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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28화 (28/305)

28화. 발전(4)

와, 이건 조금 당황스러웠다.

진짜로 무릎 꿇고 울면서 사과를 한다고? 멍게가?

감정이 조금 복잡했다.

아, 물론 이게 막 통쾌하고 후련하고 복수를 한 것 같은가 하면 그건 아니다. 애당초 내가 멍게에게 품은 부정적 감정은 멍게에 대한 분노나 증오보다는 고작 그런 녀석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존경했던 나의 흑역사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으니까.

아, 나보다 야구도 못 하는 놈을 왜 존경했었냐고?

글쎄······, 이맘때의 나는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 뭐, 딱 고등학생 수준에 어울리는 얄팍한 마음이었다. 이때는 아무래도 내가 보고 자란 것이 야구부가 전부라서 말이다.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 그냥 대부분 사람이 그 넘어설 수 없는 장벽에 대가리 박아가면서 살고 있더라.

그래서 나에게 그런 음습한 감정을 품고, 애들한테 내 험담을 하는 걸 알면서도 그냥 노력했었다. 인정받고 싶어서. 비록 재능은 넘치지만 그래도 나도 선배 못지않게 노력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으, 말로 이야기하니까 또 새삼 부끄럽다.

아무튼 멍게가 저렇게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꼴을 보니까 그래도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아주 멍청하지는 않았구나 싶어서 조금은 부끄러움이 덜해진다.

아, 물론 멍게가 진짜 반성하고 나에게 사과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다. 저 인간이 고작 이 정도로 반성 같은 걸 할 리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단지 저 집착.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아보겠다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릴 만큼 야구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그래도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존경했던 선배의 집념은 저만한 크기였구나. 뭐 그런 기분이다.

아마 보통 사람은 알기 어려울 것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자기 후배한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물론 사회 나가서 책임이 늘고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이 많아지고, 한 번 두 번 상처난 자존심의 가격이 바닥을 친 다음에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제 고등학생이다. 지금 멍게는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싼 선배의 권위와 그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내던지면서까지 나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내가 크게 감동을 받아서 가진 거 낼름 다 뱉어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알겠습니다. 일단 일어나세요.”

“알려주는 거냐?”

“알았으니까 그거 눈물 좀 닦고 얼른 일어나시라고요. 어휴, 누가 볼까 무섭네.”

“고맙다. 진짜 고맙다.”

“당연히 고마워하셔야죠. 제가 진짜 넘쳐나는 충만한 인류애로 기회를 드리는 거니까요.”

아, 참고로 말해두자면 회귀 전의 나는 메이저리그의 사회봉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브랜치 리키 어워드를 한 차례 수상하는 것으로 나의 충만한 인류애를 실제로 증명했다. 했다. 사실 그거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놓자면 할 말이 참 많은데······.

“기회라고?”

멍게가 멍청한 얼굴로 나에게 되물었다.

이거 완전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산통이 확 깨졌다는 표정이었다.

“네, 사람은 누구나 반성할 기회 정도는 주어져야 하는 거니까요. 물론 그걸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건 해선 안 될 짓이지만, 보시다시피 전 마음이 아주 넓은 피해자라서 그 정도 여유는 있거든요.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반성문을 써오시면 됩니다.”

“반성문?”

그래. 멍게는 분명 인간적으로 결격이 많다.

하지만 삼십오 년을 살아본 결과 나는 교육이라는 것에 사람을 크게 바꿔놓을 수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물론 동시에 그렇게 바뀔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희소한지도 잘 알고 있다.

“네, 물론 선배가 학교에서 강제로 그냥 사실관계 나열하고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기계적으로 쓰던 그런 반성문 말고요. 아, 그래!! 선배가 한 짓을 누군가가 선배에게 했다고 상상하고 그랬다면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를 일단 서술하시는 것부터 시작하죠.”

멍게는 기본적으로 인간성 자체에 문제가 좀 있다.

