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발전(3)
멍게 녀석의 얼굴이 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쯤에서 멍게놈이 그냥 물러날 줄 알았다. 무슨 속셈이 있건 간에 녀석의 얄팍한 인성이라면 이 정도 이야기에도 그 속셈을 드러내고 ‘미안해.’ 대신 ‘미친 놈아 너도 잘못했잖아!!’로 나오리라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멍게가 보인 반응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놀랍게도 녀석은 무려 거기서 한 번 더 ‘4과’라는 것을 했다.
“야, 네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잔뜩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형이 미안하다. 그러니까 속 좁게 굴지 말고 그만 화 풀자. 어?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하겠냐. 그리고 어차피 형은 이번 리그 끝나고, 왕중왕전까지만 하면 끝 아니냐. 그래도 씨발, 2년을 봤는데 마지막에는 웃으면서 헤어져야지. 어? 안 그러냐?”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와, 이 새끼는 역시······.’
물론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았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미안해 대신 미친놈을 외치고 사과문 대신에 4과문을 작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육하원칙을 설명해줬는데 그걸 또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과 대신 4과를 한다고?
“네, 네. 알겠습니다. 어휴, 당연히 2년이나 봤는데 마지막에는 웃으면서 헤어져야 뒤끝도 없고 좋죠. 그나마 참 다행스럽게도 왕중왕전까지만 하면 끝이네요. 선배님 말씀 아주 잘 알아들었으니까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멍게 녀석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그래. 당연하다. 지능 수준이 멍게가 아니라 아메바 정도만 돼도 내가 하는 말이 비꼬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겠지.
“야, 최수원.”
“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냐? 어? 뭐가 그렇게 잘나서 선배한테 그 따위로 구는 거냐고.”
“뭐가 그렇게 잘나기는 했죠. 야구 선수가 야구를 잘하잖아요.”
나의 적절한 사실 적시에 마침내 안병영이 폭발했다.
“허, 새끼. 말 진짜 엿 같게 하네. 야!! 너 야구 좀 잘한다고, 집 좀 잘산다고 언제까지 네가 대장일 것 같아? 고교야구에서 이런다고 프로 가서도 계속 이럴 거 같냐고. 안 봐도 뻔하다. 인성이 이따위인데 널 누가 좋아하겠냐? 그러니까 야구부 애들도 널 싫어하는 거 아냐.”
“에이, 입은 삐뚤어지셨어도 말은 바로 하셔야죠. 야구부 애들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 선배가 저를 질투하는 거겠죠.”
“아니거든? 야구부 애들 전부 너 존나 싫어해. 야구 좀 잘한다고 특혜나 받고. 집 잘 산다고 특혜받고. 뭐가 그리 잘나셔서 남들 다 기숙사에 사는데 혼자 등하교냐? 특별대우가 아주 몸에 뱄지? 아주 최수원 존나 혼자 잘났네.”
기숙사 정원이 20명이라는 점.
그리고 내가 빠진 덕분에 저 멀리 사는 임지민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는 점 따위는 지금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듯싶다. 뭐, 여기서는 그렇게 적절한 오류 수정을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을 긍정해주는 것이 대화를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네, 제가 좀 혼자 잘나기는 했죠.”
역시나 긍정의 힘이 위력을 발휘한 것일까?
마침내 벌개질 대로 벌개진 멍게 녀석의 얼굴이 임계점을 서서히 돌파하기 시작했다.
“야!!! 됐다. 됐어. 내가 말도 안 통하는 너 같은 새끼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 너랑 화해 하려던 내가 병x이지 병x이야. 공 빨리 던지는 법 좀 안다고 아주 유세는 시발. 얼굴만 봐도 짜증나니까 당장 꺼져라.”
여기서 갑자기 공 빨리 던진 다고도 아니고, 빨리 던지는 '법'?
