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30화 (30/305)

30화. 발전(6)

조유진 녀석이 1루에서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입을 뻐끔뻐끔 거리는 모양새가 내가 말해준 게 도움이 됐다고 하는 것 같다.

하긴 저 녀석도 순간적으로 빠지는 공을 블러킹 하는 실력을 생각해보면 동체시력이나 반사신경 등은 나쁠 수가 없었다. 그저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보다 일단 1루로 달려 나가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저 괴랄한 타격 자세가 좀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어찌됐건 그래. 뭐 오늘은 도움이 됐다.

마운드의 백하민이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 나라면 몰라도 저런 어설픈 타격폼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녀석에게 당하는 경험은 그리 썩 유쾌하진 않겠지.

역시 천재니 뭐니해도 딱 고등학생이다.

프로에 가면 흔한 일이다. 오늘 뭔가 큰일 치를 것 같았는데 1회부터 두들겨 맞고 내려오는 일이라든지, 어려운 고비 다 넘겼는데 갑자기 9번 타자의 뜬금없는 홈런포에 역전당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들. 그게 가능한 건 어쨌거나 프로에 왔다는 건 적어도 고등학생 때 한가락 했던 놈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레벨은 조금 다르다.

수준 차이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백하민이 조유진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건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백하민에게 헛스윙 삼진을 당한 수준의 커다란 충격이 아닐까?

백하민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과연 여기서 녀석은, 그리고 천남고는 어떤 선택을 할까?

볼넷?

아니면 승부?

녀석의 시선이 잠시 자기 팀 덕아웃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나를 노려본다. 와, 이거 너무 소년 만화적인 클리셰라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확실히 명문은 명문이라고 해야 하나?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알고 있다.

물론 이 경기가 뭐 왕중왕전과 같은 토너먼트라거나 혹은 왕중왕전 진출을 놓고 겨루는 경기라면 당연히 중요한 건 경기의 승패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는 걸린 거라고는 그냥 선수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타이틀 정도가 전부다.

천남고의 감독은 녀석에게 나를 ‘경험’하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뭐,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녀석이 보여줬던 모습만 생각해보면 좀 두들겨 맞을수록 더 강해지는 타입인 건 확실하니까. 마치 회귀 전, 두들겨 맞을 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나 더 열심히 공을 던지고 끝내는 부러져버렸던 나처럼 말이다.

조유진이 슬금슬금 리드폭을 넓혔다.

백하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도루를 염려해서 세트포지션을 가져 가기보다는 나와의 승부에 전념하겠다는 녀석의 의지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래, 네 그 의지 잘 알았다.

어깨가 살짝 더 깊숙했다. 고속 슬라이더다.

코스는 존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라인.

방망이를 멈춰세웠다.

-뻐엉!!

“스트라잌!!”

마운드의 녀석이 마치 삼진이라도 잡은 것처럼 오른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나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으니 어지간한 타자 삼진 잡은 것만큼 기쁘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비록 그게 명백히 존을 벗어난 공이라고 해도 말이다.

만약 여기가 빅리그였고 내가 초이 스완이었다면 휘두르지 않은 나의 방망이에 심판도 자기 눈을 한 번 정도는 의심하고 스트라이크 콜을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뭐, 여긴 한국이고 나는 고작 열여덟 살짜리 고등학생이다. 굳이 구심을 바라본다든지 하지는 않았다.

가볍게 다시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잡았다.

백하민의 몸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왼쪽 어깨가 한층 더 깊숙하게 들어간다. 그 순간, 슬금슬금 리드폭을 넓히던 조유진이 빠르게 2루를 향해 달렸다.

전력을 다해 던진 고속 슬라이더가 날아왔다.

확실히 빨랐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회귀해서 상대해본 모든 공 가운데 지금 이 슬라이더보다 빠른 공은 백하민이 던진 속구밖에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러니까 이 공은 내가 두들기기 딱 좋은 속도로 구속에 최선을 다해서인지 변화의 각과 코스는 조금 전의 공만 못한. 굳이 분류하자면 행잉 슬라이더라고 불러도 괜찮은 그런 공이었다.