녀석은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이 인간은 자신의 잘못이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혹여라도 그게 절대 안 될 상황이라면 일단 남의 쥐꼬리만 한 허물이라도 어떻게든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너도 잘못했잖아!!’를 시전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든 합리화한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것조차 안되는 상황이 오면 세상이 불합리해서 자기만 가지고 지랄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겠지.

뻔하다.

그리고 내가 경험적으로 봤을 때, 이런 놈들은 자기보다 더 한 놈을 만나서 역지사지를 아주 제대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교정이 어렵다.

그래서 솔직히 반성문이라는 간접적인 형태의 역지사지만으로 멍게 놈의 성품이 고쳐질까는 잘 모르겠다. 아마 어렵지 않을까? 게다가 그것 역시 자발적이기는커녕 내가 내주는 레슨이라는 댓가를 위해 쓰는 반성문이니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정신은 생각보다 얄팍해서 반복되는 행동이 그 정신을 교정하기도 한다. 군대나 교도소에서 인간이 타의에 의하여 변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다 떠나서 멍게 놈이 앞으로 반성문 쓰겠다고 끙끙거릴 걸 생각해보면 잠깐잠깐 몇 분 정도 시간 내서 자세 한 번씩 잡아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만하다. 물론 내가 알려주는 것으로 더 발전하게 될지, 아무것도 못 얻어먹을지, 혹은 퇴보를 하게 될 지는 자신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아, 맞다. 일단 오늘은 반성문 면제입니다. 방금 그건 상당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역시 맛보기 정도는 필요하겠지?

***

덕아웃.

1회 말 만루 위기를 병살타로 넘기고 무사히 돌아온 안병영의 시선이 최수원에게 향했다.

‘······.’

원 포인트 레슨.

정말 짧은 레슨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그동안 절대 올라가지 않던 구속이 쑥 상승했다. 마치 마법 같았다.

150을 던지는 것은 그것을 타고 난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150을 던지는 요령을 알려주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을 체계화시킬만한 경험, 혹은 그만한 학습이 뒤따랐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최수원에게는 그만한 경험과 학습 두 가지가 모두 함께하고 있었다.

물론 그 경험과 학습의 대부분은 타격에 관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망가졌는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없었을지 등에 관한 호기심은 항상 존재했고, 메이저 최정상급의 타자인 수원의 주변에는 그것을 답해줄 만한 엘리트 인스트럭터나 생리학자,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리하여 35살. MLB 최정상급 타자인 최수원은 KBO에서 활동하는 코치 연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현역 시절 이름값으로 코치를 하는 어지간한 프로 출신 코치들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지금보다 20년 가깝게 더 발전된 지식들로 말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안병영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바라보는 최수원은 이제 고작 열일곱 살밖에 안 된 녀석이었다. 본인이 야구 잘하는 거야 재능이라고 친다고 해도 누군가를 이 정도로 잘 가르칠 수 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판국에 그게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를 따지는 것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반성문······.’

선배, 아니 선생님한테 써서 낸다고 해도 그리 탐탁지 않은 것이 반성문이다. 헌데 그걸 운동부 후배에게 써야 한다고?

안병영이 고개를 저었다.

망설임을 갖기에 그 대가가 너무 달콤했다. 어차피 무릎 꿇고 엉엉 운 시점에서 밑바닥은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성문? 그래 좋다. 얼마든지 써주마.

‘아, 그런데 반성문에 대체 뭘 써야 하는 거야. 내용 보고 얼마나 알려줄지 결정하겠다고 그랬는데. 진짜 미치겠네.’

***

3회.

조유진이 방망이를 챙겨 들고 대기 타석에서 타이밍을 헤아렸다.

‘하나, 둘······.’

-뻐엉!!

“스트라잌!!”

속구는 생각보다 더 빠르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 둘, 세······.’

-부웅!!

“스트라잌!!!”

아, 진짜 생각보다 더 빠르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 둘, 세엣······.’

