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변화(2)
“야, 수원아. 그런데 이렇게 막 돌리면 타율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냐?”
리그 시작까지 앞으로 이틀.
나의 어드바이스에 따라 폼을 미세하게 조정하던 규혁 선배가 의문을 표했다.
“선배, 연습 실컷 하시더니, 궁금해하는 타이밍이 좀 늦는 거 아닙니까?”
“아니, 아까 낮에 잠깐 진우가 도와 달라고 했거든. 그래서 그냥 타석에 서서 공을 보기만 했는데 좀 빠듯하더라고. 그러니까 만약에 떨어지는 공이거나 빠지는 변화구면 그대로 헛스윙 하게 되는 거잖아.”
“네, 아무래도 그렇죠.”
확실히 극단적인 당겨치기 풀스윙은 위력적인 변화구에 조금 약한 면이 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긍정하는 거 아니냐?”
“아니, 근데 선배, 애초에 그런 변화구는 대체 왜 칠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왜 칠 생각을 하냐니? 그거야······.”
“물론 투수가 던지는 공을 죄다 쳐낼 수 있는 타자? 좋죠. 근데 아시잖아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거.”
속구를 기다리던 타자가 체인지업을 두들긴다?
무슨 일본 야구 만화도 아니고, 절대 불가능하다. 물론 나도 얼마 전에 풍천고의 투수를 상대로는 한번 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거야 톱클래스 메이저리거가 고등학생을 상대로 했으니 가능한 이야기지, 나도 제대로 된 메이저리거 상대로는 무리다.
물론 옛날에 그렉 매덕스라는 전설적인 투수가 말하기를 토니 그윈이라는 할아버지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그게 됐다고 하는데 뭐,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 사람들 시대에는 그게 가능했을 수도 있긴 하다.
당시 리그 최고의 강속구 투수 중 하나였던 랜디 존슨의 최고 구속은 102마일에 시즌 평균 구속은 95~97마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2025년인 지금? 리그 전체의 평균 구속이 94.4마일이고 내가 메이저에 진출했던 2034시즌에는 리그 전체의 평균 구속이 무려 95.1마일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속구를 기다리던 타자가 체인지업을 두들긴다? 내가 장담하건대 토니 그윈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선배, 아시잖아요. 방망이를 공에 가져다 댄다고 다 안타가 되는 거 아닌 거.”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더더욱 서민우 코치님이 밀어치기 강조하시는 거잖아. 최대한 수비가 없는 쪽에 공을 보내야 하니까.”
“물론 그게 되는 사람이면 그거 하면 좋죠. 근데 몇 번이나 말씀드렸듯이 답은 하나가 아니에요. 홈런도 답이고 수비가 제대로 수비할 수 없을 만큼 더 쎄게 때리는 것도 답이죠. 결국 어느 게 더 나와 잘 맞는지를 찾는 게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선배는······.”
“확실히 오른쪽으로 보낸 타구들이 좀 힘이 없지. 내가 손목 근력 운동 하려고 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고.”
규혁 선배의 태도에 조금 갑갑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나는 선배가 밀어치기에 집착해봤자 결국 실패하는 걸 알고 있지만, 선배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니까.
“선배, 그리고 솔직히 톡 까놓고 말씀드려서 선배 일단은 프로에 가는 게 목표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그냥 변화구 좀 못 쳐도 상관없어요. 우리 권역에는 선배가 걱정하는 것만큼 변화구 던지는 투수가 없잖아요.”
“야, 없긴 왜 없어. 백하민 슬라이더도 그렇고 양민우랑 강세준도 커브를 얼마나 잘 던지는데.”
“네, 그렇게 딱 세 명 정도 있죠. 그러면 그 셋한테 떨공삼 좀 당한다고 치고 나머지 두들기면 되는 거잖아요. 어차피 투구수도 105개로 제한이라서 하루 종일 던질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 형들이라고 항상 변화구만 던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애당초 비슷한 수준의 투수가 작정하고 던진 좋은 공을 쳐 내는 타자는 드물다. 괜히 타자 성공의 기준을 3할로 잡는 게 아니다. 실투로 들어오는 공만 안 놓쳐도 적어도 좋은 타자 소리는 들을 수 있다.
