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발전(7)
사람의 몸은 회복을 위해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적절한 휴식의 기간은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 관절을 구성하는 연골조직, 인대, 힘줄 등은 근육과 비교했을 때 그 회복이 매우 늦고 특히 연골조직은 일단 한 번 손상되면 그 회복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스완. 그래도 12주는 쉬어줘야 해. 그것도 최소한이야. 뭐? 움직일 만하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쉬어. 움직일 만한 건 다 나은 게 아니야. 아주 몸이 근질근질할 때까지 참으라고. 지금 네 인대는 미세한 실금이 가 있는 상태라니까. 그냥 그 정도로는 통증이 안 느껴지는 것뿐이라고. 자 이걸 봐. 온전할 때는 이 단단한 테이프도 이렇게 살짝 끝단만 뜯어주면 어처구니없이 쉽게 잘리잖아. 인대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스완, 너 나이도 이제 삼십 대야. 이전과는 회복 속도가 다르다니까.”
돌이켜보면 앵앵거리며 잔소리를 퍼붓던 폴의 이야기는 귀찮았지만 그래도 항상 유용했다. 그리고 열일곱 청춘으로 돌아온 나는 녀석의 말을 아주 철저하게 잘 지켰다. 꾀병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정말 충분히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푹 쉬었다.
내가 회귀한 것이 4월 초. 지금이 6월 말이다. 물론 중간중간 가끔 공을 던지기는 했지만, 그거야 가벼운 운동 수준이다. 애당초 회복 중에도 근육 빠지지 않게 가벼운 운동은 계속해주는 것이 올바른 재활법이다.
아무튼 나는 아직 이상이 없는 어깨에 무려 10주 가까운 아주 긴 휴식을 주었다. 거의 시즌 끝나고 다음에 스프링 캠프 시작하는 기간에 필적할 만큼 긴 휴식이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몸이 아직 열일곱 살의 팔팔한 청춘이라는 점이었다.
본래 내 어깨가 망가지는 것은 앞으로 있을 후반기 왕중왕전부터였다. 그때부터 공을 좀 많이 던지면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었고, 대통령배와 봉황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아작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리틀 야구 때부터 지금까지 중간중간 쉬어가는 기간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오랜 시간 어깨와 팔꿈치를 체계적으로 쉬게 했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만약 무작정 쉬었더라면 근육이 제법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근력과 유연성 운동은 빼먹지 않았다. 그 부분에서는 저기 일루에서 미트를 두들기고 있는 규혁 선배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라이브 피칭에서 내가 던졌던 공이 156km/h가 나왔었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전광판에 구속은 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멍한 타자의 얼굴과 관중석에서 수군거리는 스카우트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번째.
가볍게 하체를 최대한 이용하여, 전신의 체중을 손끝에 모은다는 느낌으로 공을 잡아챘다. 노리는 곳은 한복판. 뭐, 언제까지 이렇게만 던질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뻐엉!!
“스트라잌!!”
적어도 155는 넘어가는 속구를 쳐낼 수 있는 타자는 드문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세 번째. 깔끔한 삼구삼진.
-뻐엉!!
어험······. 아니 뭐, 원래 하나 정도는 빗나갈 수도 있는 법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보다는 조금 덜 깔끔했지만 어쨌거나 삼진은 삼진.
그나저나 난 분명 복판을 노렸는데 바깥으로 너무 크게 빠졌다. 이거 타격 메커니즘과 달리 피칭 메커니즘은 그냥 주워들은 것 정도가 전부인 탓에 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 투수 코치인 양세준 코치님한테 묻기도 좀 그런 게······. 이 양반 전형적인 엘리트 체육인 스타일로 자기가 현역 때 했던 방법을 그대로 알려주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최신 이론 따위는 공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자신이 현역 때 배웠던 것들이 어떤 원리로 그런 것인지에 관해서도 연구 따윈 전혀 하지 않는다.
피칭이 이어졌다.
조금 아슬아슬한 맛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빈볼은 하나도 던지지 않은 채 상대 타선을 완벽하게 꽁꽁 묶어 놓았다.
사실은 살짝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다. 자기 코앞을 스쳐 가는 공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타자를 보니까 차마 스트라이크존 정 중앙을 노리고 던지지는 못할 것 같았다.
덕분에 존에서 살짝 바깥 코스를 노리고 공을 던졌는데 그 덕분인지 세 타자를 상대하는 사이에 볼넷이 두 개나 나와버렸다.
