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걔는 빼고(2)
검은색으로 래핑된 버스에 쓰인 붉은 글귀.
‘경하고 V29’
참으로 촌스러웠다.
하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29라는 숫자가 그들이 쌓아 올린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정병철이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저기에 쓰인 숫자는 23에 불과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번의 우승이 더해질 때마다 숫자는 올라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29.
바꾼 지 얼마 안 돼서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9와 달리 오래되어 변색된 2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오래된 2는 바꿔놓고 졸업해야지.”
그가 버스에서 자신의 가방을 직접 꺼내 들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가 입학했을 당시 경하고는 명문고답게 참으로 많은 악폐습이 남아 있었다. 그래, 마지막 우승은 무려 5년 전인 주제에 남아 있는 악폐습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거기에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악폐습을 감내하며 꾸역꾸역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했고, 그가 3학년이 됐을 때, 마침내 팀을 변화시켰다.
3학년 주전이 자신의 짐을 자기가 직접 든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사실 경하고를 졸업한 선배들이 본다면 기겁을 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가 바꾼 이러한 변화에 쓴 소리를 뱉을 수 없었다.
단순히 시대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병철. 공격형 포수.
고교최대어.
황금사자기 전반기 왕중왕전 MVP.
게다가 실력은 대단하지만, 성격이 조금 이상한 조규찬과 달리 정병철은 그 실력만큼이나 인품도 훌륭했다. 작년 말, 감독님이 새로운 주장을 고를 때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다.
모든 면에서 존경할만한 선배의 등을 바라보며 경하고의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했다.
***
“전용버스 개쩌네.”
“그러게. 우리도 막 우승하고 그러면 이런 거 생기려나?”
“야, 쟤들은 경상도에서 올라와야 하는 애들이니까 필요한 거고. 우리야 경기장이 바로 근처잖아.”
“천남고도 경기장이 바로 근처인데 있잖아. 그리고 우리도 어차피 대회 때는 버스 대절해서 쓰고 있고.”
중앙고 야구부의 1학년 아이들이 종알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기들 딴에는 속닥거리는 것 같았는데 워낙에 주변이 조용해서 그런지 제법 선명했다.
“왜? 너희도 전용 버스 가지고 싶냐?”
“유······, 유진 선배님!!”
“저거 학교에서 산 거 아니야. 천남고도 학교에서 산 버스 아니고. 뭐, 대부분 다 그렇지. 보통은 졸업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후원금으로 사거나, 아니면 성공한 선배가 대뜸 버스를 통으로 선물하는 경우도 있고.”
경하고등학교 출신의 프로가 대체 몇이던가.
물론 최근 6, 7년 정도는 경하고등학교도 최악의 세대라고 프로에서 제대로 자리 잡은 선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마린스의 성골은 오직 경하고 출신뿐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다. 그 덕분일까? 오늘 준결승 경기를 보기 위해 모여든 마린스 팬들도 제법 됐다.
“그렇군요······.”
“뭐,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고. 우리는 버스 대절 해서 타지만, 우리가 프로에서 성공하면 우리 후배들도 저런 멋진 전용 버스 탈 수 있잖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더 멋진 거지.”
“네!! 아, 그런데 선배님. 궁금한게 있습니다.”
“오, 그래 우리 용주가 뭐가 궁금할까?”
“저기 V29 있잖습니까. 그게 우승 횟수인 건 알겠는데, 제가 알기론 작년 초에 경하고가 V24였는데 작년 전국대회 중에서 다섯 개 우승했고 올해 또 하나 우승했는데 아직 29인게 좀 이해가 안 돼서요. 그렇다고 저 29가 권역 우승 횟수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아, 그냥 쟤들 전통이 그래서 그래. 뉴월드배나 전국체육대회는 빼고 황금사자기, 청룡기, 봉황기, 대통령배의 4대 메이저 대회만 카운트해서 넣거든.”
“아, 그렇군요.”
후배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조유진의 시선이 최수원에게 향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녀석의 표정이 참으로 편안했다. 이제 2학년에 불과했지만, 팀 내의 위치 때문일까? 1학년 아이들이 알아서 녀석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만약 아이들이 녀석의 가방을 챙기지 않았더라면 아마 조유진 자신이 챙겼을 것이다.
오늘의 선발 투수이자 3번 타자.
경기의 승패가 그에게 달린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오늘의 홈팀인 경하고가 먼저 훈련을 끝낸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가벼운 워밍업과 캐치볼을 끝내고 조유진이 포수 장비를 착용했다.
다른 투수의 공이라면 1학년 후배인 찬주가 공을 받아볼 수도 있겠지만 수원이의 공은 그럴 수 없었다. 중앙고의 포수 가운데 어디로 들어올지 모르는 최고 156km/h의 강속구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유진뿐이었다.
-뻐엉!!
“굿!!!”
언제나처럼 공이 미트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게다가 오늘은 이상하게 공을 받는 것이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조유진이라고 해도 156km/h의 공이 제멋대로 들어오는 것을 받아낼 때면 심장이 쫄깃한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좀 편안했다.
속구 23개.
그리고 슬라이더 11개와 어설픈 커브 7개.
“뭐야? 끝? 더 안 던져?”
평소였다면 여기에 속구 몇 개를 인 코스 아웃 코스로 몇 개씩 더 던져가면서 감을 잡았을 터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 오늘은 충분해.”
하긴, 오늘은 커맨드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게 막 칼처럼 정확했느냐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로케이션이 제법 안정적이었다. 특히 커브 가운데 두 개나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이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경기 전 훈련을 끝내고 아주 잠깐의 휴식 시간.
