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9화 (29/305)

29화. 발전(5)

“야, 저기.”

“네?”

“아니, 9시 방향. 포수 뒤편 센터 자리. 민망하니까 너무 뚫어지게 보지 말고. 살짝 카메라 각도 틀어서 보면 되잖아.”

“어!? 외국인 할아버지네요? 얼굴이 좀 익숙한 것 같은데······.”

쯧.

올해 13년 차 스카우트 강병구가 혀를 찼다. 하여간 요즘 것들이란.

“이쪽 일 하는 사람이 지미 팔머를 모르면 안 되지.”

“지미 팔머면······. 아!! MLB 올해의 스카우트 상 최다 수상자!!”

일반인들, 아니 심지어 야구를 좀 아는 사람들도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지미 팔머는 벌써 40년째 야구계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로 한때는 독립리그를 꾸려 운영하기도 했던 나름 이 바닥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특히 커리어 전성기인 2000년대 중반에는 3년 연속 올해의 스카우트 상을 수상한 적이 있었고 최근에는 오타니 쇼헤이의 리포트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것은 그가 이제 막 NPB에 진출했을 무렵 MLB 스카우트들이 작성한 리포트들 가운데서는 거의 유일하게 투웨이의 가능성이 긍정적으로 검토된 리포트였다.

“역시 최수원 보러 온 거겠죠? 설마 이도류 가능성 생각해서?”

“글쎄다. 저 양반이 오타니 리포트로 재미 좀 보긴 했으니까······. 게다가 최수원도 최근에 156까지 던졌으니 영 가능성 없는 건 아니긴 하지. 고2에 저 몸으로 156이면 몸 제대로 키우면 더 나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요즘 메이저 기준이 옛날처럼 156짜리 속구에 80점 만점 주는 시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속구로 156면 어지간하면 70점은 먹고 가는 거니까.”

“근데 최수원 구속 빼면 좀 그렇잖아요. 오히려 구속 올린다고 본래 그리 좋지 않던 제구가 더 망가진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안병영이도 좀 그러네요.”

워낙에 구속이 미미하여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본래 130km/h 전후로 형성됐다던 구속이 133km/h 전후로 형성되고 있다. 오늘 최고 구속은 무려 134.8km/h. 작년 KBO의 평균인 141.3km/h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루아침에 평속이 이렇게 올랐다는 것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오늘 안병영이 제구 어때?”

“그러니까······. 아, 그러니까 안병영 기록 살펴보면 인상적인 기록은 별로 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지난 2년 동안 볼넷은 별로 안주는 투수였네요. 그거 생각하면 오늘 경기 확실히 컨트롤이 좀 많이 망가진 느낌인데요?”

“기록지 말고 다른 자료는 없어?”

“네, 그때 고1 때 이후로 성장이 완전히 멈춰서 일단 손 떼자고 하셨었습니다.”

올라간 구속. 떨어진 제구. 그리고 같은 팀.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그럴 리가.

“일단 오늘부터 안병영이 체크 좀 해봐.”

“네? 하지만 저희 팀 이번 시즌 드래프트 전략은 얼추 다 나왔잖아요. 저 녀석은······.”

“멍청아. 누가 안병영이 데리고 가겠데? 갑자기 스타일이 바뀌었으니까 체크 해보자는 거잖아. 참고자료용으로.”

“아, 요즘 드래프트 직전이라 가뜩이나 퇴근도 못 하고 바쁜 거 잘 아시면서.”

입은 연신 투덜대지만, 또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최근 피칭 기록은 거의 없는 최수원의 그것을 유추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본래 이 바닥 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무엇보다 지금 위에서 최수원 포장할만한 자료 찾느라 난리인 상황인데 투타 겸업의 힌트라면 딱 입맛에 맞는 자료 아닐까?

마운드의 백하민이 공을 뿌렸다.

***

하나, 둘, 셋, 넷.

-뻐엉!!