“뭐······, 그건 그렇지.”
“자자, 그러면 이제 노가리 그만 까고, 얼른 훈련이나 하죠. 모레 시합이니까 오늘 빡세게 훈련하고 내일은 좀 쉬어야죠.”
***
교과교실제.
뭐, 좋은 제도다. 원래 한국의 높은 분들은 미국을 선망하기 마련이고, 미국에서 시행하는 교과교실제가 그분들 보시기에 참 좋으셨던 관계로 마련된 제도다.
물론 현실은 그런 것 없이 그냥 단순히 영어와 수학 우열반이지만.
아무튼 너무 당연하게도 나는 C클래스. 최하위반이었다. 뭐 평소에는 이 반, 저 반 나뉘어있던 우리 야구부 놈들 대부분이 여기서 얼굴을 마주친다. 근데 이 와중에 조유진은 교장 쌤의 훈화 말씀에서 배울 게 많다는 녀석답게 야구부에서 유일하게 A클래스란다.
아무튼 간 오늘 4교시는 수학 수준별 학습이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옆 교실로 이동해서 수업을 기다렸다.
“오래간만이네.”
“어?”
긴 생머리.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눈코입. 깨끗한 피부와 긴 팔다리의 늘씬한 몸.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뭐야, 기억 안 나? 작년에도 같이 수업 들었었잖아. 그때는 수학 말고 영어이긴 했지만.”
“아, 미안. 내가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들은 머리에서 조금 빨리 지우는 타입이라서.”
“뭐라는 거야.”
꺄르르 웃으며 팔을 툭툭 치는 꼴이 이건 누가 봐도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아마 진짜 열일곱 최수원이었다면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 몰랐겠지.
그나저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고등학교 시절의 나에게는 뭔가 달달한 일 따윈 조금도 없었다. 매일 집 학교 운동의 연속이었고 그건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그러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의 유명세 정도다.
물론 당시에도 드래프트 1라운더급 재능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래봐야 주변에 야구 아는 애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지는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공중파 TV 뉴스에 이름이 나오고 매일 같이 학교에 KBO의 스카우트들은 물론 외국인들까지 진을 칠 정도니 유명세의 수준이 다르다.
그래서 내 유명세를 보고 접근한 이 여자애가 불쾌하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이나 능력이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성을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지만 글쎄다. 내가 생각할 땐 애당초 유명세니 능력이니 재산이니 하는 것도 결국 나라는 사람의 일부다. 마치 지금 저 여자애의 예쁜 외모가 저 아이의 일부인 것처럼 말이다.
“3반에 박은진이야.”
잠깐만. 박은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아!!
“아이돌 연습생?”
“알고 있었네? 그런 거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친구가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어서. 그나저나 은진이 너도 C클래스였어? 처음 본 것 같은데?”
“학교에 몇 번 못 나오긴 했어. 최근에 회사 일 때문에 좀 바빠서. 그리고 너희 야구부는 보통 너희끼리만 모여 앉잖아.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도 모르는 애들 많을 것 같은데?”
“특색이 없는 애들이야 그렇지. 근데 너만큼 예쁜 애는 보통 기억하기 마련이잖아.”
“뭐야. 지금 나 꼬시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사실 적시?”
“아, 뭐래.”
평소였다면 이쪽으로 몰려와서 앉을 야구부 놈들이 어영부영 근처를 오가다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긴 제 놈들도 눈치가 있다면 이런 상황에 끼어드는 것은 힘들겠지.
박은진과의 대화는 제법 즐거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정도로 예쁜 여자가 대놓고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마다 빵빵 터지는데 고자가 아닌 이상에서야 좋을 수밖에 없다.
