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나는 늘 특별했다(3)
“오 마이 갓.”
보스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정확히 이틀. 벤자민은 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지?
Goldenlion Flag tournament
그가 설명을 듣기로는 황금사자기는 한국의 모든 고등학교 야구부를 11개 지역으로 나눠서 리그전을 벌이고 거기서 이긴 승리자들로 진짜 챔피언을 가리는 토너먼트라고 들었다.
게다가 참가팀의 숫자도 제법 많아서 거의 48개 고교가 참가한다고 들었으니 당연히 리그 4위까지 팀들을 모두 모으고 지구 1위 팀이나 전년도 우승팀 등에게 시드를 주는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아니, 왜 중앙고등학교가 토너먼트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거죠?”
“아, 벤자민. 그때 제가 한 번 설명했는데 제대로 안 들으셨나 보네요.”
호주 억양의 지독한 사투리.
“토너먼트 출전은 전반기 리그의 우승팀은 고정이고 그 외에는 각 지구의 2위 4위 6위 혹은 3위 5위 7위가 번갈아 가면서 출전합니다. 그러니까 중앙고는 이번에 지구 2위로 하반기 왕중왕전에 출전할 예정이네요.”
“······.”
망했다.
바로 이틀 전에 보스에게 왕중왕전에서 제대로 살펴보고 보고하겠다고 큰 소리 쳤건만······. 한국에 온 지 삼 주. 그리고 최수원의 경기를 본 것만 세 경기. 벤자민은 아직 최수원의 타격을 한 번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 했다.
***
내가 이 시대로 돌아온 지도 벌써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사이 본래의 역사와 비교했을 때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 변화의 첫 번째는 바로 경기의 결과였다.
본래 우리는 천남고와의 경기에서 승리하고 전반기 권역 1위를 차지한다. 덕분에 나는 전반기 왕중왕전과 하반기 왕중왕전에서 각각 일주일 동안 300개씩이나 공을 던지는 터무니 없는 일정을 보냈었다.
하지만 내가 돌아오고 있었던 천남고와의 첫 경기.
본래라면 내가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 멍게가 2이닝을 꾸역꾸역 막아내야 했던 그 경기에서 멍게 녀석은 거대한 방화를 저질렀고 결국 우리는 7회 콜드게임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덕분에 역사가 바뀌었다. 천남고는 전승으로 권역 1위. 우리는 5승 1패로 권역 2위. 그 결과 우리는 전반기 왕중왕전에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5월 말부터 6월 초.
통으로 3주.
길고 거대한 휴식일이 시작됐다.
물론 그 거대한 휴식일이 마치 프로에서 비시즌처럼 내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나날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등교했고 훈련을 받았으며 수업 시간에는 졸음과의 사투를 벌였고 수업이 끝나면 또 다시 훈련에 전념했다.
그래, 내가 꼽을 수 있는 두 번째 변화는 바로 나의 몸이었다.
이 시기로 돌아오기 이전.
만으로 35세가 됐던 나는 193.1cm에 120kg으로 지금의 이 멸치 같은 몸과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만큼 대단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전문가들이 근육 한올한올 섬세하게 관리한 것 같은 육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 시기의 나는 그런 몸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10년 전처럼 야구선수는 근력운동을 하면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투수의 근력운동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고, 덕분에 나는 굉장히 올드 스쿨한 느낌으로 런닝에 집중하는 그런 투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자자, 하나만 더 하자.”
-끄응.
회귀 이전 내가 고용한 피지컬 전문가들에게 지불하는 급료만 일 년에 오십만 달러에 육박했다. 연평균 3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의 위용이었다.
그리고 그에 비하자면 지금 내 옆에 붙어서 나를 독려하는 규혁 선배는 아마추어 그 자체다. 기본적으로 운동의 종류도 좀 구식이었고, 트레이닝에 관련된 지식도 보디빌딩 쪽 지식인지라 야구선수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상당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그 전문가들에 비교해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귀신 같은 부분이 있었다.
“자자, 끝!! 여기까지.”
그건 바로 나의 한계점을 정말 미친 듯이 정확하게 짚어낸다는 점이었다. 몸이 망가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고생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신에서 말 그대로 땀이 비 오듯이 후두둑 쏟아졌다.
게다가 규혁 선배와 함께 운동을 해서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운동을 하는 이곳이 바로 야구부가 사용하는 체력단련실이라는 점에서 기인했다.