-딱!!

굳이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의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포인트였다. 100% 넘어갔다. 궁금한 지점은 펜스를 넘어가느냐가 아닌, 저기 장외에 그물망을 넘길 수 있느냐 정도다.

우측 펜스 너머 그물망 상단.

아쉽게도 타구는 그물망을 넘어가지 못했다. 확실히 이 몸으로는 아무리 좋은 공을 제대로 두들겨도 장외홈런은 영 어렵다.

최선을 다해 2루를 훔친 조유진이 드디어 더러워진 운동복을 털어내며 머쓱하게 삼루를 향해 살살 달렸다. 의미 없는 도루. 아니 사실 내가 공을 치는 바람에 도루 자체가 성립이 안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녀석 개인에게는 나쁘지 않은 플레이였다. 타격이 그 모양이지만 그래도 수비만 되는 포수가 아니라 주루도 되는 포수라는 인상을 스카우트에게 심어줘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백하민이 쓸데없이 커다란 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가가 촉촉한 것이 울기 직전으로 보인다. 괜히 어린 애 괴롭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빠르게 베이스를 돌았다.

4:5.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

“흐음······.”

노인이 수염이 까끌한 턱을 쓰다듬었다.

지미 팔머.

9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던 스카우트로 최근 오타니 레포트로 다시 한번 주가를 올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물 갔다는 평이 대세였다. 아니, 사실 지금도 숫자 놀음이나 좋아하는 아이비리그 출신의 젊은 것들은 그저 운이 좋았다며 그의 감각을 폄훼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그보다 참으로 아름다운 폼이었다.

머리가 조금 흔들리고 축이 되는 발에 힘이 과하게 실리는 감이 있긴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으로 저만한 타구를 만들어 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됐다. 실제로 브라이스 하퍼도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저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Suwon Choi(OF)

Hit : 55~70(?)

Power : 70(?)

Run : ??

Fielding : ??

Arm : ??

“너무 후한가?”

노인이 잠시 고민한 끝에 55~70이라 쓰여있던 숫자를 선으로 긋고, 50~65라고 정정했다. 뭐가 어찌 됐건 대단히 후한 평가다. 당장 빅리그에 가도 주전급 선수로 뛸 수 있는 방망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관건은 수비.

만약 지명 타자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면 그 가치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빅리그에 당장 올리는 것보다 마이너에서 수비 가능한 포지션을 조금 찾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저 스완이라는 아이가 오타니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만.

경기가 계속됐다.

***

멍게는 결국 5.1이닝 6실점을 기록하며 원아웃 주자 1, 3루에서 진우 선배에게 마운드를 양보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우 선배는 사람은 참 좋다. 던지는 공이 좀 안 좋아서 그렇지······.

-따악!!

“마이 볼!!!”

하지만 때론 안 좋은 공도 먹힐 때가 있는 법. 진우 선배는 놀랍게도 6회 원아웃 주자 1, 2루를 병살로 막아냈다. 심지어 7회에는 삼진까지 하나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1.2이닝을 마무리 했다.

6회는 잔루 1, 3루.

7회는 잔루 1, 2루.

실로 다이나믹한 수비 이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이나믹한 수비 이닝을 보낸 것과 반대로 6회와 7회 우리 공격은 딱히 말할 것도 없이 똑같았다.

백하민은 중앙고의 타자들을 완전히 꽁꽁 묶어 놓았고 결과적으로 점수는 1점이 더 벌어진 4:6.

그리고 마침내 8회가 찾아왔다.

“아, 아쉽네.”

“뭐가?”

“아니, 하민이 형 공 이제 슬슬 공략되기 시작해서 오늘 타율 좀 잔뜩 올리고 가나 싶었는데 투수가 교체돼잖아.”

“뽀록으로 내야 안타 하나 나왔다고 아주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갔네.”

