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팀 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다(5)
투 아웃 주자 1루.
상위 타선을 상대로 지금까지 1안타라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좋았다. 그리고 타석에 4번 타자 한민준이 올라왔다.
백원고등학교를 3차전으로 이끈 에이스였다. 바로 지난 경기에서 노히트노런.
그게 고작 사흘 전 일이었으니 지금 어깨의 상태는 말이 아닐 것이다. 같은 투수로서 어찌 모를까. 80개만 던져도 다음 날은 어깨가 묵직하다. 하물며 147개?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고난 재능이 다르다.
이진우 자신과 달리 저 한민준은 야구의 신에게 선택을 받았다. 아마도 지금 당장 마운드에 선다고 해도 지친 한민준 쪽이 쌩쌩한 이진우보다 훌륭한 투수일지도.
이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보니 가장 친한 친구가 돼버린 안병영 그 녀석이 항상 그렇게 말했다.
‘너는 쨔샤. 생각이 너무 많아.’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앉은 조유진이 자신의 미트를 퍽퍽 두들겼다.
타석에 섰을 때는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저렇게 홈플레이트 너머에 앉아 있을 때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녀석이다.
초구 커브.
그가 안병영에게 그립을 알려줬던 공이다.
육 개월.
안병영이 커브를 볼과 스트라이크를 구분해서 던질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딱 육 개월이었다. 참고로 그에게 커브를 알려줬던 진우는 처음 커브를 익히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6개월 차의 안병영만큼 커브를 던지지 못한다.
세트 포지션.
이진우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고작 90km/h의 커브볼이다. 아마도 한민준이라면 손을 떠난 직후에 명확하게 이 공이 커브라는 것을 인지했을 터.
그의 방망이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뻐엉!!
“스트라잌!!”
초구 스트라이크.
운이 좋았다. 노린 것보다 조금 낮게 들어갔는데 그게 오히려 상대를 속일 수 있었다.
볼카운트 0-1.
두 번째.
여기서 또 한 번 커브를? 이번에는 비슷하지만 조금 더 낮게 깔아서 존에서 빠지도록? 물론 그게 된다면 베스트다. 하지만 그런 게임 같은 컨트롤이 가능할 리가 없다. 괜히 방금과 비슷한 공이 들어간다면 이번에는 그대로 장타다.
여기선 살짝 존에서 빠지는 슬라이더다.
다른 건 몰라도 슬라이더는 제법 자신이 있다. 가장 오랜 시간 연마해온 공이니까. 보통이라면 여기서 속구를 하나 던지고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사용해보겠지만 상대가 상대다. 130km/h 남짓한 속구. 그것도 구석을 찌르지 못하는 속구라면 그대로 난타당한다고 봐야 했다.
손끝을 떠나는 공의 느낌이 훌륭하다.
제대로 긁혔다. 좌타자 기준 존의 복판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방망이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부웅!!!
“스트라잌!!”
됐다!!
이걸로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불펜에서 진우 자신을 바라보는 안병영의 시선을 느꼈다. 하여간 참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물론 남들도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이 저 녀석의 가장 큰 단점이지만.
어제 지껄이던 되지도 않는 고해성사가 떠오른다. 졸업할 때가 돼서 그런가? 그래도 확실하게 못 박았다. 괜히 애들한테 가서 찝쩍거리지 말고 끝까지 개자식으로 남으라고. 정훈이 형이 끝까지 개자식으로 남아서 우리가 읏샤읏샤 할 수 있게 했던 것처럼 너도 그렇게 남아야 한다고.
물론 그 말을 듣고 충격받은 얼굴로 ‘내가 김정훈이라고?’를 되뇌던 녀석의 모습에 깜짝 놀라기는 했다. 저 새끼. 진짜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제 놈 스스로가 우리 기수의 개자식인 것도 모르고 있을 줄이야.
이진우가 또 한 번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안병영 따위나 생각할 때가 아니다. 타석에 한민준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사실 0-2는 투수에게 지극히 유리한 카운트다. 타자는 어지간한 공이라면 다 방망이를 내밀 수밖에 없고, 투수는 무려 세 번이나 타자를 낚을 수 있다.
문제는 이진우 자신에게 지금 상황에서 사용할만한 결정구가 없다는 점이었다. 평소에 결정구로 사용하던 공을 이미 다 써버린 다음이었으니까.
여기서는 오늘 가장 느낌이 좋았던 존에서 빠지는 슬라이더를 하나 던져 보는 수밖에.
