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팀 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다(1)
“어때?”
“뭐, 잘하기는 잘하네. 쟤 근데 중학생 때 왜 대표팀 안 뽑혔던 거야? 저 정도면 월반해서 뽑힐 만도 한데 아예 3학년 때도 안 뽑혔었다면서. 게다가 저 정도면 너네 학교에서 장학금 주면서 데려올 만도 한데 웬 중앙고?”
“그게 후배한테 듣기로는 저 녀석 중3 겨울방학 때 키가 훅 큰 거라더라. 177에서 거의 10cm가 컸다 던데?”
“그만큼 갑자기 컸는데 운동능력은 안 떨어진 거야?”
“어, 그러니까 밸런스 잡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봐야지. 몸이 그렇게 갑자기 변해도 자기 밸런스는 그대로 찾아갈 만큼.”
경하고의 에이스 조규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만. 그나저나 156km/h이라······. 우완으로 156km/h이면 좌완으로 치면 152km/h 정도인가? 흐음, 뭐 나랑 별 차이 나는 건 아니네. 뭐 종합적으로 봤을 때 공은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좋은데?”
“지랄. 좌완 매리트를 무슨 4km/h씩 놓고 있냐.”
“왜? 그렇게 하면 니가 나보다 구속이 3km/h나 느리니까 좀 그러냐? 우완 최고 151km/h?”
천남고의 에이스 백하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왕중왕전 최우수 투수가 누구였는지 기억 안 나냐?”
“네, 다음 결승전 패배 투수.”
“아, 짜증나.”
“아무튼 우리 졸업하면 이제 쟤가 고교 No.1이라는 거네.”
“정확히는 나 졸업하면 이지. 지금도 쟤가 No.2니까.”
“6타수 6피안타 6피홈런. 와, 무슨 데미안이냐? 666?”
“아, 조규찬. 개짜증나. 아니, 왜 괜히 나 앉아 있는 곳에 와서 시비야. 경기 같이 볼 친구 없냐?”
“친구가 없긴 왜 없어. 여기 너 있잖아. 십년지기 친구.”
누가 뭐라고 해도 올해 드래프트 최대어로 기대받는 두 투수인 경하고등학교의 조규찬과 천남고등학교의 백하민.
개막식이 끝나고 오늘 경기가 없는 학교들은 진작에 해산을 했다. 경하고도 천남고도 모두 시드를 받았던 만큼 1라운드는 면제였고, 첫 경기는 이틀 뒤에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돌아가는 학교 버스를 타지 않았다. 만약 다른 선수였다면 이런 단독행동을 용납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팀의 에이스. 드래프트 1라운드가 확정된 선수들이 가장 위협적인 타자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데 그것을 말릴 고교야구 감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나왔다.”
백하민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조규찬의 표정 역시 달라졌다.
비록 666이라고 놀리기는 했지만, 조규찬은 누구보다 백하민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내심 07년생들 가운데서 자신에게 필적할만한 놈은 오직 백하민 이 녀석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타석에 들어서는 녀석은 그런 백하민에게 무려 6타석 6타수 6안타. 심지어 그 모든 안타를 홈런으로 뽑아낸 괴물이었다.
괴물이 영상에서 보던 그대로 움직였다.
타석에 들어서서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원아웃 주자 2루.
마운드의 투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초구.
-뻐엉!!
당연하게 심판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조규찬이 혀를 찼다.
“쯧, 이거 김새는데?”
“그러게.”
고작 하나의 공이었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최수원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 경기만 패배해도 미끄러지는 토너먼트 전. 1루가 비어 있는 상황에서 저런 괴물을 굳이 상대할 투수가 대체 누가 있을까?
“그래도 기다리면 한 번은 승부하지 않을까?”
“글쎄다. 뭐 게임 승패 결정나면 투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할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중앙고 하던 거 생각하면 이거 재수 없으면 얘들 1라운드에 탈락할 수도 있겠는데? 곤란하네······. 결승에서 설욕해야 하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어차피 쟤들은 준결승에서 나한테 발리고 떨어지게 돼있어.”