이어폰을 낀 최수원이 잠시 눈을 감았다.
‘뭐지?’
왜일까? 조유진은 그 모습에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든든함이 느껴졌다. 물론 평소에도 최수원은 항상 든든했다. 장담하건데 현재 고교 No.1 타자는 최수원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든든함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조유진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건 든든한 마음이라는 것은 같았으니 별로 상관 없겠지.
경기가 시작됐다.
***
1회 초.
조규찬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지난 왕중왕전에서 백하민에게 최우수 투수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가 현재 고등학교 최고의 좌완투수라는 것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최고 150km/h의 속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 게다가 고교수준이라 믿기 힘든 체인지업까지.
조규찬의 공이 중앙고 타자들의 방망이를 춤추게 했다.
헛스윙 삼진.
그리고 내야 땅볼아웃.
타석에 3번 타자 최수원이 들어왔다.
‘오늘 커브 좋더라. 일단 하나는 간 좀 봐보자.’
조규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의사구? 그래, 뭐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투수와 타자의 첫 만남에서 유리한 것은 투수다. 게다가 루상에 주자도 없었고 마운드에 선 투수는 고교 최고의 좌완이다. 우타자를 상대로 한 번도 승부해보지 않고 도망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하고의 감독 역시 그것에 동의했다.
비록 최수원이 불가사의할 정도의 타격 능력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그가 판단할 때 조규찬은 당장 프로에 가도 통할만한 실력자였다. 백하민이 6연속 홈런을 허용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최수원이라고 모든 공을 다 넘기지 못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최수원의 스윙은 극단적인 어퍼 스윙이다.
높은 코스 공에 약했고, 좌투수가 던지는 바깥 코스도 쳐내기는 했지만, 홈런을 만들지는 못했다.
근거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지금 현재 이번 토너먼트에서 가장 핫한 타자는 최수원이 아닌 그 뒤에 올라오는 2홈런 17타점의 조규혁이다. 지난 네 경기 동안 중앙고가 올린 타점의 절반 가까이를 혼자 만들어 낸 타자에게 굳이 주자를 내줄 필요는 없었다.
197cm의 큰 키에 오버핸드.
그야말로 좌완정통파 파이어볼러의 정석과도 같은 자세. 게다가 그 팔길이까지 생각한다면 거의 2층에서 내리꽂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절대 공략 불가.
작년 청룡기의 결승전 상대팀은 조규찬의 공략법으로 투구수를 늘려 빨리 강판시키는 것을 선택했을 정도다.
최수원이 움직였다.
조규찬의 손을 떠난 공이 살짝 떠올랐다.
눈 한 번 깜빡하기에도 부족한 시간.
그는 조규찬이 던진 공이 커브라는 것을 인지했다. 터널링이 영 좋지 못했다. 저 부분은 차라리 안병영이 조금 낫다. 어디서 익힌 건지 녀석의 커브는 미국식이었다.
물론 공만 두고 본다면 조규찬이 던지는 커브의 낙폭이 더 클지 모르겠지만 변화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타자를 속이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늦게 커브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일까?
아니면 빠지는 공일까?
코스가 높았다.
낙폭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원바운드까지는 아니다.
테이크백 단계에서 끌어모은 힘을 빠르게 이동시켰다. 내디딘 왼발에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다. 오른발 뒤꿈치가 들리고 상체가 벼락처럼 돌아갔다. 어마어마한 배트 스피드.
높은 코스에서 날아오던 야구공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벽하게 종으로 떨어지는 12 to 6의 커브볼이었다.
배트와 공이 만나는 것은 한순간.
최수원의 몸보다 아주 조금 앞선 지점이었다. 코스가 살짝 높았던 만큼 손목의 각도는 힘을 싣기 가장 좋은 각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절대 공략이 불가능했을 아름다운 커브볼이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속도의 2배 이상으로 튕겨나갔다. 마지막까지 양손으로 꾹잡고 있던 방망이를 가볍게 내려놓은 최수원이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질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건방지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맞는 그 순간, 공을 던진 조규찬도 공을 받으려던 정병철도 아니, 경기장에 모인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넘어갔다.
높게 뜬 타구가 가볍게 담장을 넘어 목동의 외야 그물망을 강타했다.
1회 초.
초구 홈런.
백하민 그 녀석이 이를 박박 갈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뭔가 실투였다면 변명 거리라도 있었을 텐데, 던진 직후에 흡족한 마음이 들 정도로 정확하게 노렸던 그대로 날아가던 공이었다. 헌데 그런 공이 저렇게 깔끔한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을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화가 났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조규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백하민처럼 열혈 바보가 아니다. 오늘 경기는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V30에 도전하기 위한 마지막 한 걸음이었다. 개인적인 호승심으로 승부를 거듭할 수는 없었다.
인정한다. 최수원 저 녀석은 타자로는 어나더 레벨이다.
만약 오늘 경기가 하반기 주말리그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경기였다면 끝까지 덤벼 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 남은 타석 모조리 거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4번 타자 조규혁이 뜬공 아웃으로 물러났다.
1:0
아쉬운 실점이지만 조규찬은 자신의 동료들을 믿었다. 물론 타자 최수원은 어나더 레벨이다. 하지만 투수로써 그는 좋은 투수였지만 아직 많이 덜 여문 투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의 동료들은 전국 최강 경하고다. 고작 1점 정도는 금세 따라잡아 주리라.
지금 고민해야 하는 것은 몇 점이나 여유를 가진 채로 마운드를 넘겨야 무난하게 경하고가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모레 있을 결승전에서 던지려면 오늘 60구 이상을 던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운드에 최수원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