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위대한 도전(3)
청룡기 고교야구 후반기 왕중왕전.
드래프트를 노리는 학생들에게 이 토너먼트는 스카우트들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시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전국 각지. 6월 말 천여 명에 달하는 선수들이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의미로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 음······. 수원아? 이거 선생님은 조금 당황스럽네? 혹시 답안을 밀려 쓰기라도 한 거야?”
주말리그가 끝나고 일주일 만에 찾아온 기말고사.
나는 수학 시험에서 19점을 받았다.
중간고사에서 57점을 받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점수였다. 57점까지는 그래도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네.’ 수준이라면 19점은 오지선다에서 확률적으로 나와야 하는 기댓값 이하의 점수였으니까.
물론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관식이 두 문제나 있었고, 그래서 통상적으로 수학 주관식의 답인 0과 1 가운데서 1로 통일해서 찍었는데 하필 답이 0과 2였던 덕분에······.
“이번에 교육부랑 스포츠 혁신위 권고로 국, 영, 수 학년 평균의 40%에 미달하면 대외활동이 금지되는 거 알고 있지? 그래도 수원아. 아직 보충학습이랑 통과시험 기회는 남았으니까 우리 열심히 해보자!!”
그렇게 나의 방과 후 나머지 학습이 결정됐다.
사실 다시 생각해봐도 미친 제도였다.
아니, 운동하기도 바쁜데 대체 공부는 언제 하라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실패한 야구 선수, 혹은 성공한 야구 선수조차 사회에서 크게 쓴맛을 보는 경우가 많으니 최소한의 학업성취를 보장함으로써 사회화를 시키겠다는 그 의도는 좋다고 치자.
그런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일괄적으로 국, 영, 수, 학년 평균의 40%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국어와 영어야 그렇다고 치지만. 수학. 그 저주받은 x와 y의 나열이 대체 사회생활을 하는데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이해가 안 된다.
아니, 왜? 왜 수학인데 숫자보다 알파벳이랑 각종 기호가 더 많은 건데?
“그래서 결론은 수학 시험에서 19점을 받은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사회 제도와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문제다. 뭐 그런 이야기인 거네?”
“그래, 그렇지. 역시 너도 낙제해서 그런지 내 말에 충분히 공감하는구나.”
“뭐래? 난 낙제가 아니라 그날 중요한 회사 스케줄이 있어서 시험 자체를 못 본 거거든? 그리고 원래는 이 나머지 수업도 안 받아도 되는데, 안 받으면 중간고사 점수의 60% 점수인정인데 받으면 중간고사 시험의 80%까지 점수인정 해준다고 하셔서 받는 거야.”
그리고 이 나머지 수업에는 놀랍게도 박은진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보통 운명이나 뭐 그런 걸 이야기할 법도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순진한 생각을 하기에 수원은 이미 탑급의 셀럽으로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하지 않아도 되는 나머지 수업을 굳이 참석했다는 것부터가 그 속이 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나쁠 것은 또 없었다. 땀내 나는 남자 놈들이랑만 수업을 듣는 것보다는 어쨌거나 더 나을 테니까.
“뭐라고? 그러니까 수원이 넌 수학 수업만 듣는다고?”
“어.”
“어째서? 그러고 보니까 너 영어 수업에서도 못 봤던 것 같은데. 설마?”
“나 영어는 잘 봤어. 83점. 국어도 64점 나왔고.”
솔직히 말해서 잘 봤다고 자랑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점수였다.
아니, 미국에서만 거의 10년을 살았고 모종의 이유로 언어에도 제법 신경을 기울였던 터라 현재 나는 영어와 스페인어는 유창한 수준으로 그리고 포루투갈어도 어느 정도 듣고 말하는 게 가능한 수준까지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영어 실력으로도 시험은 도저히 고득점은 불가능했다.
“뭐? 83점? 뭐야? 수원이 너 영어 왜 그렇게 잘해?”
“그냥, 뭐 어쩌다 보니까.”
“잘됐다. 그러면 우리 같이 스터디 하자. 네가 나 영어 모르는 거 가르쳐주면, 내가 대신 너 수학 모르는 거 가르쳐줄게. 응응응?”