어딜 가나 그렇겠지만 원래 이런 시설들은 짬밥순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게 참,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 무슨 개똥 같은 악폐습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단순히 우리 중앙고만 그런 게 아니다. 프로를 가더라도, 심지어 메이저를 가더라도 이건 똑같다. 단지 시설이 조금 더 풍족해지기에 경쟁이 덜해질 뿐, 메이저도 마사지 먼저 받는 건 베테랑이고, 훈련 천천히 나와도 되는 건 베테랑이고, 심지어 비행기 좌석에 입지 좋은 라커룸 자리까지 베테랑 우선으로 배정된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른 직군이라고 뭐가 다를까. 내 전처 말로는 연예계는 우리보다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다고 그랬고 샐러리맨들 역시 연차가 차면 대우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조금 차이가 있다면 메이저는 그래도 ‘실력’이 되면 짬밥을 어느 정도 무시한 대우를 받기 마련인데 KBO는 그게 좀 덜하고, 고등학교는 그게 매우, 매우, 매우 덜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규혁 선배와 함께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규혁 선배는 3학년에다가 팀의 4번 타자였고 몸만 봐도 알다시피 체력단련실의 터주대감이었다. 그런 규혁 선배가 운동 파트너로 나를 콕 짚었는데 대체 누가 거기에 토를 달 수 있을까.
“근데 수원아 너 조금 커진 것 같다?”
“그래요? 키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아니, 키 말고. 허벅지. 살이 조금 붙은건가?”
“아, 그거라면 선배 조언대로 도시락 3개 싸가지고 다녀서 그런가 2kg정도 쪘더라고요.”
미친 듯한 운동량.
하루에 쓰는 칼로리가 못해도 3~4천Kcal는 될 거다. 보통 일반인의 2배 가까운 소비량이다. 그런 상황에서 몸무게를 증량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그래? 아직 2kg밖에 안 쪘어?”
하지만 아무래도 이 179cm에 101kg이나 나가는 괴물에게는 이것도 고작인 듯싶다.
아무튼 간 나는 하루하루 땀방울, 아니 땀으로 된 폭포를 질질 흘려가며 차근차근 몸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딱!!
시원한 타구가 운동장의 그물망을 출렁이게 만들었다.
단순한 티배팅이 아니었다. 투수들을 대상으로 한 라이브 배팅.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던 조유진이 속삭였다.
“야, 애들 기 그만 죽이고 좀 살살 해줘.”
“이 정도로 기죽을 거면 투수하면 안 되지. 저기 멍게······, 아니 병영 선배 좀 봐라.”
“아니, 그 양반은······. 에휴. 아무튼 좀 적당히 해줘라. 찬혁이 쟤 울겠다.”
투수 한 명당 4명씩 타자를 상대했는데 확실히 멍게 녀석이 다른 투수에 비해서 괜찮기는 괜찮았다. 물론 단순히 공만 따지자면 지금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 이찬혁쪽이 훨씬 나았다. 최고 138까지 나오는 속구는 고교레벨에서는 충분히 강속구라고 부를 만했고 슬라이더도 그럭저럭 존을 빠져나가는 것이 유인구로 쓸만했으니까.
하지만 초구를 강타당해서 펜스 직격타가 하나 나온 직후의 반응을 보자면 둘의 차이는 확연했다. 자신감을 잃고 도망가는 피칭을 반복하는 이찬혁과 그래도 꿋꿋하게 이를 드러내는 멍게 놈. 복권 1등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복권을 사야 하는 것처럼 야구 역시 일단은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투수 여섯 명의 세션이 모두 끝났다.
하지만 팀에는 아직 한 명의 투수가 남아 있었다.
바로 나다.
헬멧과 배트를 내려놓고 야구모자와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이미 몸은 충분히 풀어둔 상황.
그대로 연습용 마운드 위로 올라갔다.
이 시대로 돌아오기 전, 나는 193.1cm에 120kg에 달하는 괴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NFL의 라인백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몸뚱이였다.
189cm에 84kg의 비실한 몸뚱이에도 그 괴물 같은 몸뚱이에 못지않은 장점이 존재했으니, 바로 이 몸이 고작 열여덟 살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훨씬 유연했으며 회복 속도도 서른다섯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성장’의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운드에서 가볍게 공을 뿌렸다.
-뻥!!
어깨의 회전이 부드러웠다. 무게 중심의 이동이 자연스러웠고 마지막 공을 채는 손끝에 힘이 있었다.