근데 그 가운데 볼넷보다 아찔했던 것은 몸쪽 꽉 찬 코스 높은 곳으로 완벽하게 들어간 공이었다. 바깥쪽에 영점을 잡았는데도 그 코스라니. 아마 존 정중앙을 노렸다면 완벽한 헤드샷이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피칭은 따로 돈을 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액수가 조금 크기는 하겠지만 최근 분위기를 생각하면 아마 아버지도 그 정도 투자는 흔쾌히 해주시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간 그리하여 나의 호투로 8회를 꽁꽁 틀어막은 우리는 9회 초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규혁 선배가 2루타를 쳤고 놀랍게도 품바 녀석이 적시타를 기록하면서 7:6으로 한 점을 앞섰다. 물론 그 직후에 깔끔한 병살타와 귀신같은 내야 팝플라이가 튀어나온 것이 참으로 중앙고답긴 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1점을 앞섰다는 부분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운드로 걸어 나가는데, 어느새 포수 장비를 죄다 착용한 조유진이 따라붙은 채 쫑알거렸다.
“아, 아쉽네. 오늘 타격감이 딱 좋은 게 홈런 한 방 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네, 다음 0홈런 타자.”
“야, 수원아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팍팍 던져. 1점 정도는 내준다고 해도 내가 10회에 역전 시켜 줄 테니까. 알겠지?”
조유진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가만히 생각이라는 것을 해봤다.
만약 연장 10회가 온다고 치면 타순은 7, 8, 9. 중간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조유진의 병살타로 이닝이 마무리되는 것이 그려진다.
역시 이번 이닝 완벽하게 천남고를 틀어막는 것으로 경기를 끝내는 것이 상책이다.
“오늘 공 좋으니까 아까 하던 것처럼 그냥 팍팍 던져줘. 저기 천남고 애들 아무도 못 건드린다.”
굳이 조유진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 정도 레벨에서 투수 최수원의 상대는 오직 자기 자신의 컨트롤 뿐이다.
마운드에 서서 로진백을 툭툭 두들겼다.
직전 공격 이닝.
투수 코치인 양세준 코치님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야, 수원아. 너 인마. 여기서 딱!! 어? 힘을 끌어 모아주고, 활 알지? 활도 어? 최대한 당겼을 때 거기서 조금 더 당겨주고 탁!! 놓아야 하는 거거든. 그리고 그 타이밍에 조준도 하는 거고. 피칭도 그거랑 같아요. 고점에서 한 번 더 힘을 응축해서 빡!! 오케이?”
확실히 그래도 투수 코치라서 그런지 보는 눈은 있다.
내가 레그 리프팅 탑에서 밸런스 포인트를 잡지 않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캐치했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 구속 증가의 가장 큰 이유인데 이걸 굳이 그 전통 이론 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제구? 아니, 그거야 뭐 또 그것대로 다른 해결 방법이 있겠지.
-뻐엉!!
초구, 시원하게 안쪽 높은 코스로 빨려 들어가는 공.
“스트라잌!!”
타자가 크게 움찔했다.
손에서 조금 빠진 공이었는데 코스가 참으로 절묘했다. 뭐, 작정하고 던진 변화구가 행잉으로 들어갈 때가 있듯이, 가끔은 이렇게 빠진 공이 절묘하게 들어갈 때도 있는 법이다.
타자가 본능적으로 살짝 홈플레이트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운드 위에 선 내가 싸워야 하는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의 컨트롤이었다.
9회 말.
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그 싸움에서 나는 19개의 공을 던졌고, 마침내 승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작 하나의 볼넷만을 허용했으니 8회에 두 개의 볼넷을 허용했던 것에 비하자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운드 위.
내가 나와의 싸움에서 이뤄낸 그 승리는 당연하게도 곧바로 경기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말인즉 이번 후반기 주말리그에서 우리 중앙고가 우리 권역에서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는 이야기였다.
외야에서, 내야에서, 덕아웃에서. 선수들이 미친 듯이 마운드를 향해 달려 나왔다.
감독님과 코치님이 덕아웃에서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해야 후반기 주말리그 우승이었는데 거의 분위기는 무슨 월드시리즈 우승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뛰어나온 놈들 가운데 멍게 놈도 있었다.
어디선가 쑥 들어온 집채만 한 손바닥이 나를 끌어올렸다. 설마 규혁 선배인가?
“아, 잠깐만요!! 아, 진짜 하지 마요!!”
