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위대한 도전(5)
이른 아침.
오늘 저녁에 있을 스터디 생각에 만면에 미소를 지우지 않던 조유진에게 내가 폭탄선언을 날렸다.
“쪼유, 오늘부터 스터디 취소다.”
“어······. 어? 뭐라고?”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였을까? 분명 알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유진이 나에게 반문했다.
“스터디 취소라고.”
“노, 농담이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제 스터디 취소라니?”
“어······,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래도 너도 어제 세연이 바래다주면서 번호는 교환했을 거 아니야. 굳이 스터디 아니더라도 이제는 네가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만나면 되지.”
“아니, 이 도른자야!! 여자랑 번호 교환이 그렇게 쉬운 줄 아냐!!”
아, 맞다. 유진이 얘 모쏠이었지.
“진짜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어제 뭐 둘이서 싸우기라도 했어? 그런 거면 얼굴을 보고 풀어야지. 은진이도 오해일 거야. 수원이 네가 원래 좀 입 다물고 있으면 싸가지가 좀 부족한 인상이잖냐.”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생각해보니까 지금 내가 이걸 왜 해명을 하고 있지? 어차피 넌 시험 전부 통과해서 공부 할 필요도 없는데 그냥 꼽사리 끼던 거였잖아.”
“아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아, 됐고. 넌 그냥 빠따나 열심히 휘둘러라.”
-부웅!!
조유진 녀석. 방망이 돌아가는 폼이 제법 깔끔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아니, 연습할 때는 그렇게 제대로 휘두르면서 왜 타석에만 서면 상하체를 분리해서 휘두르냐고!! 야, 조유진. 너 그거 결국 연습 부족이야. 1루에 나가고 싶은 강한 마음이 연습으로 만들어진 자세를 눌러버리는 거지. 그걸 이겨내려면 조급함을 버리든지, 아니면 그것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몸에 자세를 새겨넣어야 하는데 내가 경험적으로 봤을 때 후자 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높아.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머리가 나쁘면 몸이 더 고생하면 오케이라고.”
“아······. 뭐지? 이상하게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 기분이 영 거시기하네.”
“그거야 입 다물면 싸가지가 좀 부족한 인상으로 하는 말이라서 그런 거겠지.”
“설마 마음에 담아뒀냐?”
“아, 됐고 너 계속 그렇게 잔소리만 할 거야? 얼른 빠따 안 돌려?”
“아, 알았어. 알았어.”
***
“그러니까 최수원을 일단 외야수로 출장을 시키고 중간중간 투수로 올려서 급한 불을 끄는 식으로 운용을 하면 아무래도 투수 운용에 여유도 좀 생기고, 최수원 투구수도 아끼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으음······. 양 코치, 내가 지금 뭔가를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지금 혹시 뭐라고 한거지?”
박감독이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중앙고의 투수 코치인 양세준은 눈치가 그리 빠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 박감독의 질문이 정말 자신의 말을 못 들어서 하는 질문이라고 착각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엘리트 체육인 출신으로 프로까지 경험한 양세준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런 순간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양 코치. 우리 좀 생각을 해보자.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작년에 대통령배에서 배명고등학교가 그렇게 해서 우승을 했지. 덕분에 걔들 전국토너먼트 우승고등학교라는 타이틀은 받았어. 근데? 우승 해서 뭐? 우리 결과를 좀 보자. 결과를. 당시에 배명고등학교에서 3학년이던 애들? 그래, 걔들이야 실적 채워서 대학 잘 갔지. 근데 감독부터 코치까지 욕을, 욕을. 아주 오만 욕을. 얼마나 들었는지 너도 잘 알잖아. 2학년 유망주 이힘찬 어깨 태웠다고 인터넷신문에까지 났어. 그나마 힘찬이가 어깨가 튼튼해서 지금도 잘 던지고 있으니 다행이지. 근데 만약에 나중에 프로에 가서 문제 생기잖아? 백퍼센트 또 그때 이야기 나온다. 이건 힘찬이가 더 대단한 선수가 되면 될수록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어.”
“······.”
“양 코치. 네가 애들 대학 잘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겠어. 나도 그러고 싶지. 근데 그것도 좀 상황 봐가면서 발을 뻗어야지. 응?”
사실 애들 대학에 보내는 건 코치인 양세준 보다 감독 자신의 평판에 더 중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양세준 코치가 생각할 때 자신의 주장은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작년 8월, 배명고도 대통령배에서 그렇게 해서 우승을 차지했었고 매년 그런 식으로 선수를 운용하는 고등학교는 적게는 한둘, 많게는 서넛 이상씩도 존재한다.
