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걔는 빼고(1)
“언니 뭐에요? 뭐 보는 거에요?”
“어? 아, 학교 친구가 대회를 나갔거든. 그게 인터넷 방송이 되고 있어서.”
“학교 친구? 대회?”
양지나가 고개를 쑥 내밀어 그녀의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나이는 얼추 삼십 대 초반? 짙은 화장으로 감추기는 했지만 양지나의 예리한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와!! 진짜 미쳤어요. 미쳤어!! 아니, 이 팀 뭐죠? 지금까지 총 네 경기. 전부 다 콜드게임이에요!!”
[불사르조님이 3,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불사르조: 우리 팀의 미래를 보는 것 같네요.
[대전의아들최수원님이 5,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대전의아들최수원: 우리팀에 꼭 필요한 마지막 조각을 찾은 듯
“불사르조님 대전의아들최수원님 후원 감사합니다.”
─20C최다꼴찌: 마지막 조각? 우리 팀은 애초에 조각이 하나도 없는데?
─행복야구: 나는행복합니다정말정말행복합니다.
─L9: KBO 역대 두 번째 리그 꼴찌까지 한걸음. 그 한걸음이 향후 20년의 왕조를 위한 걸음이라면 나 기꺼이 L9를 L10으로 정정하리라.
─886899: 솔직히 쟤보다는 조규찬이 나은 듯. 우리 팀에 필요한 건 투수임.
─대전의아들최수원: 최수원 쟨 투수도 하고 타자도 하고 다 하잖아. 무슨 소리야.
─886899: 아마추어에서나 그러지. 프로와서도 저게 되겠냐? 144경기를 치러야 하는데.
─불사르조: 오타니도 하는데 최수원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886899: 오타니도 2021년 한 번 MVP하고 그 뒤로 지금 무려 3년 동안 그때만큼 보여준 적이 없는데 이도류? 푸훗.
─병신만보면짖는개: 왈왈
─20C최다꼴찌: 이거 전부 바보인가? 조규찬은 올해 졸업이고 최수원은 내년 졸업이잖아. 이걸 왜 싸움?
[대전의아들조규찬님이 5,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대전의아들조규찬: 맞다. 조규찬도 우리 아들이고 최수원도 우리 아들이다. 큰아들 작은아들을 두고 싸울 이유가 없다.
“대전의아들조규찬님 후원 감사합니다. 맞는 말이죠. 조규찬도 우리 꺼, 최수원도 우리 꺼. 이제 우리 피닉스. 앞으로 비상할 일만 남았습니다!!”
─20C최다꼴찌: 뭐, 더 떨어질 곳이 없으니 비상할 일만 남은 건 맞지.
끊임없이 올라가는 댓글과 후원.
양지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아줌마 지금 1분만에 만삼천 원을 번 거에요?”
“그러게.”
“아니, 언니!! 그러게가 아니라······. 와, 누군 뼈빠지게 일해도 한 시간에 만원 벌까 말까인데 그냥 저렇게 앉아서 야구 보면서 잡담 좀 하는데 1분만에 만삼천 원이라고요? 그러면 한 시간이면 얼마야? 13에다가 6을 곱하니까 68? 육십팔만 원?”
“칠십팔만 원이겠지.”“아, 그러네. 아무튼 말도 안 되잖아요. 나도 그냥 다 때려치우고 저런 거나 해볼까요? 솔직히 생긴 건 내가 저 아줌마보다 훨씬 낫잖아요.”
“지나야, 저것도 쉬운 거 아니야. 그리고 지금까지 연습했는데 아깝잖아.”
“아깝긴 아깝죠. 근데 아까우면 뭐 해요. 언제 데뷔할 줄 알고. 에휴휴, 올해는 드디어 데뷔하나 싶었는데······.”
열일곱. 그리고 열여섯.
