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위대한 도전(2)
안경 너머.
아버지가 나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방금 뭐라고 그랬는지 다시 한번 말해봐라.”
그러니까 본래 내가 이 말을 처음 들은 게 언제였더라? 뭐, 그게 언젠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당시에는 쫄아서 어버버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이렇게 봐도 아버지는 참 컸다.
물론 모든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거인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물리적으로 크다. 키는 지금 나랑 엇비슷한데 체격이 훨씬 장대하다. 내가 열일곱 청춘으로 돌아오기 전 전성기 시절의 나와 비슷한 체격이랄까? 게다가 얼굴도 그 체격에 걸맞게 조금 무섭게 생겼다. 진짜 아버지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얼굴은 엄마를 닮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싫다고요.”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가 무서운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절대 아니다.
그라운드에서 아버지보다 더 크고 더 무섭게 생긴 놈이랑 난투전도 벌여봤는데 내 생각보다 내가 많이 세더라. 게다가 뭐라고 해야 할까? 서른넷으로 살다가 열일곱으로 돌아온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아버지가 너무 젊어 보인다. 하긴, 내가 십칠년이나 젊어진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그만큼 젊어진 셈이니, 체감상으로는 그냥 일고여덟 살 차이 나는 형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최규식 코치가 싫다는 말이냐, 아니면 그냥 단순히 미국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냐.”
“둘 다요. 최규식 코치님한테 배우는 것도 싫고, 미국도 가고 싶습니다.”
“왜? 최규식 코치면 재작년까지 프로팀 1군에서 코치를 하던 사람이다. 현역 시절에도 80승이나 했던 투수고. 게다가 네가 미국을 가서 뭐 어쩌려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텐데?”
사실 이 당시의 나는 아버지를 잘 몰랐다.
기본적으로 아버지가 무서웠던 것도 있지만 항상 자기 하는 말만 맞고 내 말은 다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의 논리대로 가장 합리적인 선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좋은 선수가 좋은 지도자는 아니죠. 최규식 코치님은 나쁘진 않은 투수였지만 지도자로는 무능해요. 특히 투수 코치로는 더더욱요. 공부를 안 하는 분이거든요.”
“최근에 미국으로 코치 연수도 1년 다녀왔다고 들었다.”
“그분도 영어 못하시잖아요. 제대로 배워나 오셨겠어요? 게다가 좀 올드 스쿨이시라 제가 배우고 싶은 거랑은 결이 달라요.”
“너도 영어 못하는 건 마찬가지지. 그거라면 차라리 미국에서 선진 야구를 배워온 코치를 내가 수소문해보마.”
물론 아쉽게도 아버지의 그 논리에는 종종 논리를 무시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했다. 어렸을 적의 나는 그것을 고집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건 나이를 먹고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내 마음속의 아버지는 크고 무서운 고집쟁이였다. 물론 그 고집들이 하나씩 꺾일 때마다 커다랬던 아버지도 함께 조금씩 꺾여 나갔지만.
그렇게 독립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저 먼 타지에서 홀로 살아갔으며,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버지가 부렸던 고집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외면하고 있던 부분일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내가 먼 곳으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심지어 가까운 고등학교라도 기숙사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프로에 갈 때도 서울에 있는 팀이기를 바라셨다. 드래프트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내가 포스팅 자격을 얻었을 때는 지금까지 미국에 진출했던 선수들의 생애 소득과 실패의 리스크. 그리고 한국에 남았을 때의 소득을 이야기하며 한국에 남는 것이 안전하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더랬다.
고집쟁이 아버지는 나를 자기 품에 두고 싶어 하셨다.
어차피 그렇게 곁에 둬봐야 아버지 본인 일 하기 바빠서 자주 보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어렸던, 젊었던 나는 그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리 늙지 않은 아버지를 앞에 둔 지금.
나는 아버지의 그 고집이 삐뚤어진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올바르다는 말도 아니었고, 그것을 그대로 두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뭐랄까······.
이십 대에 이혼하고 혼자 사내놈을 키워야 했던 남자라면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고, 그렇게 자라난 아들놈도 열일곱 살이라면 몰라도 서른네 살 정도 먹었다면 그런 아버지를 이해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른네 살의 나는 분명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싫어하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아버지, 저랑 떨어지기 그렇게 싫으세요?”
“뭐, 뭐라고?”
아버지의 무서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건 그냥 자기 속마음을 들켜 당황한 표정일 뿐이라는 것을.
“어차피 일 년 있으면 저도 나가서 살아야 해요. 요즘 아버지 아들 잘나가는 거 아시잖아요. 프로를 가게 되건, 혹은 미국을 가게 되건. 이제 계속 이 집에서는 못 살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예행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좀 보내주세요.”
“······.”
잠깐의 침묵.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한국 프로 야구 구단의 30%가 서울에 있다. 수도권까지 넓히면 절반이 수도권에 있고.”
“그리고 그중에 올해 꼴찌 할 가능성이 있는 구단은 없죠. 뭐 아직 시즌 좀 많이 남았다지만 어차피 둘 중 하나 아니겠어요?”
“그래······. 그렇지······.”
“그러면?”
“아니, 그러니 더더욱 안 된다. 네 말처럼 어차피 내년이 지나면 떨어져 살아야 할 텐데. 벌써 그럴 이유는 없지. 게다가 미국이라니. 거기가 얼마나 험한 곳인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총을 들고 다니는 나라다. 아직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절대 혼자 갈 곳이 아니야.”