그래, 드디어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어울리지 않게 웬 사과인가 했더니 결국 내 구속이 갑자기 늘어난 비결을 알고 싶어서였다.
뭐, 사실 알려주지 못할 건 없었다. 비결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도 연결 동작 가운데 레그 리프팅 탑에서 밸런스 포인트를 주던 것을 그대로 끌고 나가는 것뿐이다. 이게 무슨 숨겨진 비기도 아니고 무엇보다 알려준다고 해봤자 그걸 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결국 개인의 자질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밸런스 포인트를 가져가는 것도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걸 강조하는 코치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말이 안 되니까. 밸런스 포인트를 강조하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아,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저 붙잡고 질척거리는 이유가 제가 구속 늘어난 게 뭔가 비결 같은 거라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거 알려달라고 하고 싶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음······, 그거라면 사실 어려운 건 아닌데······.”
갈등 가득한 얼굴.
뻔하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는데 약한 소리는 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구속의 유혹이 워낙에 컸던 탓일까? 놀랍게도 당장 꺼지라고 소리치던 멍게 놈이 태세를 순식간에 전환했다. 물론 그 태세의 전환까지도 참으로 멍게다웠지만.
“그러면 뭐, 알려주던가.”
크, 저 도도함이라니. 마치 내가 무릎 꿇고 제발 배워주세요 부탁해야 하는 것 같지 않던가? 하지만 알려주지 못할 건 없다는 말은 동시에 꼭 알려줘야 하는 이유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 무릎 꿇고 엉엉 울면서 ‘후배님 야구가,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요.’ 하면서 진심으로 사과를 해도 봐줄까 말까인데 사과 대신 4과를 하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친절하게 코칭까지 해줄까.
게다가 뭐? ‘알려주던가?’ 아니, 애당초 그런 대사는 연예인급의 미녀가 새침하게 했을 때도 먹힐까 말까 한 대사다. 얼굴에 여드름 빡빡 난 멍게 놈이 할만한 대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거절하겠습니다. 저희가 사실 그렇게 서로를 지극하게 생각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야!! 최수원!! 별것도 아니라며. 그냥 좀 알려줘. 너도 내가 더 잘 던지면 이득 아니야?”
“네? 어째서죠?”
이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었다.
아니, 멍게가 잘 던지면 내가 이득이라니? 대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치면 그런 논리가 완성되는 거지?
“가······, 같은 팀이잖아!! 팀원이 강해지면 너도 좋지. 게다가 전국대회에서 너 혼자 던질 거야? 아니잖아. 투수 하나 잘 던진다고 우승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 던져서 너랑 같이 팀 우승으로 이끌면 너도 전국에 이름 날리고 서로서로 좋은 거잖아. 너랑 친한 조규혁이나 조유진도 스카우트들 눈에 띌 기회 더 많아지는 거고. 안 그래?”
처음에는 말하는 본인도 조금 부끄러웠는지 같은 팀이라는 말에서는 살짝 더듬던 멍게가 점점 자신의 말에 힘을 실어 갔다. 뭐랄까? 입 밖으로 변명을 내뱉으면서 마치 점점 그게 사실인 양 스스로에게 세뇌를 거는 타입이랄까?
확실히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은 아니다.
“네, 잘 아시네요. 안 그렇습니다. 선배. 만약 목 위의 거기에 생각이라는 기능이 달려있으시면 그걸 좀 사용하려고 노력을 해보세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같은 팀이라 팀원이 강해지는 게 좋은 사람이 대체 왜 제가 야구 잘하는 건 왜 좋아하지를 않으셨던 겁니까.”
“그······, 그건!!”
“네네, 뭐 말은 쉽죠. 하지만 그 사람을 정의 내려주는 건 그 사람이 보여준 행동입니다. 아무튼 선배, 오늘 선배가 하는 개소리들은 참 잘 들었고요. 내일 선발로 나가셔야 할 텐데 좀 쉬세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거의 끝났잖아요? 저희 인연도. 그리고 뭐······.”