옆자리에 앉은 박은진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에게 쑥 다가오는 순간 여자애들 특유의 향이 훅하고 밀려왔다. 확실히 땀내 나는 야구부 놈들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향기였다.
아마 열일곱 최수원이었다면 여기서 게임이 끝났겠지. 적어도 2, 3년 정도는 얘한테 목을 매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서른넷. 연애도 할 만큼 했고, 연애의 엔딩이라고 볼 수 있는 결혼과 결혼의 엔딩이라고 볼 수 있는 이혼까지 끝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은진이 너 수학 나랑 같은 C클래스 아니었냐? 너 로그함수 뭔지 알아?”
“어······, 어······.”
“됐다. 우리끼리 스터디는 무슨 스터디냐. 돌멩이 두 개 모여봤자 돌 부딪히는 소리밖에 더 나겠냐? 그냥 수업이나 열심히 듣자.”
“아니, 아니!! 그러면 내가 내 친구도 데리고 올게!! 세연이라고 공부 엄청 잘하는 친구 있어.”
“공부 엄청 잘하는 친구?”
여기서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들처럼 눈치 없게 그러면 그 친구랑 둘이서 공부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이러는 게 너무 빤했으니까.
“그래, 그러면 뭐. 나쁠 건 없지. 하자. 스터디. 너 보충 수업 다 끝나는 시간이랑 나 훈련 끝나는 시간 비슷할 테니까. 그때 만나서 하면 되겠네.”
“진짜? 진짜지? 그러면 이따가 보는 거다.”
“알았어.”
***
“미연 쌤!!”
“민우 쌤. 저는 진짜 최선을 다했어요. 저도 눈치는 있다고요. 교장쌤 말씀도 있고 40점까지는 변별력 없이 그냥 맞힐 수 있는 수준으로 깔아놨어요. 덕분에 이번에 학년 평균도 9점이나 올랐잖아요.”
“아니, 그건 그런데······.”
평균 점수의 40% 이상을 맞지 못하면 대회에 출전을 금지한다.
교육부와 스포츠 혁신위원회의 조항은 강력했지만 동시에 꼼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야구 명문고들이 그런 꼼수를 부리고 있었다. 중앙고의 경우 그런 명문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지금까지는 별다른 꼼수가 없었지만, 최근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수원의 기록들이 경기할 때마다 신문에 나오고, 가끔 TV 공중파 뉴스에도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마다 중앙고등학교라는 여섯 글자가 떡 하니 박히고, 무엇보다 최근에는 지역신문에서 교장을 인터뷰까지 해갔다. 그런데 이런 선수가 성적을 이유로 전국대회에 출장을 못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2학년 수학 담당 선생님들끼리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만들었다. 누구라도 40점 정도는 맞을 수 있도록. 설사 그 때문에 평균이 조금 높아진다고 해도 그 평균의 40%만 맞으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19점이라니······.
“미연 쌤, 그러면 애들 좀 잘 좀 부탁드릴게요.”
대체 어디까지 문제를 쉽게 내야 할까.
아무리 그래도 교과서에 있는 연습문제를 숫자까지 그대로 시험으로 낸다면 틀리지는 않겠지?
어떻게든 시험을 통과시키려는 출제자와 실력으로 그 의도를 분쇄하는 응시자 간의 싸움. 이미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
“뭐야? 최수원. 웬일로 기숙사에서 샤워를 다 하냐? 너 어지간하면 꼭 집에 가서 씻었잖아.”
“아니, 이따가 약속 있어서. 다시 교복으로 입고 가야 하는데 땀 묻은 채로 입으면 좀 찝찝하잖아.”
“약속? 무슨 약속?”
“스터디. 나 이번에 수학 통과 못 했잖아. 끝나고 같이 공부하기로 했어.”
조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터디? 저 고고한 최수원이? 차라리 집에서 혼자 과외를 받는다면 더 신뢰가 가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나마 어울리는 사람이라고는 조유진 자신과 규혁 선배 정도. 뭐 나쁜 의미로 어울리는 것까지 한다면 병영 선배 정도가 전부다.
