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발전(2)
천남고는 명문고다.
중앙고의 야구부 부원이 서른 명 남짓인데 반하여 천남고 야구부는 그 숫자가 마흔을 훌쩍 넘어간다. 그 말인즉 부원들 가운데 적어도 열댓 명이 매번 덕아웃이 아닌 응원석에서 경기를 관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하민 선배 진짜 멋지지 않냐? 상대가 리그 완전 박살내고 있는 타자인데, 드래프트 얼마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승부하겠다고 굳이 선발로 나가고 말이야.”
“글쎄, 난 그 선배 좀 거북해서. 좀 이상하다고 해야하나? 게다가 지금도 그냥 똥고집 같단 말이지. 솔직히 상엽 선배도 실적 아슬아슬하잖아. 이런 의미 없는 경기는 그냥 상엽 선배한테 양보하는 게 낫지 않나?”
“야, 상엽 선배 실적 못 채운게 어디 하민 선배 잘못이냐? 하반기 리그 다섯 경기 전부 다 상엽 선배 선발로 나갔는데 경기 터트리는 바람에 아직 이닝 못 채운 거잖아.”
지난 왕중왕전.
천남고는 결승전에서 경하고에게 4:3으로 패배했다.
투수로는 105개의 공을 던지고 타자로는 한 개의 안타를 쳤던 백하민은 그날 밤 집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벌써 올해 들어 두 번째 울음이었다.
어릴 적 그가 인생의 목표는 원대했다.
KBO에서 3년 연속 MVP를 수상하고 메이저로 진출하여 사이 영. 그리고 명예의 전당까지.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다고 비웃을만한 목표였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친척들까지도 그의 그런 꿈을 그저 어린아이의 터무니 없는 망상처럼 치부하였다.
아마 그때도 울었던 것 같다. 자신의 꿈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해서.
그러던 어느 날이었던가?
반의 담임 선생님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
“하민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거야. 옛날에 어느 위대한 선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 그때는 선생님도 어릴 때라서 그 선수가 너무 멋있어 보거든?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결국 세상 사람 대부분이 소시민인 거 있지. 세상 사람 대부분이 비웃는 삶은 그게 아무리 대단한 삶이더라도 너무 괴롭잖아. 그러니까 하민아. 일단 눈에 보이는 것부터. 소시민들도 비웃기보다는 ‘우와 대단하다.’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의 일부터 차근차근 보여주자.”
그날 이후 백하민은 자신의 목표를 누군가에게 대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목표를 하나씩 하나씩 이뤄갔다. 예컨대 남은 기간 피홈런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든지, 졸업 전에 왕중왕전 우승 트로피를 학교로 가지고 온다든지 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물론 그런 목표들에 실패할 때마다 백하민은 어린 시절처럼 이불에 들어가 펑펑 울었지만 그 울음들은 언제나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타석에 괴물이 들어왔다.
그의 목표를 완벽하게 박살 냈던 3연타석 홈런의 괴물이었다.
‘더 커졌네.’
타석이 꽉 찼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난 것일까? 하지만 괜찮다. 백하민 자신이라고 그동안 놀았던 것이 아니다.
그의 나이 이제 만으로 열여덟 살.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할 나이다. 실제로 전반기 왕중왕전을 거치며 스스로도 크게 성장했음을 느꼈다. 게다가 지난 5주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그렇게 성장한 경험치를 몸에 온전하게 흡수했다.
백하민은 단언할 수 있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니 지금의 나는 4개월 전의 나보다 한 차원 더 강하다.
이미 초구는 정해뒀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지난 왕중왕전에서 그를 최우수 투수로 올려줬던 공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같은 코스로 찔러 넣는 속구. 그걸로 카운트 두 개를 잡고 마지막으로 뚝 떨어지는 커브로 헛스윙 삼구 삼진.
만약은 생각하지 않았다.
완벽한 승리의 이미지.
홈플레이트 너머 백하민 자신을 바라보는 천남고 포수 김보균의 눈에 신뢰가 가득하다.
‘저 새끼 저거 또 지랄이네.’
3년.
함께 호흡을 맞춰온 시간이 무려 3년이다. 이제는 동안 그의 눈빛만 봐도 그가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그가 던져왔던 슬라이더와는 달랐다.
팔목의 회전을 억제하고 손가락에 힘을 더했다. 본래 그가 던지던 슬라이더의 구속은 135 전후. 하지만 팔목에서 낭비되는 힘이 사라짐으로써 구속이 더 빨라진다.
142km/h.
고교리그의 어지간한 투수들, 아니 프로리그의 평균 속구보다도 빠른 슬라이더가 날카롭게 코스를 파고들었다.
존을 슬쩍 빠져나가는 코스로 최수원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따악!!
됐다.
헛스윙 스트라이크는 아니지만 그래도 파울이면 결론은······. 응?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분명 밀린 타구다.
3루 쪽이 아닌 1루 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어······, 어?”
백하민의 동공이 축소됐다.
과도한 긴장. 등이 축축하게 젖어온다. 설마······, 아니지? 아닐 거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뜨거운 폭염이 내리쬐는 6월.
백하민은 불합리한 재능이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홈런.
최수원이 특유의 조깅하듯 가벼운 걸음으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백하민의 시선이 그에게 못 박혔다.
슬라이더에 속구에 떨어지는 커브. 그가 세운 완벽했던 이미지가 경기 시작과 동시에 박살났다.
***
“고속 슬라이더에요.”
“고속 슬라이더?”
“네, 슬라이더가 까다로워졌다는 말이 저거였네요. 각은 조금 작아서 어찌어찌 쳐내기는 했는데, 구속이 어지간한 투수들 속구보다 빨라요.”
