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위대한 도전(6)
아이들의 표정과 자세가 뻣뻣하다.
에휴······.
최근에 스카우트나 에이전시 그리고 기자들이 워낙 많이 찾아왔던 터라 녀석들도 카메라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런 카메라와 방송국 카메라는 다르니 이걸 뭐라고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 지금 이곳에는 무려 방송국의 카메라가 와있다. 그것도 지상파 방송국의 카메라가.
아, 물론 시청률 빵빵하게 나오는 곳은 아니고 교육 방송의 다큐멘터리 방송이다. 명목상으로는 서른 명도 안 되는 중소야구부 소년들의 12일간의 위대한 도전이라는데. 사실 이건 누가 봐도 나를 찍으러 온 거다.
고등학교 야구가 시청률이 나올 리는 만무하지만, 나 정도 되면 화제성도 있고 무엇보다 요즘같이 인터넷 매체가 발달한 시기에 나를 찍어두면 몇 년 후에 내가 어마어마한 사람이 됐을 때면 재조명 받아서 조회수 달달하게 나올 테니까. 교육방송으로서도 딱히 손해볼 건 없는 장사인 셈이다.
평일 낮 시간. 사실 보통 한국에서 뛰는 야구 선수라면 익숙해지기 어려운 시간대다. 하지만 나의 경우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시간에 경기하는 것이 그리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MLB도 KBO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저녁 시간에 경기를 한다. 하지만 KBO가 우천 취소 같은 거 나오면 시즌 막판에 기간을 길게 연장해서 재경기를 갖는 것과 다르게 MLB는 어지간하면 더블 헤더로 경기를 끝장 낸다. 뭐,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그냥 1년 144경기 뛰는 리그랑 162경기 뛰는 리그. 제일 먼 거리를 버스로 4, 5시간이면 이동하는 리그와 비행기로만 꼬박 6시간 30분. 총 이동시간을 다하면 8시간은 잡아야 하는 리그의 차이라고 봐야겠지.
아무튼 간 평일 낮.
그게 교육방송의 다큐멘터리 녹화용 카메라라고 할지라도 공중파의 카메라가 있었고, 그 외에도 신문사, 스카우트, 인터넷 개인방송하는 사람들까지 정말 많은 카메라들이 관객석에 그득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진짜 경기에 출전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이 경기가 어쩌면 내가 투수로 출전했던 경기 가운데서는 가장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경기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상 투수로써 나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경기는 바로 이번 청룡기 하반기 왕중왕전의 준결승 경기였으니까.
빳빳하게 굳은 동료들을 한 번씩 바라봤다.
2학년 놈들이야 뭐 앞으로 1년 더 볼 놈들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3학년 선배들. 예컨대 규혁 선배와 같은 형들과 한 차례씩 더 눈을 마주쳤다.
물론 이 형들이 여기서 야구를 그만둔다고 인생이 끝나지는 않는다. 이제 고작 인생 1막이 끝난 것뿐이고 굳이 프로 선수가 안 되더라도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이후를 살아본, 그리고 그 이후를 직접 목격한 어른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 모두가 평생 해온 거라고는 야구밖에 없는 아직 어린 청춘들이다. 고작 여기서 TV에 나간다고 빳빳하게 얼어 붙은 채 끝을 내기에는 너무 미진하다.
뭐, 다큐멘터리도 1차전에서 탈락해버렸습니다. 라고 끝내기에는 너무 미진할 테고 말이다.
초구 와인드업.
제구는 여전히 잡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잡지 않았다.
이리저리 폼을 내 마음대로 건드리는 것보다 지금 어깨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자세 그대로 던지고 전문가의 도움 아래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양세준 코치는 어디서 뭘 잘못 먹었는지 지속적으로 나의 폼에 관여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레그 리프팅 탑에서 정지 동작을 가져가는 것 정도만 가지고 뭐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머리가 흔들린다느니, 공을 끌고 나오는 지점이 일정하지 않다느니 하면서 폼의 여기저기를 지적해가며 수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적당히 그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 혹은 해보지만 안된다는 척 무시해가며 그저 꾸준히 먹고, 꾸준히 운동을 했다.