존을 살짝 벗어나는 슬라이더.

백하민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잡아줄 법도 하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두 번째.

하나, 둘, 셋, 네······.

-뻐엉!!

“스트라잌!!”

역시 속구와 고속 슬라이더의 타이밍은 대충 이 정도인가? 덕아웃에 앉아서 백하민의 피칭을 꽤 오래 지켜봤다. 확실히 재능이 있는 투수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쓸 줄 모르던 구종을 이만큼이나 완성 시켜 오다니.

하지만 부족했다. 경험의 문제다. 천남고는 명문고였지만, 이 정도로 세세하게 선수를 지도해줄 만한 역량까지는 부족했던 것 같다.

세 번째.

백하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고속 슬라이더다.

무슨 공이 올지를 미리 알았고, 공의 궤적을 눈에 익혔으며 그 타이밍까지 완벽하게 파악했다.

-딱!!

완벽하게 잡아당긴 타구가 또다시 담장을 넘어갔다.

확실히 백하민은 지금 내가 상대하기 좋은 투수였다. 딱 때리기 적절한 수준의 공으로 계속해서 정면승부를 걸어와 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저 근성.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살아있다. 눈이 조금 촉촉한 것이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내 경험상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한 감정을 갖는 놈들은 그런 감정을 자주, 그리고 많이 가질수록 크게 된다.

내가 가볍게 그라운드를 돌아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점수는 이제 2:2.

그러니까 오늘도 그때처럼 백하민은 우리 타자들을 완벽하게 묶었고, 점수라고는 내가 만든 홈런 두 방이 전부이며 멍게는 그때보단 조금 나았지만, 그건 멍게 녀석의 실력이라기보다는 수비의 열 일 덕분일 뿐, 언제 어디서 쾅!!! 하고 터져서 또 콜드 게임으로 패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선배, 타자들 잠시 모아주세요.”

“어? 왜?”

“알아낸 게 있어서요.”

“알아낸 거?”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내가 알아낸 것을 확인했으니 팀에 공유해줄 때가 됐다.

***

4회 초, 원아웃 주자 없는 상황.

조규혁의 타석이 돌아왔다.

전광판에 걸린 숫자는 2:3

뒤에 3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앞에 2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숫자였다. 전반기에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만약 그 경기에서 조규혁 자신이 4번 타자다운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래서 그 경기만 이겼더라면······. 전반기 왕중왕전에 출전은 물론이거니와 하반기 왕중왕전 역시 시드를 받아 조금 더 편하게 경기를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운드에 백하민이 보였다.

정말이지 대단한 놈이다. 리틀 야구 시절에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저 녀석은 명문 천남고의 에이스로 드래프트 1라운드 상위 순번을 예약하고 있었고, 조규혁 자신은 드래프트 자체가 가능할지 모르는 위치에 서 있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지난 이닝. 자신의 타석을 끝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수원이가 말해준 이야기를 되새겼다.

“슬라이더가 까다롭기는 한데, 버릇이 있어요.”

“버릇?”

“네, 좀 빨리 던지려는 마음이 강해서 그런지 슬라이더를 던질 때 와인드업 직후 레그 리프팅 단계에서 상체가 속구를 던질 때보다 더 크게 돌아가요. 그래서 보면 저렇게 왼쪽 어깨가 조금 더 깊숙하게 돌아가면 슬라이더. 그리고 정상적이면 속구. 뭐 그런 식이죠. 아, 그리고 공이 오는 타이밍은 속구는 대충 ‘하나, 둘, 셋반’. 그리고 슬라이더는 ‘하나, 둘, 셋, 넷’입니다.”

정말 대단한 힌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팀에서 그래도 타격 솜씨가 제법 있는 편에 속하는 3번 타자 현철이가 깔끔하게 내야 땅볼로 물러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야, 하나도 안 보여.”

첫 번째.

백하민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왼쪽 어깨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깊숙한 것 같았다.