같은 반의 지민이와 경석이도 녀석과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물론 녀석들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당연히 어울릴 수 없겠지만, 조유진이 보기에 최수원의 태도는 자기 험담을 한 녀석들을 대하는 혐오라기보다는 그저 어울릴 가치도 없는 놈들에 대한 무시에 가까웠다.
“경석이랑 병진이가 수학 낙제였나? 그러니까 너 걔들이랑 스터디 한다는 거야? 근데 그런 거면 그냥 유니폼 입고해도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다들 엉망인데.”
“어? 아니. 그건 아니야. 게다가 그 녀석들이랑 내가 스터디 해봐야 돌멩이 부딪히는 소리밖에 더 나겠냐.”
“그러면? 어차피 기말고사도 끝났는데 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지금 시점에서 스터디를 한다는 거야?”
“놈은 아니고. 은진이랑 그 친구?”
“은진이?”
익숙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래, 물론 요즘 최수원이 조금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도 설마?
에이.
“내 친한 친구 수원아. 혹시 네가 말하는 그 은진이가 3반에 박은진이니?”
“글쎄, 걔가 3반이었던가? 아무튼 그 아이돌 연습생 하는 걔 말하는 거면 맞아.”
“마, 맞다고? 아니 왜? 박은진이 어떻게?”
“걔 스케줄 때문에 시험을 못 봐서 전 과목 나머지 학습 다 받는 중이야. 근데 솔직히 은진이 걔도 걍 시험 봤어도 엉망이었을걸? 걔도 영어랑 수학 전부 다 C반이잖아.”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내가 잠깐 이해가 좀 안 돼서 그러는데. 그래, 박은진이 나머지 학습을 받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근데 너랑 대체 왜 스터디를 하는 건데? 뭐야? 둘이 친해? 어떻게? 같은 반도 아니잖아. 아니, 잠깐만 설마 둘이 사귀는 거야?”
“뭘 어떻게 친해. 아까 말했잖아. 걔 수학 C클래스라고. 같이 수업 들으니까 친해진 거지. 그리고 사귀는 건 아니고. 그냥 썸?”
“와, 최수원 클래스 미쳤네. 연예인이랑 썸이라고?”
“야, 아이돌 연습생이 무슨 연예인이냐. 그리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박은진 클래스가 미친 거지. 나랑 썸을 타는 건데.”
조유진이 새삼스럽게 최수원을 훑었다.
큰 키에 탄탄한 몸. 장래성 좋고. 성격은 조금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개선됐다. 게다가 얼굴도 꽤 준수하다. 요새 일부 야구팬들 가운데서는 슬슬 최수원 얼빠도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인기의 비결은 역시 묵직함인가?”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됐고. 어차피 2:1 데이트, 아니. 스터디라면서. 나도 좀 끼워줘.”
“너 낙제 과목 없잖아. 게다가 지금 넌 그런 거 공부할 때가 아니라 야구 빠따 한 번이라도 더 돌려야 할 때 같은데?”
“야 최수원!! 사람이 어떻게 하루 스물네 시간 훈련만 하냐. 나도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행복할 수 있는 거잖아.”
그때였다.
샤워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3학년 투수인 이진우였다.
“수원아, 여기 최수원 있냐?”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야, 최수원. 너 얼른 감독님한테 가봐. 지금 난리 났어.”
“네? 난리요?”
“그래!!”
스카우트의 방문? 아니면 인터뷰? 아니면 친목을 가장한 템퍼링?
하지만 뭐가 됐건 고작 그런 걸로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일까? 뭐 공중파에서 단독으로 나오기라도 했다면 가능할 법도 하지만 최근 고교야구의 인기를 생각해보면 괴물 신인 하나 나왔다고 공중파 언론이 그렇게까지 주목을 할 일은 없을 텐데.
“유진아, 도서관 뒤쪽 세 번째 테이블로 가봐. 스터디 거기서 하기로 했으니까. 가서 나 일 생겨서 좀 늦는다고 이야기해 주고.”
“오케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 잘 보고 오라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난리가 났다는 것일까?
그 의문은 감독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곧바로 풀렸다.
“안녕하세요. 최수원 선수. 저는 테드 박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 외국인이 수원에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JAMES CORPORTION-
제임스 코퍼레이션.
최근 빅리그에서 제법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에이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