나의 필사적인 목소리 따위 흥분해서 날뛰는 선수들의 환호성에 완벽하게 묻혔다. 어디선가 시작된 우렁찬 구령.
“자자, 하나, 둘, 셋!!”
내 몸이 높이 떠올랐다.
와, 미친.
월드시리즈, 아니, 하다못해 한국시리즈 우승, 아니 아니다.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고교리그 왕중왕전 우승 정도는 돼야지. 고작 후반기 주말리그 우승에 헹가래를 쳐준다고?
하늘 위로 떠 오르는 내 몸만큼이나 부끄러움도 치솟는다.
그리고 그날 그렇게 얼굴이 벌게진 채 하늘 위로 떠 오른 내 사진은 인터넷 기사로 올라갔다.
[156km/h를 던지는 홈런왕 최수원. 팀을 우승으로 이끌다!!]
***
Suwon Choi(RHP)
Fastball : 60
Slider : 35
Changeup : 30
Control : 30
“흐음······.”
지미 팔머가 자신의 까칠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것 참 애매했다. 그가 봤을 때 타격은 당장 메이저에 가져다 놔도 쓸만했다. 지명 타자 슬롯이라는 점이 좀 애매하긴 했지만, 만약 그가 쓸만한 투수로 활용될 수 있다면 투수로 활용 가능한 지명 타자라는 점에서 타격이 조금 떨어져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수원을 투수로 활용할 수 없을까?
그게 바로 참 애매한 부분이었다.
속구는 무려 플러스등급.
그래, 고작 열일곱짜리 아이가 메이저리그를 기준으로 플러스등급이다. 오늘 녀석이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빨랐던 공은 무려 97.1마일이었다. 물론 단순히 구속이 전부는 될 수 없다. 자세한 것은 더 많은 장비로 분석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선수를 봐왔던 지미 팔머의 감각은 저 공이 충분히 플러스등급을 줄 만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발전 가능성은 더 컸다. 그 나이가 고작 열일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추후 백마일까지도 충분히 가능하다 봄이 타당하리라.
하지만 저 형편없는 컨트롤과 마이너에서나 간신히 먹힐 법한 변화구들. 적어도 마이너에서 2, 3년은 연마를 해야 써먹을 만할까······.
어려운 문제였다.
차라리 외야수 수비를 익힌다면······. 저 타격 포텐셜이라면 어쩌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홈런왕도 노려볼만한 포텐셜이 아닐까?
“그래. 조쉬, 2주 뒤에 여기로 오는 표 좀 다시 끊어주게. 숙소는 그대로 잡고. 아마 한 2주에서 길면 3주까지 머무를 것 같구먼. 아,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
“진우 선배 부르셨어요?”
“어, 그래. 수원아. 일단 이거 마셔. 탄산이기는 한데 이것도 프로틴 음료라더라. 이 정도는 괜찮지?”
“네, 잘 마시겠습니다.”
진우 선배가 나에게 음료수를 하나 내밀었다.
확실히 진우 선배는 팀의 선배 가운데 사람은 제일 좋은 사람이었다. 훈련도 열심히 했고, 그렇다고 다른 애들 갈구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멍게 놈처럼 어디서 뒷담 같은 거 하고 다니지도 않았으니까. 생긴 것도 저만하면 준수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그야말로 훌륭한 선배의 표본과 같은 사람이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야구를 잘 못 한다는 점인데 어차피 나를 기준으로 보면 중앙고에 야구 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 그건 나에겐 딱히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그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덥지근한 스탠드에 앉아서 함께 음료수를 홀짝였다.
잠깐의 침묵.
묘하게 불편했다. 아, 설마 멍게 놈이 생각 없이 반성문 써오라고 한 것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 건가? 그게 아니면 진우 선배도 야구 좀 가르쳐 달라고? 음, 후자라면 사실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멍게 놈은 자기가 가능성 없는 일에 인생 낭비하겠다는데, 그거 등 좀 떠밀어 주는 데 양심의 가책 따위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진우 선배라면 좀 미안한 일이다. 야구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재능이었고, 냉정하게 말해서 진우 선배에게는 프로가 될 재능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 만약 야구 알려달라고 하면 그냥 거절하자.
내가 봤을 때 진우 선배는 왕중왕전까지 열심히 뛰어서 기록 쌓고, 수능 공부해서 대학 가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그때 한참 망설이던 진우 선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뭐부터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은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싶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