이제 고등학교 2학년과 1학년이다. 사회로 보면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새파랗게 어린 나이. 하지만 그녀들의 인생은 이미 시작됐다. 2025년 현재 여자아이돌의 평균 데뷔 연령은 만으로 열여덟,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을 넘지 않는다.
양지나의 나이 이제 고작 열여섯. 하지만 열 한살에 연습생으로 들어와 무려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실력이 부족했나? 아니다. 그녀는 지금 회사에 소속된 연습생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재다. 데뷔조로 묶인 것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심지어 그녀 앞에 박은진은 또 어떤가. 데뷔조 생활만 벌써 2년 반을 넘게 하고 있다.
데뷔는 그저 운이다.
“설아 언니는 이번에 KG로 옮긴대요. 지금 준비하는 팀에 래퍼 자리 비었다고.”
“KG?”
“아, 설아 언니도 알아요. 거기 3군에다가 그 팀 준비기간 짧은 거. 근데 어쩌겠어요. 그 언니 이제 몇 달 후면 졸업인데 데뷔라도 해봐야죠.”
“아니, 그게 아니라. 사장님이 보내 주신대? 그 언니도 데뷔조잖아.”
“데뷔조는 개뿔······. 어차피 우리 무기한 연기인데 사장님도 양심이 있으면 보내 줘야죠. 아니, 사장님도 진짜······. 투자자인지 뭔지. 에휴······. 어디서 그딴 놈들을 믿고 오셔서는.”
지나의 한탄 속에서 박은진의 시선이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양지나의 시선 역시 그것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한 남자아이가 턱 끝을 치켜들고 경기장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와, 뭐야? 이게 언니 학교 친구? 잘생겼는데? 혹시 썸남?”
“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멍청이야.”
“뭐야? 언니 혹시 까인 거?”
내가 까였나? 그러니까 그걸 까였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날 밤 공원에서 한참 분위기 좋게 산책하던 중, 달달한 이야기 대신 대뜸 인생 상담을 시작했던 저 멍청이와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운? 그래, 뭐 중요하지. 운칠기삼이라고 했던가? 내가 그 말을 꽤 좋아하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맞는 말이야. 운이 칠이고 재주가 삼이라. 세상이 그렇지 뭐. 근데 이 말의 요점은 운이 칠이고 재주가 삼이니까 운을 탓하라는 뜻이 아니야. 그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은 행운도 고작 칠밖에 안 된다는 뜻이지. 쉬운 일이야. 삼밖에 안 된다는 그 재주를 남들의 세 배, 네 배를 만들어 버리면 운이 아무리 좋은 놈이라도 다 때려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믿기 힘들면 내가 보여줄게. 운이 아무리 안좋아도 실력으로 다 때려잡는 모습을.”
그냥 힘들었겠다. 한마디 해주는 것이 대체 뭐가 어려웠는지. 남들보다 서너 배 잘하면 된다는 그 이야기는 참으로 꼰대스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집에 와서 인터넷에 검색해본 운칠기삼의 뜻도 수원이의 말과는 참으로 달랐다. 미리 뜻만 알았더라도 한 방 먹여줄 수 있었을 텐데.
‘재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녀석을 자꾸 훔쳐보게 되는 것은 아마 그 마지막 한 마디 때문일 것이다.
“박은진.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그러기엔 넌 아직 너무 젊어.”
반칙이었다.
무슨 청춘드라마도 아니고 그토록 진지한 눈빛으로 그토록 오그라드는 멘트를 내뱉다니.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마지막 한 마디야말로 그녀가 꼭 듣고 싶던 이야기였다는 것을.
“헛소리 그만하고 연습이나 좀 더 하자.”
흘린 땀방울에 배신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땀방울을 흘리는 것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해보는 수밖에.
지하 연습실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4경기 연속 콜드게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심지어 메이저리그 ‘MVP급’ 선수인 최수원조차도 어지간하면 패배하지 않을것임을 확신했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쉽게 쭉쭉 올라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하고의 조규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지.”