“뭐, 가능은 하지. 조규찬 네가 저 녀석 타석 전부 다 걸러버리면.”
백하민의 말에 조규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다 거른다고? 백하민 너라면 어쩔 건데.”
“어쩌기는. 감독님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만약 감독님이 너한테 알아서 하라고 하면 어쩔 거냐고.”
“당연히 삼진이지.”
“너 지금까지 6타석 6타수 6안타 6홈런. 6666인데? 앞으로 삼진만 12개를 잡아도 3할이고 18개 잡아도 2할 5푼인데?”
“그러면 24개쯤 연속으로 잡아서 아예 2할로 만들어주면 그만이지.”
저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확신? 아니, 그것보다는 의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조규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터무니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보이던 이 오랜 친우의 표정이 참으로 좋았다.
타고난 천재인 조규찬 자신과는 다른. 노력과 의지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오는 백하민의 이 표정이 있었기에 그 역시 그에 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
-뻐엉!!!
볼넷.
원아웃 주자 1, 2루.
최수원이 1루로 걸어 나갔다.
“아, 맞다.”
“갑자기 뭐가?”
“아니, 네가 앞으로 쟤한테 삼진 24개 연속으로 잡아서 2할을 만들어도 OPS는 여전히 1이라는 게 생각나서.”
백하민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
중앙고의 4번 타자 조규혁이 타석에 섰다.
-후우.
커다란 심호흡.
원아웃에 주자 1, 2루다.
3번 타자인 수원이에게 고의 4구를 내준 상황.
당연한 일이었다. 조규혁 자신이 감독이라도 저런 타자와의 승부를 지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0.900/0.950/2.800이라니. 대체 저게 사람이 기록할만한 수치인가? 장담하건대 프로리그 MVP를 가져다 놔도 저거보다 높은 성적을 기록할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앞으로도 이번 토너먼트 내내 이런 상황이 자주 벌어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새삼스레 부담감이 엄습했다. 차라리 조규혁 자신이 3번에 들어가고 수원이가 4번에 들어갔다면 이런 부담감이 조금 덜했을까?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마운드의 투수가 피칭을 준비했다.
오늘 상대인 충헌고등학교는 최수원이 없는 중앙고라고 표현하면 딱 어울릴 수준의 학교로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안병영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수준이었다.
마운드의 투수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2루의 주자가 3루까지는 훔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속구를 노렸는데 낙차가 큰 커브가 들어왔다.
볼카운트 0-1.
침착하게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지난 몇 달 동안 수원이와의 길었던 훈련이 눈앞을 스쳤다.
조규혁은 사람이 몇 달의 훈련으로 하루아침에 확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결국 무언가를 축적하는 데는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임계점이라는 것 역시 존재한다고 믿었다.
99℃의 물과 100℃의 물은 딱 1℃ 차이였지만, 그 사이에는 1℃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그 임계점을 통과한 것일까?
제2구.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마운드의 투수가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그는 야구만 10년을 넘게 했다.
이쯤이 되면 조규혁 스스로도 자신의 재능이 얼만큼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때론 포기하는 것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맞는 말이다. 어쩌면 이진우 그 녀석처럼 포기하는 것이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규혁은 발버둥을 쳐보고 싶었다.
한 살 어린 후배에게 먼저 다가가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발버둥을 쳐보고 싶었다.
-따악!!
3루 내야관중석을 아득하게 넘어가는 거대한 파울 홈런.
볼카운트 1-2.
마운드의 투수는 네 번째 공을 준비했고 1루와 2루 주자들은 자세를 낮췄다.