물론 지금보다 조금 더 빠지는 코스로.
세 번째.
세트 포지션이 아니었다. 와인드업. 전력을 다한 이번 공으로 타자를 완전히 끝내고 이닝을 마무리 짓겠다는 약간의 블러핑이다. 자신의 공이 정면승부라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더 전달되기를.
야구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노렸던 코스는 두 번째보다 조금 더 빠지는 코스. 하지만 공이 날아간 곳은 그보다 조금 더 몰린 코스였다.
바로 지난 경기 147개의 공을 던져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에이스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빠른 타구가 이루수의 글러브를 살짝 비켜 갔다. 살짝 우측으로 쏠린 우중간 안타. 1루 주자가 달렸다. 그리고 가장 빠르게 공을 잡아 든 것은 우익수인 경석이였다.
1루? 이미 늦었다. 1루 주자는 이미 2루를 지나 3루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경석이가 빠르게 스텝을 밟아 3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다이렉트 송구.
평소 어깨에 제법 자신이 있던 녀석이기에 고를 수 있었던 선택지였다. 그 의도대로 됐다면 아마 아슬아슬하게 아웃을 잡아낼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녀석의 생각과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송구가 아주 약간 높았다. 그리고 중앙고의 3루수인 진철이는 그 아주 약간 높은 송구를 원활하게 받아내지 못했다. 고교야구에 아주 가끔 나오는 수비 실수. 그것은 1루 주자가 2루로 3루 주자가 홈까지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실수였다.
1:0
다이렉트 송구를 시도한 경석이와 그 공을 못 받은 진철이. 둘 중 누구의 잘못이 더 컸을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경석이는 2학년이고 진철이는 3학년이라는 점이었다. 경석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직 1점이야. 아웃 카운트 하나. 침착하게 잡아보자.”
이진우가 경석이를 향해 소리쳤다.
열통이 터지고 속에서 천불이 나지 않느냐고? 당연히 난다.
당장 달려가서 무슨 수비가 그따위냐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참는다. 그는 최수원이 아니었다. 하물며 안병영조차 아니었다. 이진우는 수비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지극히 평범한 투수에 불과했다.
경기가 계속됐다.
***
한민준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던지고 싶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이야기했다. 어차피 고교야구는 프로 진출을 위한 교두보고 이건 쇼케이스에 불과하다고. 여기서 어깨를 갈아 넣을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친구끼리 보드게임을 해도 지면 화가 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전국대회다. 당연히 이기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역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던 것일까? 만화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저 꿈이었다. 1학년 때 함께 팀을 전국에 올려놓자던 동료들은 이미 절반은 야구를 포기했고, 나머지 역시 그저 야구를 해나갈 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오늘 중앙고 역시 전국단위의 강팀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팀의 에이스인 최수원이 마운드에 서지 않았다는 점 정도였다. 자신들을 상대로는 에이스를 내보낼 필요도 없다는 뜻일까? 그럴지도.
하지만 괜찮다. 그 방심이 바로 그들을 쓰러트릴 무기가 될 테니.
3차전.
오늘 경기만 넘기면 된다. 4차전에서는 다시 한민준 자신이 던질 수 있다. 가능성은 아직 존재한다.
1:0
원아웃에 주자 2루.
타석에 최수원이 올라왔다.
전국이 주목하는 2학년이다. 앞선 두 차례의 경기를 모조리 콜드게임으로 승리한 데에는 녀석의 공로가 지대했다. 투수로서도, 그리고 타자로서도.
만루에서 밀어내기 볼넷이라니. 하지만 그 작전조차도 타당한 타자였다.
‘나였다면······.’
충분히 승부해볼 만했을 텐데.
마운드에 선 종연이가 멀찍한 곳으로 공을 던졌다.
고의 사구였다. 이미 주말리그에서 고의 사구 중에 빠진 공을 두들겼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그러한 실수는 나오지 않았다.
원아웃 주자 1, 2루.
-딱!!
그리고 이번 전국대회에서 가장 뜨거운 불방망이를 자랑하는 4번 타자 조규혁의 장타가 주자들을 모조리 홈으로 불러들였다.
2:1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
7월.
해는 중천을 넘어갔지만, 기온은 아직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높은 습도 덕분에 체감 기온은 35도에 육박했다. 유니폼은 땀에 푹 절어 이닝이 끝나고 유니폼을 쥐어짜면 땀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다.
4회 초.
