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위대한 도전(4)
“그러니까 미국이라고?”
“네.”
기록이었다.
고작 이틀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다니. 하지만 어지간한 아버지라도 미국의 에이전시가 직접 찾아왔다는 말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 알아봤는데 제임스 코퍼레이션이라면 최근에 제법 이름을 떨치는 회사더구나. 그리고 테드 박이라는 이름의 직원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다만 그게 네가 만난 사람이 맞는지, 혹시라도 사기가 아닌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제임스 코퍼레이션과 그 직원인 테드 박을 조사하고 그게 사기가 아닐지 의심하는 것은 참으로 아버지다웠다.
어렸을 때는 이런 아버지의 태도가 숨 막히게 답답했었다. 특히 그녀를 데리고 왔을 때 보였던 반응 역시 지금과 비슷했는데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 면전에 독설을 내뱉었던 최초의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평생을 무섭게 생각하던 아버지에게 독설을 내뱉다니. 그야말로 사랑의 위대함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 결과는 ‘거 봐라. 내가 그때 뭐라고 그랬냐.’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로 귀결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설사 제임스 코퍼레이션과 테드 박이 맞다고 해도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최근 10년간의 근황을 좀 조사해봤는데 미국 쪽 에이전시랑 고등학생 때 계약을 해서 그게 MLB 진출로 이어진 경우는 얼마 되지 않더구나. 그리고 그렇게 진출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온 건 더더욱 적었고.”
아버지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러나 어쩌면 나도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본래 이 시기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미미한 변화가 보였다. 미미하게 높아진 목소리 톤, 살짝 상기된 뺨, 조금 빨라진 어투까지.
“아버지 진정하세요. 어차피 제임스 코퍼레이션에서 오퍼가 왔다고 무조건 걔들이랑 계약할 이유도 없어요. 급한 것도 없고요. 제가 제 기량을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이런 회사의 제안들은 물밀듯이 밀려올 겁니다. 제가 할 일은 그냥 제일 좋은 조건의 회사를 고르면 되는 거예요.”
“그래······, 그래, 그렇지.”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쩐지 그 모습에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메이저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다. 당시 팀에 그렉 올슨이라는 노장이 있었는데 그 양반이 어느 날은 굉장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출근을 했었다. 사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시무룩한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굳이 나에게 다가와 그걸 이야기해 줬었다.
“아니, 스완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집에 있을 수 있는 날이 좀 적잖아. 그래서 집에 있는 날에는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주니어 등교를 내가 책임지거든. 그래서 오늘도 평소처럼 주니어를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글쎄, 자기 친구랑 같이 가겠다면서 스쿨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러면 친구까지 다 태워주겠다고 했더니만 필요 없다고 알아서 학교에 가겠다는데······. 허, 뭔가 이제 다 컸구나. 대견한 마음도 들고, 동시에 섭섭한 마음도 생기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그리고는 결혼 생활에 대한 시시콜콜한 조언들을 늘어놓았었는데, 당시에는 참으로 귀찮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렉의 말을 조금만 더 명심했더라면 나의 결혼 생활도 그 모양은 아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아무튼 간 방금 나의 이 말이 아버지에게는 스쿨버스 타고 알아서 혼자 학교에 가겠다는 말과 비슷하게 와닿았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도 참 느리구나 싶다.
그렉의 주니어는 고작 열한 살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던데, 나는 무려 열일곱, 아니 어쩌면 서른넷이 돼서야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그때 말씀드렸던 방학 때 미국행은 진지하게 고려를 해주세요. 제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에요. 불안해하시는 부분도 미국 쪽 에이전시랑 계약을 맺으면 대부분 다 해결 가능한 부분이잖아요. 물론 믿을 수 있는 에이전시를 찾는 부분은 아직 아버지께서 도와주셔야겠지만요.”
“그건······. 그래, 알겠다. 미국행은 내가 조금 더 생각을 좀 해보마.”
응?
맙소사, 아버지의 입에서 생각해보겠다는 말이 나온다고?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이었다.