하지만 박 감독 입장에서 보면 지금 상황은 도저히 3학년 애들 대학 보내는 일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 양세준 코치가 말한 그런 변칙적인 운용은커녕 일반적인 고등학교 야구부 에이스 투수 운용의 국룰. 75, 60, 60, 45, 45, 105개로 이어지는 12일짜리 선발투수 루틴도 사용하기 눈치 보일 지경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수원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높아져서 이제 언론은 물론이거니와 국내 스카우트들을 넘어 아예 메이저에서 에이전시가 찾아오는 상황이다.
맙소사, 메이저. 메이저라니.
물론 고등학생이 메이저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는다고 무조건 메이저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메이저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한국에 남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메이저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KBO 구단들에게는 일종의 선언이나 다름없다.
-저 수틀리면 그냥 메이저 갈 겁니다. 그러니까 알아서 챙겨주세요.
덕분에 작년에는 마린스가 전체 2번인 최민혁에게 역대 최고액 계약금을 갱신한 10억 5천만 원을 지급했다. 그것은 심지어 피닉스가 전체 1번인 서규탁에게 지급했던 금액인 10억을 넘어서는 금액이었다.
현재 프로-아마 야구간 협정에 의하면 프로구단은 신인 선수 계약금의 10%에 상당하는 지원을 최종 출신학교와 중학교에 7:3으로 나눠서 하게 되어 있다. 만약 수원이가 정말로 10억짜리 계약을 따낸다면 무려 7천만원치 용품 지원이 들어오는 셈으로 그 정도면 다른 비용을 조금만 아끼면 중고로 전용 버스 하나를 구매해도 괜찮을 만큼의 거액이다.
아니, 그리고 설사 그게 아니라 메이저를 간다고 해도 좋다.
물론 그 경우 향후 5년 동안 프로 구단에서 들어오는 지원이 완전히 끊기지만 그걸 대신해서 계약금의 10% 정도는 모교에 기부하는 것이 관례였으니까.
어차피 중앙고가 프로에 애들을 많이 보내는 학교도 아니고 메이저 계약금이면 작년 최고액이 25억 정도라고 들었으니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15억만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인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올 한 해 대학 진학자 서넛을 더 배출하는 것과 프로 전체 1라운드 혹은 메이저리거를 배출하는 것.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대박일지는 너무 쉬운 문제다.
“양 코치. 우리가 지금 하반기 성적만 볼 때가 아니야. 수원이 피칭은 최대한 여유롭게 잡아주고 타순은 조금 조정을 해보자고. 1번으로 나와서 자주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앞에 너무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만 나와서 뭔가 임팩트가 좀 떨어지잖아. 게다가 상대도 너무 걸러대고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 만루에서도 거를 수 있나 한번 봐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박 감독이 양세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소리를 낮췄다.
“잊지 말라고. 이건 양 코치 자네한테도 더할 나위 없이 큰 기회야. 사립고등학교는 임용 상관없이 감독에 체육 교사 자리 주는 거 잘 알지? 괜히 여기서 서 코치랑 아웅다웅 하다가 기회 놓치지 말고. 어? 내 말 알아듣겠어?”
“네, 조언 감사합니다.”
***
“자!! 형님들. 오래간만이야. 아, 오늘 평일인데 대낮부터 무슨 일이냐고? 아직 우리 팀 경기까지는 여섯 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래, 물론 그렇지. 우리 팀 경기까지는 아직 여섯 시간이나 남았지!! 하지만 내가 또 우리 형님들한테 뜨거운 소식 전해줘야 하지 않겠어? 짜잔!! 여기가 어딜까?”
─8888577: 응? 거기 목동 아니야?
─최강동원: 그러게. 목동이네. 봉민이 어제 늦게까지 술방 하더니 목동에서 밤샜냐?
─거포이주혁: 이주혁 오늘 4타석 4타수 4홈런 장전 중
─again1984: 목동? 거기 오늘 청룡기 아님?
─8888577: 맞네. 청룡기.
─again1984: 봉민이 마수원이 보러 간 거임?
─안경에이스: 마수원?
─again1984: 지금 완전 미쳐 날뛰는 애 있음. 주말리그에서 여섯 경기 동안 21타석 10타수 9안타 6홈런 10볼넷에 희플 1개. 0.900/0.950/2.800 기록한 156 던지는 투수.
─안경에이스: 잠깐만. 그러니까 156 던지는 투수가 여섯 경기 동안 21명의 타자를 상대로 안타 9개 홈런 6개 볼넷 10개를 내줬다고?