190센티에 87킬로의 누가 봐도 다 자란 건장한 청년에게 어린아이라니. 게다가 미국에 대한 저 강한 편견까지. 사실 아버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고등학교 진학 때 그랬던 것처럼 논리를 떠난 아버지의 고집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고집을 꺾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이미 몇 차례나 꺾어 봤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은 조금 더 커다랗게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행을 포기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여행자의 외투를 벗긴 것은 북풍이 아닌 따스한 햇볕인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는 방법 역시 그 고집을 강제로 꺾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말이다.
***
매년 프로야구팀의 프런트가 가장 바쁜 것은 이맘때 즈음이다.
물론 시즌이 끝나고 FA와 재계약을 준비할 때라든지 용병을 물색할 때도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행사들이라면, 이맘때에 있는 신인 드래프트는 그야말로 사소한 정보 하나에도 전체적인 전략을 다시 짜야 하는 터무니 없는 행사였다.
“진짜야? 마린스에서 전체 1번으로 백하민이 점찍었다고? 걔들은 지금 선발보다 포수가 문제잖아. 왜 정병철 대신에 백하민이야?”
“백하민이 최근에 보여준 성장세에 주목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린스야 모든 포지션이 다 부족하니까 그냥 제일 좋은 선수를 뽑겠다는 계획 아닐까요?”
“피닉스는?”
“거긴 그대로 조규찬 확실할 겁니다. 걔들은 원래 덩치 큰 투수 환장하잖습니까. 게다가 심지어 이번에는 좌완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러면 우리한테까지 정병철이 올까? 그래도 3순위인 블레이즈 걔들은 MVP포수 가지고 있잖아.”
“글쎄요, 블레이즈에 조승리도 이제 서른일곱이고. 언제 퍼질지 모르니까요. 조승리 올해 하는 거 보면 그래도 1, 2년이야 괜찮겠지만 그 이후는 장담하기 힘들 테고 게다가 그 후계자로 키우고 있는 양우창은 빠따가 영 엉망이잖습니까.”
“아, 미치겠네. 아니, 백하민은 왜 갑자기 더 잘하고 그래? 그냥 좀 참았다가 더 잘하면 좀 좋아? 지도 저기 부산 내려가는 것보다는 그냥 서울에 있는게 더 좋잖아. 안 그래?”
“그러게요.”
상대방의 전략에 맞춰 나의 전략이 변경되고 그렇게 변경된 전략으로 바뀔 상대방의 반응까지 고려하여 수많은 옵션들을 짜 맞춰둬야 했다. 심지어 그렇게 만들어둔 옵션조차 언제나 들어맞는 것이 아니라서 드래프트 현장에 있는 단장과 프런트들의 순발력 역시 매우 중요하다. 바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년에는 조금 덜 힘들겠죠?”
“내년? 왜?”
“어차피 전체 1번은 고정이잖아요. 지금 보면 죄다 25시즌은 최수원 쟁탈전이라고 난리도 아니던데요 뭐.”
-딱!!
“마, 이 바닥 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어차피가 어딨냐.”
“아니, 아무리 어차피가 없다고 해도 156던지는 홈런왕을 누가 거릅니까? 게다가 메이저? 요즘 애들도 다 계산이 서서 미국 바로 안 가잖습니까. 최근에 마이너 제일 빨리 끝낸 애가 허드슨이잖아요. 3년 반 걸린 걔. 근데 애당초 한국에 남으면 마이너 거칠 필요도 없고 거기에 서비스 타임 없이 바로 FA니까 돈은 돈 대로 더 벌 수 있는데 누가 메이저 직행을 합니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오타니 봐라. 2년만 더 참으면 될걸. 그냥 최저연봉 받고 메이저 가버리는 거.”
“그거야 오타니가 그러는 거 봤으니까 더더욱 안 그러겠죠. 게다가 오타니는 그래도 그 해에 에인절스 국제유망주 슬롯 머니 싹 쓸어 담아서 231만 달러는 받았는데 최수원은 글쎄요······. 솔직히 156을 던지는 홈런왕이라고는 하지만 제구가 안 되는데, 메이저에서 볼 때는 결국 타격 괜찮은데 수비가 안 되는 야수 유망주 정도 아니겠어요? 한국이야 156이면 역대급 투수 유망주지만 걔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최고 100마일씩 던지는 유망주들도 가끔 나오잖아요.”
-딱!!
“인마, 그렇게 줄줄이 말하지 않아도 나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근데 그래도 이 바닥에 어차피라는 말은 없다고. 알겠어?”
“네네, 알겠습니다.”
***
“그러니까 열일곱 살에 97마일을 던지는 유망주란 말이죠? 타격은 지금 당장 메이저에 와도 괜찮을 것 같은 수준이고? 그건 확실한 겁니까?”
“아직 제대로 된 투수를 상대한 적이 거의 없어 약간 미지수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본국에 있었다면 TOP100정도는 될만한 유망주를 상대로 총 여섯 타석을 붙어서 전 타석 홈런을 쳤다고 합니다.”
“흐음······.”
“혹시라도 조금 미심쩍은 생각이 든다면 조만간 토너먼트 형식의 한국에서 가장 큰 대회가 열린다고 하니 그것까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하 직원의 권유에 사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아니죠. 그래서야 너무 늦지요. 남들도 다 보물인 걸 알아버린 다음에는 경쟁이 붙는 거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전 팔머 영감님을 제법 신뢰하는 편이거든요. 당장 선수 의사 타진하고 오퍼 넣어보세요. 우리 제임스 코퍼레이션은 선수의 미국 진출을 가장 효율적으로 도울 능력이 있다는 걸 확실하게 강조해서요.”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