마지막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여기서 멍게의 남은 야구인생까지 들먹이는 건, 아무리 멍게가 싫은 놈이라고 해도 너무 잔인한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멍게도 일단은 사람의 범주에 속했던 탓일까?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대충 내가 삼킨 말이 뭔지 알아 들은 눈치다. 녀석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콧구멍이 벌렁거렸고 움켜쥔 주먹도 함께 부르르 떨린다.
여기서 굳이 더 말을 섞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등을 돌려 걸었다.
그때였다.
“야 최수원!!!”
등을 돌려 걸어가는 나를 멍게가 크게 불렀다.
-털썩
“미안하다. 내가 진짜 미안하다. 내가 구체적으로 뭐를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미안하다. 근데 좀 알려주라. 제발······.”
아······,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전개인데?
이것도 4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사과라고 인정해야 할까?
나의 눈앞.
멍게가 정말로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
조유진은 알아주는 수비형 포수였다.
최수원이 회귀하기 이전. 본래의 역사에서도 그는 2할대의 타율로 드래프트에 뽑혔고, 프로 1군에서 1할대의 타율을 유지하면서도 1군과 2군을 오가며 꾸역꾸역 10년을 버텨냈다.
물론 덕분에 보통 사람이라면 환생을 백 번 쯤 해도 못 먹을 만큼의 욕을 고작 10년 만에 얻어먹었지만 어쨌거나 타율 1할 대의 타자가 프로에서 10년이나 버텼다는 것이 그의 수비가 수준급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수비 가운데 특히 대단한 것이 바로 이 블로킹.
그것은 흡사 철벽과도 같았다. 공이 바닥을 찍는 그 순간 바운드된 위치로 몸의 중심을 빠르게 이동시켜 빠르게 W자로 앉은 뒤, 미트를 가랑이 사이로 대면서 고개를 숙여 목을 보호한다.
그 모든 동작이 이뤄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마스크를 쓴 조유진이 이를 악물었다.
-퍼억!!
가슴팍에 맞고 홈플레이트 앞에 떨어진 공을 그가 재빨리 주워들었다.
안병영이 던지는 공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공은 커브. 그리고 커브는 어지간히 잘 던지는 투수라고 해도 언제나 원바운드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커브볼 투수에게 블로킹이 완벽한 포수는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나 다름없다.
실제로도 안병영은 조유진이 포수 마스크를 썼을 때 평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커브를 활용했다.
그래서 지금 이 원바운드된 공의 결과물이었는가를 묻는다면 조유진으로써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제구를······.’
1회 말.
원아웃에 주자 1, 3루.
볼카운트는 1-1.
놀랍게도 방금 안병영이 던진 공은 ‘속구’였다.
그랬다. 안병영은 방금 속구를 땅에 패대기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운드에 선 안병영의 표정은 매우 좋았다. 입꼬리 끝이 명백하게 올라가 있다. 물론 그가 공을 바닥에 패대기 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은 아니었다.
132km/h.
그것은 안병영에게 있어서 일종의 통곡의 벽과 같았다.
컨디션이 최상인 날에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던졌을 때 간신히 나오는 구속으로 지난 2년 전에 한 차례 기록한 이후, 만으로 2년. 햇수로 3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구속은 거기서 단 1km/h도 늘지 않았다.
아쉽게도 현재 목동의 최신형 전광판에는 구속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프로가 사용하던 시절에야 이런저런 장비들이 있었지만, 프로구단이 떠나가며 그런 장비들도 모두 함께 철수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 통곡의 벽을 넘어섰음을.
물론 제구가 좀 많이 안 됐고, 그렇게 넘어선 구속도 딱히 강속구라고 불릴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그가 132km/h라는 통곡의 벽을 넘어섰다는 사실이었다.
134.2km/h
안병영이 볼넷으로 타자를 출루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