난 회귀 전에 아버지의 고집을 행동으로 수없이 꺾어봤다. 하지만 한 번도 아버지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어 본 일이 없었다. 단 한걸음 조차 말이다.
“그건 그렇고, 박 감독에게 연락받았다. 이번에 기말고사 수학을 19점을 받았다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무래도 수학이라는 학문이 그 근본부터가······.”
“됐다. 야구 선수가 인성 바르고 야구만 잘하면 됐지. 그래도 영어는 83점이나 나왔다고 야구부에서 제일 높은 성적이라고 그러더구나. 후······, 미국이라······. 아무튼 간 그래도 낙제로 대회 못 나가는 성적을 받지는 않도록 해라. 박 감독이 네가 없으면 대회에서 성적 내기가 어렵다고 어찌나 우는소리를 하는지.”
무척이나 희미했다. 하지만 난 똑똑히 봤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미미하게나마 올라가는 것을.
“네!!”
내가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른 아침.
등교할 때마다 종종 냄새가 좀 나더라도 차라리 기숙사에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서 등교라니. 적어도 기숙사에 살면 30분은 더 잘 수 있었을 텐데.
오늘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 멀리 조유진이 가장 먼저 나와서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야, 최수원!!”
“어, 어?”
녀석이 방망이도 내팽개치고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야, 어제 소식 들었다. 아니, 근데 아무리 좋은 소식 들었어도 그렇지 그냥 집에 가면 어떻게 하냐? 게다가 폰은 또 왜 안 보는데.”
“미안, 미안. 무음으로 해놔서. 그래도 어제 나 덕분에 2:1로 공부했으니 좋지 않았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던 2:1 데이트였잖아.”
“아······.”
조유진이 눈빛으로 심한 욕을 했다.
사실 안 봐도 뻔했다.
뭐, 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내가 언제 오나 뻘쭘하게 핸드폰만 바라보다가 헤어졌겠지. 이맘때의 사내놈이란 본래 예쁜 여자 앞에서는 그런 법이니까.
“안 그래도 은진이한테도 톡 엄청 왔었어. 이따 저녁에 다시 같이 공부하기로 했는데. 어때? 같이 할래?”
“어, 어!! 꼭!! 무조건이지!! 진짜 넌 인간적으로 나 빼놓으면 안 되지. 근데 오늘도 세연이도 나오는 거 맞지?”
“세연이? 그 공부 잘한다는 여자애? 왜? 예뻤냐?”
유진이 녀석의 콧구멍이 넓어졌다.
그 진실의 콧구멍을 보고 있자니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답을 들은 것 같았다.
“그보다 최수원. 나 궁금한 게 너 진짜 미국 가는 거냐? 들어보니까 그 에이전시 꽤 유명한 곳이라던데? 유명한 메이저리거도 여럿 계약했고.”
“뭐, 모르지. 나야 그냥 조건 좋은 곳으로 가는 거지.”
“그게 미국 간다는 소리 아니야? 조건이야 무조건 메이저리그가 좋은 거잖아? 거긴 막 계약금만 수십억에 최저연봉도 몇억씩 하니까.”
“그야 잘 풀리면 그렇겠지.”
“갑자기 왠 겸손? 솔직히 너만 한 실력이면 잘 풀릴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글쎄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겠지. 근데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상황에 따라서는 몇 년 정도 마이너에서 구를 수도 있으니까. 몇몇 구단은 거의 초장에 하위 리그 박살을 내더라도 반년씩은 그 리그에 냅두고 게다가 모든 리그 다 단계별로 뛰게 하기도 하고 그러거든. 빅마켓 구단일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고.”
“그래도 한국에서 드래프트되면 최소한 7년은 뛰어야 하는 거잖아. 그건 너무 길지 않나? 아!! 맞다. 그럼 이건 어때? 일단 NPB로 가는 거지. 거기도 계약금은 한국보다 많이 주잖아. 그리고 오타니처럼 한 2년 뛰고 바로 포스팅으로 미국 가는 거야. 그러면 마이너에서 구를 일도 없고 좋은 거 아니야?”
멍청한 소리였다.