1루에 선 최수원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선배, 충분하다니까요? 재능요? 에이, 그건 메이저리그 정도 될 때 이야기죠. KBO는 싱글A부터 극소수의 메이저급까지 혼재된 리그에요. 그건 싱글A, 혹은 더블A 수준만 되도 뛸 수 있다는 이야기고요. 재능이 좀 부족해도 괜찮아요. 진짜 뒤지게 열심히만 하면 충분히 프로로 살아남을 수 있어요.’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마 다른 녀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최수원의 이야기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적어도 녀석의 시야에서 바라보는 KBO는 고작 그 수준일 테니까.
그런 어마어마한 괴물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습을 해서 그럴까?
어쩐지 지금 마운드에 선 안병영 수준의 투수가 참으로 작게 느껴졌다.
‘대신 그러려면 칠 때는 확실하게 쳐야해요. 꼭 리그에이스급 투수한테 안타 못 쳐도 괜찮아요. 리그에이스급한테 치는 안타나, 5선발급 투수한테 치는 안타나. 안타는 안타니까요.’
네 번째.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났다.
전국단위 토너먼트 1라운드.
1회 말. 원아웃 주자 1, 2루에 볼카운트는 1-2.
경기장에 모인 사람은 투수가 경험해본 인원 가운데 최대이며, 수많은 카메라의 번쩍이는 렌즈 역시 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 한 번 정도는.
하나 정도는 충분히 나올 만하다.
-딱!!!
한가운데 몰린 실투.
밋밋한 128.7km/h의 속구.
조규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큼지막한 타구가 목동의 담장을 넘어갔다.
청룡기 후반기 왕중왕전 1호 홈런이었다.
***
5회 말.
벌써 나의 네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노아웃에 주자는 1루.
나는 이미 세 타석 연속으로 볼넷을 기록했다.
하지만 오늘 경기 나의 타석을 제외한다고 해도 우리 중앙고와 오늘 상대인 충헌고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수준 차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점수는 9:0.
나는 4이닝 동안 57개의 공을 던지며 무실점을 기록했다.
아마 이전이었으면 5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서 3개 더 던졌을 텐데 확실 어깨가 별로라는 어필을 한 이후로 감독님은 유달리 나의 어깨를 챙겨주는 느낌이다.
아무튼 5회에는 멍게 선배가 마운드에 올라가 볼넷 하나와 피안타 하나를 내주기는 했지만, 꾸역꾸역 병살타로 상대를 틀어막았다.
아, 참고로 멍게 선배는 반성문 사태 이후로 나에게 무려 세 번이나 반성문을 제출했다.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 두 번을 반려했다.
솔직히 세 번째도 좀 애매했는데, 그래도 표정이 워낙에 간절해보여서 통과 시켜 주었다. 뭐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기가 저질렀던 짓이 상대에게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는 한 것 같은 반성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에게 피칭 레슨을 받은 선배가 좋아졌느냐를 묻는다면 사실 그건 좀 애매했다.
분명 나빠지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또 좋아졌느냐 하면 그것도 영 아니다. 구속은 더 빨라졌지만, 종합적으로 따졌을 때 이전보다 딱히 좋은 투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멍게 선배는 참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사람이 행복해져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요즘에는 까칠함도 확실히 덜해진 것이 이건 팀 전체적으로 봐도 제법 플러스 요인이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충헌고의 네 번째 투수.
네 번째 타석인데 네 번째 투수라니. 충헌고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투수가 와인드업했다.
9:0 상황에서도 고의사구. 하지만 그것을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은 최선을 다하는 중인 거니까.
그러니까 부디 상대방도 나를 욕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저 나의 방망이가 닿는 곳에 공을 던진 스스로의 실수를 탓하기를
-딱!!!
방망이의 끝에 걸린 타구를 끝까지 잡아당겼다.
결과는 내야수의 키를 훌쩍 넘어가는 좌전안타.
조금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평범한 고등학교 수준의 수비와 맞물린 덕분에 발빠른 1루 주자가 홈까지 들어오기에 충분한 타구였다.
10:0.
우리 중앙고가 1차전을 5회 콜드게임으로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