-부웅!!!

“스트라잌!! 아웃!!”

속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던 타이밍에서 0.1초 정도?

슬라이더도 미친놈처럼 빠르다. 근데 각도 상당히 예리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쳐야 하는 거지? 답이 없다.

품바, 아니. 경석이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최수원이 매일 그렇게 불러서 그런가? 조유진은 요새는 경석이가 진짜 점점 라이온킹에 나오는 그 멧돼지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3회 말.

원아웃 주자 없음.

조유진의 첫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콤팩트한 자세.

짧게 쥔 배트.

얼마 전 최수원이 그에게 해줬던 말이 기억났다.

코치들이 이런 타격을 가르치는 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냥 방향이 다른 거지, 틀린 건 없다고.

초구.

‘하나, 둘, 셋.’

-딱!!

완벽하게 속구를 노린 타격.

하지만 방망이가 밀렸다. 3루 파울 라인을 넘어가는 약한 타구.

조유진이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최근에 공부라는 것을 조금 했다.

왜 고교야구의 코치님들이 다운스윙 위주로 알려주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의 장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공부를 통해 그가 알게된 것은 야구라는 것이 그가 생각했던 것을 아득히 넘어가는 수준으로 복잡한 학문적인 뭔가를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망할 47페이지짜리 논문이라니.

그것도 알아듣기 힘든 수학에 뭐에. 게다가 가격도 무려 9000원으로 그 돈이면 든든하게 설렁탕 한 그릇을 사 먹을 수 있는 큰 돈이다.

아무튼 결론만 따져보자면 결국 코치님이 다운스윙을 강조하는 것은 나무 배트로 장타를 만드는 것은 어지간한 기술과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그나마 위에서 내려찍는 다운 스윙은 방망이를 휘두를 때 힘을 싣기 편하다.

두 번째.

-뻐엉!

아슬아슬하게 방망이를 멈춰세웠다.

존을 살짝 벗어나는 슬라이더. 심판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백하민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함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뻔하다.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경기에 나온 것은 최수원에게 설욕을 하기 위함일 것이고, 9번 타자 조유진 정도는 그냥 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작은 돌멩이 정도겠지.

아마 초구에 방망이를 휘두른 것으로 그가 속구를 노리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하민은 고교 최우수 투수. 그리고 고교레벨에서 하위 타자에게 150이 넘는 공은 알아도 치기 힘든 마구다.

그리하여 세 번째.

높은 코스 빠른 공.

조유진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오래 배워 몸에 익은 그대로 강하게 내려찍는다. 장타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최수원이나 규혁선배와 같은 힘이 없다. 그렇기에 그처럼 공을 두들기고 끝까지 배트 회전을 잡아끌지도 않았다. 오른손잡이였지만 좌타석에 서서, 그저 가져다 맞추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딱!!

다운스윙의 가장 큰 장점 중 한 가지.

‘높은 코스 공에 강하다.’

조유진의 방망이가 백하민의 151km/h의 조금 높은 코스 속구를 제대로 강타했다.

빠르게 날아가는 타구.

스윙 직후 멋들어진 팔로스로우 따위는 없었다.

그저 3할 타자를 꿈꾸며, 일루를 향하여 고개를 박고 최선을 다해서 달려 나갔다.

그리고 공을 던진 직후, 백하민은 움직였다.

수천 번, 아니 어쩌면 수만 번 연습해서 몸에 익은 그 동작 그대로.

정석 그 자체인 일루 커버.

9번 타자의 타구는 제법 빨랐다.

아마 타구각이 높았더라면 라인드라이브성 장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일루에 가까운 방향.

천남고의 일루수가 빠르게 움직여 원바운드 된 타구를 받아냈다.

그리고 빠르고 간결한 토스.

일루에 커버를 나온 백하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웃!!!”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재능과 노력. 그 모든 것을 갖춘 천재 투수가 마운드에 우뚝 섰다.

그리고 타석에 괴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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