 자신이 어째서 고교 최강의 좌완 소리를 듣는지를 증명했다.

그리고 다시 2회 말 경하고의 공격.

그는 지난 전반기 왕중왕전의 MVP였으며 경하고의 주장이었다.

동시에 최수원이 회귀하기 이전의 역사. 만약 그의 소속 팀이 마린스만 아니었다면 최수원의 MVP를 한 번 정도는 뺏었을지도 모르는 최강의 포수이기도 했다.

4번 타자 정병철이 타석에 들어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