하체를 조금씩 더 두껍게 만들었고, 어깨 관절부 주변 근육을 강화했으며 코어 근육을 단단하게 단련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었다. 하반기 주말리그가 끝나고 이 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의 체중은 고작 1kg밖에 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손끝을 채는 공의 감각이 훌륭했다.
7월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목동의 마운드.
내가 던진 공이 조유진의 미트를 꿰뚫었다.
-뻐엉!!
“굿 볼, 굿 볼.”
뭐, 초구는 어디까지나 영점을 잡는 용도니까······.
그렇게 나의 피칭이 계속됐다.
***
-뻐엉!!
최수원의 공이 포수의 미트에 틀어박혔다.
“이거 고교야구라고 해서 별것 아닐 줄 알았는데 이거 공이 저 포수 글러브에 뻥뻥 박히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네요. 며칠 전에 딸내미랑 그 돌핀스에 그 누구냐. 그 신유민인가? 그 친구 경기 보러 갔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큼지막한 것이······.”
“포수가 낀 건 글러브가 아니라 미트. 그리고 돌핀스에 신유민이는 기껏해야 145km/h 던지는 투수고. 여기 최대표 아들내미는 160km/h를 던지는 투수인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어이쿠. 그렇습니까? 이거 제가 야구를 잘 몰라서······.”
“쯧, 사람이 잘 모르면 공부를 해야지. 어디 모르는 걸 자랑이라고.”
한경건설의 정 이사가 부하 직원인 박 부장을 타박했다.
최경식의 입꼬리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것이 평소에 얄밉기 그지없는 박 부장이 타박을 들어서인지 아니면 정 이사가 자기 아들을 칭찬해서인지는 최경식 본인도 알 길이 없었다.
“크흠, 아닙니다. 160은 아직 멀었습니다. 최근에야 그 156 좀 넘게 던졌다고 하더라고요. 뭐 어제는 같이 아침 먹으면서는 요새 몸이 좀 불어서 그보다 더 잘 던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는 했는데 그거야 직접 던지는 걸 봐야 알 일이죠.”
“아니, 최 대표. 156만 해도 그게 대체 어디야. 그것도 아직 2학년이라면서. 두고 보라고. 수원이 저 녀석 이제 조만간 160도 너끈하게 던질 테니까.”
“맞습니다!! 제 딸내미도 최대표님댁 아드님 이름이 수원이라고. 자기 응원하는 팀 올 운명이라고 아주 노래를 부릅니다.”
“어허, 이 사람들이 아까부터 자꾸 야구 하나도 모르는 소리만 하는구만. 저기 공 던지는 것 좀 보라고. 저게 어디 한국에 남을 공인가? 바로 메이저리그로 직행 할 공이지.”
메이저리그.
사실 정 이사가 수원이에게 부쩍 관심을 가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본래 미국에서 대학교까지 나왔던 정 이사는 젊은 시절 NCAA에서 야구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4년 내내 벤치 워머에 가까운 포지션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전설적인 루 게릭이 자신의 선배라는 것은 정 이사의 가장 큰 자랑 중 하나였다.
“정 이사님. 그런데 요새 메이저리그에 가면 계약금이 얼마나 됩니까?”
“글쎄, 나 학교 다닐 때는 200만 달러씩 받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은 메이저리그도 해외 유망주에 제약이 생겼다고 그래서 얼마나 되는지를 모르겠군. 아, 최 대표는 아들 일이니 알 것 같은데. 요즘 얼마나 돼?”
“그게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미국의 커다란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던 터라 조금 알아봤는데 수원이 정도면 한 25억 정도는 넉넉히 받지 않나. 뭐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25억?”
박 부장이 입을 쩍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25억이면 어지간한 중견기업의 1년 영업이익에 필적한다. 시멘트 업계 10위권에 매출액이 500억에 달하는 최경식의 백두 레미콘도 작년 영업이익은 10억 남짓. 당기순이익은 4억이 채 되지 못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정 이사가 최경식의 이야기에 말을 보탰다.
“에이, 뭐 그 정도로 놀라고 그래. 메이저리그는 최저 연봉만 6억이야. 거기다가 FA로 대박만 치면 천억, 이천억도 우습다고.”