“야, 생각을 해봐라. 어차피 스물다섯 살 미만이면 국제유망주 계약이라서 구단에 포스팅피만 포스팅피 대로 챙겨주고 내가 얼마 못 받는 건 똑같아. 게다가 최저연봉으로 서비스 타임 뛰어야 하는 것도 똑같고. NPB를 가느니 그냥 한국에서 7년 빠르게 뛰고 포스팅 자격에 FA로 진출하는 게 낫겠다.”
“아, 그래? 나야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몰랐지. 어차피 나랑은 인연이 없을 이야기니까. 그나저나 말하는 거 보니까 확실히 미국을 염두에 두긴 둔 모양이다? 별걸 다 알고 있네. 그래서 은진이는 너 미국 갈지도 모르는 거 알고 있냐?”
“갑자기 걔 이야기는 왜 나오냐.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고 썸이라니까. 그리고 걔도 자기 일하느라 바쁘겠지. 들어보니까 이번 시험도 회사 일 때문에 못 쳤다고 그러던데.”
“어? 너 설마 못 들었어?”
“뭘?”
***
사실 나는 아이돌이라는 것을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아이돌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마치 프로 1군, 혹은 메이저리거만 보고 야구 선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다.
지금 고등학교에서 뛰는 삼천 명이 넘는 아이들 가운데 프로에 가는 것은 삼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프로에서 살아남는 것은 또 그 십 분의 일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메이저리거라는 것은 그보다 경쟁이 더 높으면 높았지 결코 더 낮지는 않다. 한 명의 메이저리거가 탄생하기 위해 깔리는 마이너리거의 숫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조유진에게 들어보니 아이돌이라는 것도 그것과 유사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스터디를 하는 내내 박은진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뭐, 그런 나의 마음을 떠나서 스터디 자체는 제법 알찼다.
은진이의 말처럼 그녀의 친구인 세연이는 스터디에 매우 큰 도움이 됐다. 경험적으로 볼 때, 많이 아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같지 않았는데, 세연이는 아는 것만큼이나 가르치는 것도 참 잘하는 친구였다.
“자자, 오늘은 어제 내가 멋대로 펑크 낸 거 사과하는 뜻에서 사는 거니까 마음껏 시켜.”
“수원아, 괜찮아? 여기 피자 비싸지 않아?”
“세연아. 걱정하지 마. 말했잖아. 최수원 쟤는 계약금만 수십억을 받을 녀석이야.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조유진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사실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마 회귀 전의 나였다면 살짝 짜증을 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다 이해가 됐다. 아니, 오히려 유진이 녀석이 좀 불쌍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여자랑 단둘이서 밥 먹어본 경험이라고는 엄마밖에 없는 녀석인데, 이런 상황에서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귀여웠다.
비싸지 않겠냐 걱정하는 세연이. 한껏 허세를 부리고 나서 힐끔힐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조유진.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뱃살 걱정에 이걸 정말 먹어도 되나 고민하는 박은진까지 모두가.
너무 비쌀 것 같다고 고민하던 세연이의 걱정이 무색하게 넷이서 배가 터지도록 먹은 음식값은 십만 원이 살짝 넘어갔다. 물론 평범한 학생 기준에서는 무시무시하게 큰돈이었지만 굳이 서른네 살 메이저리거 시절의 금전 감각이 아니더라도 아버지에게 제법 용돈을 풍족하게 받는 처지인지라 크게 부담은 되지 않았다.
폭풍처럼 피자를 흡입한 조유진이 세연이를 바래다주겠노라며 슬쩍 빠졌다.
떠나 가면서 나를 향해 연신 눈을 찡긋거리는 게 자기가 세연이를 데리고 빠져주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세연이가 눈치 없는 녀석을 데리고 빠져주는 걸로 보였다.
뭐가 어찌 됐건 결국 박은진과 나 둘만 남은 상황.
박은진이 나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수원아. 우리 소화도 좀 시킬 겸 잠깐 공원이나 산책하다 갈까?”
다행스럽게도 열일곱 시절과 달리 서른네 살의 나는 조유진처럼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있지도 않은 뱃살을 걱정하며 피자 한 조각밖에 먹지 않았다는 점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