속닥속닥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수업 시간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수업 내용?
원래 수학은 태생부터가 수업을 듣나 안 듣나 똑같은 학문이다. 학문 자체가 태생부터 뭔가 좀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렇다.
***
고교야구 주말리그에서 후반기는 그 중요도가 매우 떨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직 전반기 주말리그 성적만으로 전, 후반기 왕중왕전의 진출을 모두 결정하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해보면 지극히 불합리적이다. 어차피 후반기 왕중왕전은 후반기 리그전이 끝난 이후 열린다. 헌데 후반기 왕중왕전의 시드가 후반기 주말리그의 권역 우승팀이 아닌 전반기 우승팀에게 주어지고, 심지어는 후반기 왕중왕전에서 권역우승을 해도 후반기 왕중왕전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입시 때문이야.”
“입시요?”
“응, 대학에 가려면 아무래도 일정 수준의 공식 대회 기록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전반기 후반기 모두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주요 선수들 위주로 경기가 진행될 수밖에 없으니까 전반기에 왕중왕전 몰아놓고, 하반기는 전반기에 안 썼던 선수들 위주로 좀 써가면서 쉬엄쉬엄해라. 뭐, 그런 뜻이지.”
“그러면 지금 이렇게 나와서 찍는 것도 좀 의미 없는 거 아닌가요?”
서울 쪽에 볼 경기도 많고, 할 일도 많다고 사람 좀 붙여달라고 했더니 고교야구 쪽으로는 완전히 초짜를 보낸 프런트의 처사에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하지만 김대리도 벌써 이 바닥 6년 차의 프로. 요즘 Z 세대들 조금만 수틀리면 퇴사하는데 이 맹해 보이는 녀석 정도 되는 놈도 사실 구하기 힘든 인력이다. 김 대리가 치솟는 분노를 잘 갈무리하고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답했다.
“기록은 남잖아. 홈런왕이니 방어율왕이니 MVP니 최우수 투수니 하는 그런 것들. 그래서 어정쩡한 애들 말고 드래프트 최상위 노리는 애들은 또 이 악물고 뛰거든.”
“아!! 그렇군요. 그러면 최수원 선수도?”
“어, 게다가 더 중요한 점은 왕중왕전 출전이 걸려 있던 전반기 리그에서는 팀에서도 이를 악물고 승리를 해야 하니까 최수원한테 계속 볼넷만 내줬지만, 후반기에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거지.”
신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기 최수원 선수 나오네요.”
프로필상 190에 몸무게는 85kg.
하지만 프로필이야 엄격하게 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내놓는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는 만큼 마냥 믿을 수는 없는 정보다.
최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반기 리그를 뛸 때만 하더라도 얼추 눈대중으로 봐도 키는 스파이크를 신지 않고 190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몸무게는 거기에 한참 미치지 못해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서 가볍게 헬멧을 두드리는 최수원의 몸은 프로필에 나온 그것보다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꿀꺽.
그리고 그것을 느낀 사람은 김대리 하나만이 아니었다.
묵직한 긴장감이 경기장을 침묵시켰다.
고작 고등학교 경기. 그것도 별반 중요하지도 않은 하반기 리그 경기라고는 믿기 힘든 팽팽한 긴장감과 기대감.
-딱!!!
그리고 타석에 선 최수원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감을 배신하지 않았다.
고교야구 후반기 주말리그.
중앙고 2학년 최수원 5경기 17타석 7타수 6안타(홈런 3개 2루타 1개) 9볼넷 1희플 0.857/0.938/2.286
최수원이 말 그대로 리그를 폭발시켰다.
***
“뭐? 시즌 OPS가 2.286이라고? 아무리 고등학생이라도 그렇지 그게 말이 돼?”
“아니······.”
“그지? 1.286을 잘못 말한 거지?”
“그게 아니라 OPS 말고 장타율이 2.286이라고.”
잠깐의 침묵
“야, 우리 팀 올해 꼴찌 가능하겠지?”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