이진우는 여전히 마운드에 서 있었다. 물론 무실점의 완벽한 피칭을 해서는 아니었다. 그가 실점 없이 이닝을 끝낸 것은 2회가 유일했다. 1회에 1점, 그리고 3회에 2점. 지금까지 그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 팀의 실점이 그보다 더 컸기 때문이었으며, 팀에서 최수원과 안병영을 최대한 써먹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더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잡념이 이렇게 많다니.
투 아웃 1, 3루.
점수는 5:3
그리고 타석에는 2타석 연속으로 안타를 기록했던 한민준.
녀석이 타석에서 멋들어지게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누가 봐도 프로에 갈 재목이었다.
‘지금까지 던진 게 그러니까 78개였나? 79개?’
모르겠다. 어쩌면 80개가 넘었을지도. 모자를 쓴 머리는 뜨끈뜨끈했다.
그래도 손아귀에는 아직 힘이 남아 있다.
최대한 까다롭게.
설사 볼넷을 주더라도 상관없다. 여기서는 최대한 바깥쪽 코스를 공략한다.
초구 빠른 공.
-뻐엉!!
크게 벗어났다. 하지만 조유진이 훌륭하게 공을 받아냈다.
두 번째. 초구보다 조금, 아주 조금 안쪽에 틀어박겠다는 느낌으로
-딱!!!
젠장, 너무 몰렸다.
하지만 다행이다. 높게 뜬 타구가 3루 파울 라인을 벗어난다.
1-1.
세 번째.
슬라이더.
-부웅!!
한민준의 방망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절묘한 코스로 매우 잘 긁힌 공이었다. 이왕이면 2스트라이크에서 이런 공이 나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볼카운트 1-2.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볼, 그리고 파울.
2-2.
카운트는 아직 유리했다. 가벼운 견제구 하나를 던지고 여섯 번째 공을 준비했다.
누구였더라? 하여간 유명한 누군가가 속구는 재능, 변화구는 노력이라고 했다. 개소리다.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야구를 했다. 확신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것 이상으로 노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고난 하드웨어만이 재능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를 습득하는 것 역시 재능의 영역이다. 하지만 하드웨어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라면 소프트웨어의 습득력은 시간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메울 수 있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그 부족한 재능으로 아주 오랜 시간을 갈고 닦았다.
노력한다고 150km/h의 강속구를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꽂아 넣을 수는 없었다. 노력한다고 커브의 낙폭을 조절한다거나 스트라이크와 볼을 마음대로 넘나들게 던지는 요령을 익힐 수는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높은 확률로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을 수 있는 커브볼.
2-2의 카운트.
조금 높은 코스 느린 커브볼이었다.
타이밍은 살짝 밀렸다. 하지만 한민준은 타고난 재능으로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는 앞서 진우가 던졌던 커브볼들의 낙차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이 공은 무조건 존을 통과하는 공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날아오는 공을 향해서 침착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
하지만 높은 코스로 날아오는 느린 공의 궤적은 한민준이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공을 던진 이진우 본인이 생각했던 낙폭과도 달랐으니까.
-부웅
“스트라잌!!!”
심판의 스트라이크 콜.
오늘 경기 첫 번째 삼진을 잡아낸 이진우가 마운드 위에서 양손을 높게 번쩍 들었다.
마치 노히트라도 해낸 것처럼.
너무 더워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까?
진우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됐다.’
그래,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그는 진짜 재능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게 비록 실투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야구의 묘미 아니겠는가.
4이닝 3실점.
투구 수 88개.
이진우가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4회 말.
노아웃 주자 만루.
타석에 최수원이 들어왔다.
5:3
후속 타자는 앞선 이닝에서 2타석 연속으로 장타를 기록했던 조규혁.
밀어내기 볼넷?
그래 최수원은 위협적인 타자다. 하지만 그는 벌써 3경기째 제대로 타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볼넷으로 출루만 했던 타자였다. 반면에 조규혁은 앞선 경기에서 2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현재 대회 홈런왕 후보로 떠오른 타자다.
여기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1점을 더 내주고 홈런왕에게 노아웃 만루의 타석을 내준다? 홈런이라도 내주면 그대로 콜드게임인데? 백원고의 감독은 도저히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목동 경기장에 불합리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재능이 마침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9:3
“아, 역시 서울에 유학을 갔어야 했어······.”
-팀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다.
바로 지난 경기 4강 팀을 상대로 147구 노히트를 기록했던 한민준은 그것이 결코 깨트릴 수 없는 명제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