“뽀록이라니!! 어깨가 살짝 덜 들어갔을 때. 어? 타이밍 딱 잡아서 완벽하게 쳐냈구만.”

“완벽하게 쳐냈다는 말 쓰려면 그래도 인간적으로 내야수 키는 넘겨야 하는 거 아니냐? 삼루수 앞에 굴러가는 타구가지고 완벽은 무슨······.”

“어허, 앞으로 중앙고의 타선을 이끌어갈 유망주들끼리 서로 다퉈서 무엇할까.”

“헛소리 그만하고 다음 네 차례나 준비해.”

고교야구의 규정에 따르면 투수가 한 경기에서 던질 수 있는 공은 105개까지다. 물론 특별한 기록을 달성 중에는 예외로 하지만 이미 나에게 홈런을 3방이나 허용한 시점에서 기록은 물 건너간 상황.

투구수 101개를 채운 백하민은 결국 8회에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조금 야구 같은 야구가 진행됐다.

8번 타자로 나온 티몬. 그러니까 임지민이 기습 번트로 출루했고 조유진이 내야 땅볼로 출루. 그리고 선행 주자인 티몬이 포스 아웃.

-뻐엉!!

그 상황에서 당연하게 나에게는 볼넷이 주어졌고 1사 1, 2루에서 2타점짜리 2루타. 그리고 깔끔한 병살타.

드디어 6:6 동점.

8회 말. 감독님이 나를 바라봤다.

“준비됐습니다.”

사실 기회가 된다면 마운드에 나가기로 이미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었다. 최근 나는 연습 경기에서나 가끔 던졌지, 리그에서 한 번도 피칭을 하지 않았다.

선배들 대학 진학을 위하여 실적을 채워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다다음 주에 있을 왕중왕전에 대비하여 실전 경험이 필요했다.

이닝 교대 시간에 빠르게 마운드에 올라가 열다섯 개 정도 연습 투구를 던졌다. 경기 시작 전 충분히 몸을 풀어놨지만 그게 벌써 한 시간 전 일이다. 공을 던지는 동안 슬슬 감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의 실전 마운드.

확실히 남들보다 25센티 높은 이 마운드라는 곳에 선 기분은 특별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것은 오랜 기간 타자로만 뛰면서 잊고 있던 설렘이었다.

객석에 들어찬 모든 사람이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타자로 뛸 때도 타석에 들어선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라는 느낌이지만, 마운드에 섰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르다.

오늘 경기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던 천남고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전반기 주말리그에서 1번을 쳤던 3학년이 아닌 2학년 타자였다. 확실히 명문고는 명문고다. 우리 멍게랑 진우 선배가 아무리 부족하다지만 그래도 3학년 투수들인데 얼마 전까지 하위 타순에서 뛰던 2학년이 4타수 2안타라니.

초구.

고민은 없었다.

빠른 공.

커맨드까지는 사치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내가 그것까지 되면 그게 바로 메이저급 선발 투수다.

그저 컨트롤.

존을 구분하기보다는 그저 존 안에 공을 넣겠다는 일념을 담아 전력으로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으라잌!!”

타석에 선 타자의 표정이 마음에 든다.

잠깐의 정적 이후 웅성거리기 시작한 관중석의 반응 역시 마음에 든다.

아무렇지 않은 척 조유진이 다시 건네는 공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쉴새 없이 카메라가 나를 찍어댔다.

이 열렬한 반응에 한 번 더 확신이 든다. 그래, 역시 야구의 꽃은 투타 겸업이다.

***

156km/h.

“괴물이네요······.”

“그래, 괴물이지.”

한 경기 3홈런을 치고 마운드에 올라서 156km/h를 던진다.

터무니없는 괴물이다.

지금 최수원은 둘 중 하나만 해도 드래프트 전체 1번을 다툴 만한 것을 한 몸에 쥐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오타니 쇼헤이를 메이저에서도 투타겸업이 가능할 것이라 평가했던 저 지미 팔머는 최수원을 어떻게 평가할까?

마운드의 최수원이 두 번째 공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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