느낌이 온다.

바깥쪽 꽉 찬 코스 존에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다!!

-뻐엉!!

“스트라잌!!!”

심판의 손이 올라갔다.

볼카운트 0-1

슬라이더가 아니라 바깥쪽 꽉 찬 코스 속구였다.

‘후······.’

타석에서 잠시 벗어나 방금의 이미지를 되새겼다.

그래 이만큼 몸을 깊숙하게 돌리면 속구라 이 말이지. 그러면 슬라이더는 여기서 조금 더 돌아간다는 의미다.

됐다.

두 번째.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코스. 하지만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는 공이었다. 왼쪽 어깨는 조금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속구다.

수원이가 말해준 그 타이밍으로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나, 둘, 셋······.

-딱!!

적어도 반 박자는 더 빠른 것 같은 타이밍. 속구는 맞았는데 방망이가 밀렸다. 일루수가 파울지역으로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타구가 1루 쪽 내야 관중석으로 넘어갔다.

볼카운트 0-2.

속구를 예측했음에도 제대로 때려내지 못했다.

확실히 어려운 투수다.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보인다. 수원이의 말처럼 몸이 돌아가는 깊이가 다르다.

그리고 세 번째.

두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코스. 폼 역시 비슷했다. 자신을 상대로는 굳이 슬라이더를 꺼낼 필요도 없다는 뜻일까?

후회하게 해주겠다.

조금 전보다 반 박자 빠르게.

조규혁이 방망이를 크게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깔끔한 삼구삼진.

“······.”

타이밍은 빨랐고, 심지어 야구공은 마치 방망이를 피해가듯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고속 슬라이더.

현철이가 말했던 하나도 안 보인다는 말이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아니, 왼쪽 어깨를 뭐 어쩌라고?

압도적인 수준의 차이.

역시 프로에 가는 재능이란 이런 것일까?

조규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프로라고 모두 다 저런 괴물들일 리는 없다. 그저 백하민이 터무니없는 재능의 소유자일 뿐이고, 최수원은 그걸로도 규정이 안 되는 괴물일 뿐이다.

조규혁이 자신의 뒤를 이어 타석에 들어오는 박경석에게 말했다.

“야, 하나도 안 보여.”

백하민이 중앙고의 타자들을 완벽하게 요리했다.

***

하나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규혁 선배라면 그래도 구종 구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타이밍 맞춰서 방망이만 잘 휘두르면 하나 정도는 내야를 뚫는 타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너무 깔끔하게 삼구삼진으로 자신의 두 번째 타석을 마무리 지었다.

투수가 공만 빠르면 뭐 하냐는 티몬 녀석의 말에 변화구 아무리 기가 막히게 찔러 넣어도 150짜리 공 던지는 것만 못하다고 타박하던 멍게의 말은 아무래도 진심이었던 것 같다.

멍게는 꾸준히 타자를 내보냈고 꾸준히 실점했다. 그래도 그나마 꾸역꾸역 버티는 것은 그래도 커브가 제법 위력적인 덕분이랄까?

5회 말을 끝낸 상황에서 5실점. ERA로 따지면 9점 대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막아낸 게 대견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6회 초.

다시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아, 물론 내 앞에 뭔가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굳이 계산할 필요는 없었다.

대기 타석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솔로 홈런포를 하나 더 날리면 3:5. 문제는 다음 투수가 진우 선배라는 건데. 이 선배 사람은 참 좋은데 실력은 영 좋지 못하다. 이거 어쩌면 오늘 또 콜드게임이······.

-딱!!

응?

6회 초.

워낙에 타자로써 존재감이 미미하여 없는 타자인 셈 쳤던 조유진이 내야 안타를 기록했다.

아니, 그러니까 분명 하나 정도는 그래도 기대한 건 맞는데······.

타격에 관해서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조유진이 이런 센스가 있었다고?

6회 무사 1루.

아직 많이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드디어 밥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내 앞에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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