그가 홀로 중얼거렸다.
07년생 가운데 누가 최고의 야구선수인가, 이번 드래프트에 최대어가 누구인가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조규찬 자신도 인정했다. 본래 그보다 조금 부족했던 백하민은 지난번 전국대회를 통하여 마침내 자신과 대등한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물론 디테일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자신보다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세기의 라이벌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아무튼간 최고의 선수를 꼽으라면 그렇게 의견이 갈릴 수는 있겠지만, 최강의 고등학교를 꼽으라면 그것은 의견이 갈릴 수가 없다.
경하고등학교.
작년 전국단위 대회 가운데 뉴월드 빅마트배를 제외한 다섯 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 놀랍게도 당시 우승의 주역들은 3학년이 아닌 2학년들이었고 그 당시의 2학년들이 3학년이 된 현재 경하고등학교의 전력은 역대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까지 올라왔다.
“뭐, 최수원. 인정은 해주겠어. 08년생 중에선 네가 최고야. 아니, 어쩌면 네가 현재 고교 최고의 타자일지도 모르겠군. 병철이보다 너를 상대하는 상상이 더 어려운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래봤자 넌 중앙고다. 네가 만약 경하고에 왔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천남고만 됐어도 재밌는 승부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중앙고는 분명 무시할만한 상대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최수원이라는 타자는 당적불가의 괴물이고 녀석의 타석에 무조건 볼넷을 내준다고 했을 때, 그 뒤를 이어 나오는 조규혁도 무시할 수 없는 타자였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물론 가끔 일본 만화를 너무 많이 본 놈들이 그게 가능하다고 착각을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야구는 최소 아홉 명이 뛰는 경기고, 심지어 지금과 같은 토너먼트에서는 스물다섯 명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 어쩌면 2인분 정도 하는 선수가 있을 수는 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조규찬 자신처럼 4.5인분을 하는 선수도 있을 수 있다. 선발투수가 등판해서 노히트를 하면 경기의 절반을 홀로 해낸 셈이니까.
하지만 타자는 그게 불가능하다. 더 잘 친다고 남의 타석에 설 수는 없다. 공평한 1/9이다.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
“후후후, 그래.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지.”
조규찬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야, 규찬이 또 왜 저래?’
‘냅둬. 쟤 선발 등판하는 날에는 원래 저러잖아.’
‘아니, 그건 백하민이랑 맞대결 같은 특별한 날에만 그러던 거 아니야?’
‘중앙고도 최근에 4경기 연속 콜드게임으로 올라왔잖아. 그리고 저러면 좋은 거지. 쟤 저 지랄 떠는 날에는 좀 더 잘 던지잖아.’
‘뭐, 그건 그렇지.’
***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본래 학교에 가던 것보다 조금 느지막하게. 하지만 16년이나 뛰어온 프로의 루틴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신기할 정도로 침대에 더 누워있고 싶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동적인 스트레칭으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어디 하나 뻐근한 곳 없이 몸이 아주 가벼웠다.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 그리고 약간의 빵으로 아침을 끝내고 단백질 보충제 한 스쿱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평소보다 몇 번 더 흔들어서일까? 뭉친 곳 하나 없는 보충제가 참으로 깔끔했다.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택시를 탔다. 평소와 다른 시간이라서일까? 평소였다면 한, 두 번씩은 꼭 빨간불에 걸릴 신호들이 이상할 정도로 파란불을 띄워주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300원이 덜 나온 택시 요금이 천원 단위로 깔끔하게 떨어졌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은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학교에 전세 버스가 없었던 만큼 대회 기간에 버스를 대절해서 사용했는데 버스 회사의 사정에 따라서 버스의 컨디션이 좀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오늘, 그 가운데 가장 깔끔하고 컨디션이 좋은 버스가 운동장에 세워져 있었다.
준결승.
전국 최강.
경하고와의 경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