“허······. 저도 아들내미 야구나 시킬 걸 그랬습니다.”
“글쎄······. 박 부장 체격을 보니까 야구 안 시키길 잘한 것 같은데? 어디 야구가 쉬운 줄 알아? 여기 최 대표 유전자 정도 되니까 저런 애가 나오는 거지. 어휴, 나도 아버지가 10cm만 더 컸어도 메이저리그 노려보는 거였는데 말이야. 말이 나왔으니까 이야기인데. 우리 학교 선배 중에서 루 게릭이라고 있단 말이지. 자네들도 들어는 봤을 거야. 루 게릭 병 할 때 그 루 게릭이니까.”
보통은 술을 한껏 마신 다음 나오는 레퍼토리가 벌써 나오기 시작한 것을 보니 오늘 야구장에 함께 온 것이 어지간히 좋은 선택이었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수원이.
자신을 닮아 무뚝뚝하고 주변과 융화될 줄도 모르는 저 녀석이 야구라는 팀 스포츠를 하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으며 또 얼마나 걱정이 됐던가.
-뻐엉!!
“스트라잌!! 아웃!!!”
심판의 손이 번쩍 올라왔다.
“크!! 그렇지. 저런 공이 있으면 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어요. 그냥 뻥뻥 던지면 타자들이 손도 못 쓰는걸. 수원이 저 녀석을 보니까 또 생각이 나는군. 내가 학교 다닐 때 말이지. 팀에 조쉬라는 녀석이 있었어. 1학년 때부터 98마일짜리 공을 던졌는데 제구가 아주 엉망이었단 말이야? 근데 그 녀석이 코치 하나 딱 만나더니 갑자기 제구를 잡아서는 2학년 끝내고 얼리 드래프트로 양키스에 입단을 했었지. 요즘에야 99마일 100마일짜리 투수가 좀 많이 나온다지만 그때는 진짜 그런 게 귀했거든. 아무튼간······.”
경기를 보러 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 학교 다닐 때 야구 했던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본래 접대라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술도 한 모금 안 마셨는데 얼굴이 벌게져서 술 마신 것보다 더 흥겹게 떠들고 있었으니, 경기 끝나고 있을 술자리까지만 무사히 끝낼 수 있다면 오늘 접대는 더할 나위 없는 대성공이다.
“······해서 내가 리저널 2라운드에서 6회 말 등판을 했었단 말이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가 원래 여름에는 제법 더워요. 물론 한국만큼 후덥지근한 날씨는 아니지만. 아무튼 간 그때 내가······.”
아니다.
벌써 네브래스카주 오마하까지 나온 거 보니까 오늘 접대는 이미 성공인 듯싶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1회 초.
볼넷 하나에 삼진 세 개.
최경식이 웃었다.
그것이 아들의 호투 때문인지, 아니면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접대 때문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
“와, 여기 땀방울 떨어지는 거 좀 봐. 이거 그림 미쳤네? 방금 우리 다큐 위대한 도전이라는 제목에 딱 맞는 그림 하나 내가 뽑았다.”
“거봐, 김감독님. 내가 뭐라고 그랬어. 이거 대박일 거라고 했잖아. 봐봐, 얼굴 잘생겼고, 팔다리 길쭉하고. 거기다가 운동도 잘하고. 이건 무조건 대박이지. 지금 다른 방송국에서도 간 보는 애들 엄청 많다고. 지금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찍을 수 있는 거지. 시간 좀 지나 봐라? 어림없다.”
“그거야 시간 좀 지나봐야 알 일이지. 예전에도 경아 피디가 대박날 거라고 했던 걔. 결국 학폭 했던 거 나와서 다큐까지 찍는데 그걸 못 찍었냐고 아주 욕을 욕을······.”
“아니, 그건 방학 때 찍어서 그랬던 거고. 자자, 이야기 그만하고 집중 하세요. 오늘의 하이라이트 이제 곧 시작할테니까.”
“하이라이트?”
“아이, 참. 내가 준 자료 제대로 안 읽었어? 최수원 쟤 투수는 부업이라니까. 본업은 따로 있다고.”
1회 말.
원아웃 주자 2루.
타자 최수원이 본업을 하러 타석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