규혁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설명 좀 듣고 고개 좀 끄덕였다고 펑펑 쳐낼 수 있었다면 백하민은 왕중왕전 최우수 투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딱!!
빗맞은 타구가 일루수의 미트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의 솔로 홈런 이후 삼자범퇴. 확실히 백하민도 난 놈은 난 놈이다.
가끔 인터넷 논쟁을 보면 홈런보다 나은 안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만루 상황에서 싹쓸이 홈런을 날리는 것보다 안타로 투수에게 계속 압박을 가하는 게 더 좋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투수를 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투수 멘탈에 제일 안 좋은 건 만루 상황이 아니라, 피홈런이다. 홈런을 한 방 맞으면 진짜 정신이 어질어질해진다.
헌데 지난 번 경기도 그렇고 오늘 경기도 그렇고 멘탈에 제법 타격을 입었을 텐데 그걸 수습해서 이닝을 마무리 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공을 잘 던지는 투수는 제법 된다. 멘탈이 좋은 투수도 드물지만 좀 있다. 하지만 공도 잘 던지는데 멘탈도 좋은 투수는 정말 보기 힘들다. 리그에 에이스라고 불릴만한 투수가 적은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백하민은 에이스의 자질이 충분하다. 프로에 가서 혹사로 어깨만 망가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훨씬 더 대단한 투수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텐데.
마운드에 멍게가 올라갔다.
저 인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그게 그러니까······.
***
“야, 안뱅, 그냥 가서 미안하다고 그래.”
“미안? 내가 미안할 게 뭐가 있는데.”
이진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가 있는지는 너 새끼가 더 잘 알겠지.”
“아, 됐고. 꺼져. 내가 뭐가 아쉬운게 있다고 최수원 그 새끼한테 사과를 하냐. 그리고 넌 그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면 기겁할거다.”
“네가 아쉬운 게 없긴 왜 없어. 지금 존나 아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티 팍팍 나는구만.”
최수원과 조규혁, 조유진 세 사람이 붙어 다닌 지도 약 10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최수원의 타격이 워낙 터무니없는 수준이라 잘 부각이 안 되기는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조규혁과 조유진의 타격 역시 꽤 빠르게 좋아졌다.
하지만 이진우와 안병영이 주목한 것은 그들의 타격이 아니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일과의 대부분을 타격 연습으로 보내고 있음에도 한층 더 빨라진 최수원의 구속이었다.
물론 후반기 리그이기에 실적을 채우기 위해 주로 출장한 것은 이진우였다. 그리고 중앙고는 최수원과 조규혁의 폭발적인 타격으로 거의 대부분 경기를 콜드 게임으로 끝냈기에 최수원의 피칭을 실전에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수원이 던지는 공의 위력이 더 강력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째서일까?
단순히 타고난 재능?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너무 하루아침에 구속이 빨라졌다. 결국 뭔가 요령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 요령을 알았다고 적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역시 재능의 영역이기는 하다. 하지만 물에 빠졌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올 해 드래프트까지 이제 몇 경기 남지 않은 상황.
안병영은 그 요령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러니까 걍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좀 알려달라고 그래. 어차피 규혁이나 그 조유진한테 하는 거 보니까 딱히 아끼는 거 없이 잘 알려주더만.”
“됐어. 그렇게 궁금하면 진우 네가 가서 물어보든지.”
“왜? 내가 가서 물어보고 너한테 알려달라고?”
“뭔 개소리야. 솔직히 지금 나보다 네가 더 급하니까 하는 이야기잖아.”
“나? 됐다. 됐어. 난 어차피 글렀어. 솔직히 수능으로 대학 갈 수 있었으면 진즉 야구 포기하고 수능 쳤을 거다. 그거 안되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건데, 대학 체육 관련 과로 가서 다른 거 할 거야. 솔직히 난 프로 할만한 재능은 아니잖아.”
진우의 말에 뭐라 반박하려던 안병영이 그의 초라한 미소 앞에서 말을 삼켰다.
재능.
그래, 그 저주받은 단어를 논하는 친구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사탕발림으로 위로한다고 해봤자 그것은 그저 공허한 거짓이 될 뿐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침묵뿐이다.
“그러니까 자존심 그만 세우고 가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 좀 알려달라고 해봐. 혹시 알아? 진짜 수원이처럼 구속이 막 7km/h쯤 빨라질지? 그러면 너도 139km/h 찍는 거잖아. 솔직히 그 정도면 살짝 반올림해서 140km/h 던진다고 해도 되는 수준인데 140km/h 던지는 안병영이면 드래프트 쌉가능이지.”
“아, 새끼 진짜······.”
140km/h
누군가에게는 그저 힘 빼고 던져도 나오는 속도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꿈의 구속이다.
만약 속구 구속이 그만큼만 나와준다면······. 물론 140을 던진다고 무조건 프로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로의 드래프트는 선수의 성장 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고3 말년에 구속이 갑자기 훅 올라간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위 순번으로 긁어볼 만한 팀은 나오지 않을까?
그리하여 내일 경기에 대비한 가벼운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안병영이 조용히 최수원에게 다가왔다.
“야, 최수원. 내가 지금까지 미안했다.”
갑작스러운 멍게의 사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훅 들어온 이해할 수 없는 사과에 최수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멍게 녀석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러 왔을 거라는 가능성 따위는 조금도 열어두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놈이라면 애당초 그 훌륭한 수비 앞에서 송구 똑바로 하라는 개소리를 지껄일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최수원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딱 하나였다.
“다시,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응? 뭐? 육하원칙?”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사과의 기본원칙이자 교양인의 상식이죠. 자, 그러면 선배. 알려드렸으니 다시 해보세요.”
요 몇 주 잠잠했던 탓에 잊고 있었다. 최수원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안병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