─again1984: ㅋㅋㅋㅋㅋ 아니, 투수가 타자로 출장해서 지가 빠따를 그렇게 휘둘렀다고.
─최강동원: 씨* 빠따를 그렇게 휘두르는데 그게 왜 투수야?
─사직야가다: 뭐지? 타자로 저 성적 기록했다는 말보다 투수로 저렇게 처맞았다는 게 더 현실성 있는데?
BJ 봉민의 구독자 수는 4만. 편파 중계 BJ 가운데는 그래도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BJ답게 예고되지 않은 낮시간에 갑작스럽게 켠 방송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오, 역시 우리 형님들. 아마 야구까지 꿰뚫고 있네. 그래, 맞아. 오늘 청룡기야. 그리고 안경 에이스형. 너무 놀라지 말고. 지금 중앙고에 최수원이라는 애가 있는데 완전 미쳤어. 21타석인데 10타수야. 그리고 무슨 타율이 9할인데 또 그중에서 66% 확률로 담장을 넘어가. 지금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든. 얘는 무조건 전체 1번. 아니면 메이저 직행일 거.”
[안경에이스 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근데 걔가 왜 마수원임? 이번 시즌 전체 1번 픽 피닉스잖아. 우린 작년에 9등이었고.
“오, 형님. 후원 고마워. 그게 대박인 게 얘가 지금 빠따를 그렇게 휘두르는데 3학년이 아니라 2학년임. 그래서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 드래프트 대상이야.”
─안경에이스: ??
─최강동원: ??
─거포이주혁: 이주혁 오늘 4타석 4타수 4홈런 장전 중
─again1984: 아재들 진짜 몰랐나 보네. 요즘 리그 최수원 쟁탈전인 거 몰랐음? 그래서 최수원이 잘하면 잘할수록 꼴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잖아.
“물론 주말리그가 후반기로 가면 수준이 좀 떨어지긴 해. 아무래도 애들 입시 챙겨 준다고 좀 로테이션 멤버 위주로 돌리고 걸린 것도 없어서 좀 빡세게 안 하거든. 근데 아무리 그래도 10타수 9안타 6홈런은 선을 좀 넘은 거잖아? 그래서, 내가 우리 팀 미래의 4번 타자를 직접 한 번 만나보러 이렇게 찾아온 거란 말씀이지. 과연 우리가 굳이 시즌 꼴찌까지 해가면서 얘를 영입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뭐 그런것도 체크 해봐야 하지 않겠어?”
─사직야가다: 누가 들으면 자의로 꼴찌 하는 줄.
─가을마린스: 그래, 꼴찌나 9등이나 어차피 병x인건 마찬가지라면 그래도 가치 있는 병x이 되자.
─거포이주혁: 이주혁 오늘 4타석 5타수 5홈런 장전 중
─안경에이스: 최수원 걔 안경 썼음? 오른손 투수는 맞아?
─최강동원: 최. 수. 원. 그래도 이름은 개념이 있네.
─17+1깝주혁: ㅅㅂ 4타석 5타수는 대체 어느 나라 야구냐? 설마 8년 통산 5홈런의 오타임?
“어, 저기 연습 하고 있네. 보니까 쟤들이 중앙고인 것 같은데? 기다려 봐봐. 내가 좀 가까이 가서 찍어볼게. 어휴, 근데 여기 무슨 카메라 든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진짜 최수원이 핫한 유망주이긴 한가 보네. 와, 저기 외국인들도 있어. 어? 쟤 광철이 아니야?”
─마린스는수학: 닭 새끼들이 우리 수원이를 노리는 건가?
─사직야가다: 걱정ㄴㄴ 걔들이랑 우리랑 아직 2경기 차이 남.
─봄봄봄: 시x. 9등보다 2경기 더 지고 있는 꼴찌인 건데 왜 이긴 기분이지?
─8888577: 글쎄? 꼴찌나 9등이나 어차피 병x인 건 마찬가지라면 그래도 가치 있는 병x이 되야 하니까?
고등학교 왕중왕전 첫날치고 제법 혼잡한 경기장.
그 가운데서 최수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그라운드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대부분의 카메라가 오직 그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프로필에 190에 83이라고 나와 있거든. 근데 스읍······. 그거보다 훨씬 크고 단단해 보이는데?”
─봄봄봄: 봉민이 지금 남자 보고 군침 흘린 건가? 수원이 x됐네 ㅋㅋㅋ
─8888577: 수원아 돔황챠!!
청룡기 왕중왕전.
마운드에 최수원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