나는 내가 타격에 집중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한계점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야구의 역사에 도전할 수 있을 만한 타격 포텐셜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피칭에 집중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한계점이 어디인지는 아직 몰랐다.
-뻥!!
근 두 달간의 빡센 운동 덕분일까? 허벅지가 훨씬 단단하게 느껴졌으며 그것을 받쳐주는 허리에 파탄이 없었다. 이거라면 스트라이드를 조금 더 넓히고 조금 더 강하게 공을 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웅!!!!
나 자신에게 너무 오롯하게 집중한 탓일까? 타석에 선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이게 라이브 피칭이었다는 것을.
삼구 삼진.
공을 받은 조유진 녀석이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타석에 규혁 선배가 들어왔다.
다시 말하지만 실로 우람한 체구다.
-부웅!!
그리고 그 우람한 체구에서 나오는 배트 스피드 하나는 기가 막힌다. 저러니까 먹힌 타구로도 담장까지 공을 날리는 거겠지.
일단 노려야 하는 것은 스트라이크존.
오늘 컨디션을 보니까 그래도 스트라이크존을 노리고 던지면 어지간하면 스트라이크존에 다 꽂히기는 했다.
-뻥!!
조유진이 가볍게 나의 공을 받아냈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 내가 매일 타격 못 한다고 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포구만 보더라도 프로에 갈만한 재능은 재능이다.
지금 스피드건으로 재고 있는 건 아니라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체감구속이 150은 되는 것 같은데, 나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이 공을 정말 안정적으로 잡아낸다.
내가 던진 공을 포수가 절대 흘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이 믿음. 투수에게 이만큼 든든한 것이 또 있을까.
두 번째.
-따악!!
규혁 선배의 방망이가 내 공을 두들겼다.
물론 제대로 쳐낸 타구는 아니었다. 명백하게 방망이가 늦었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힘 덕분인지 타구가 1루 쪽 파울라인 너머 그물망까지 날아간다.
규혁 선배가 아쉬운 표정으로 타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세 번째.
감독님이 나의 어깨를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애지중지 해주신 덕분에 다른 투수들과 달리 오늘 내가 상대하기로 한 타자는 딱 두 명.
지금 타석에 선 규혁 선배가 마지막이었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던진 공만 하더라도 매우 좋았다.
하지만 시험해보고 싶은 공이 하나 있었다.
투구판을 밟지 않은 발을 뒤로 살짝 물리고 양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뒤로 물렸던 발을 크게 들어 올리며 마치 활을 당기는 것처럼 내 몸을 크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약간의 변화를 줬다.
아마 우리 투수 코치가 눈썰미가 있었다면 여기서 나의 피칭이 조금 달라졌음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투수 코치에게는 그만한 눈썰미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리를 끌어올린 최대점에서 잠깐의 멈춤도 없이 몸을 앞으로 과감하게 전진시켰다.
나는 원래 여기서 잠깐의 정지를 해야 한다고 배워왔었다. 하지만 메이저에서 100마일짜리 공을 던지던 투수 놈들의 이론은 조금 달랐다. 물론 이것 말고도 다른 점이 참 많았지만, 당장 내가 안전하게 해볼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다.
한 톨의 에너지 낭비도 없는 과감한 스트라이드.
거의 동시에 글러브에 담아뒀던 손을 뽑아 머리 뒤로 힘차게 들어올렸다.
전진으로 만들어진 막대한 힘이 상체의 회전을 거쳐 팔까지 전달된다.
그리고 마치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은 감각으로 공을 움켜쥔 나의 오른팔이 대기를 갈랐다. 평소와는 감각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그 다른 감각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평소에 공을 놓던 바로 그 위치에서 정확하게 공을 뿌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물론 현실에서는 내가 공을 던진 것 정도로 이런 대포음이 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내가 느낀 감각이 그러했다. 그래, 지금까지 던진 공이 소총이었다면 이건 대포다.
-뻐엉!!!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포구음이 울렸다.
당연히 규혁 선배는 감히 이 공을 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니, 아마 배리 본즈라도 이 공은 절대 치지 못했을 것이다.
“야······, 최수원.”
“죄송합니다!!”
자기 머리로 날아오는 공을 쳐 낼 수 있는 타자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내가 규혁 선배에게 빠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거 아무래도 제구를 잡으려면 연습을 조금 더 하는 정도로는 안 될 것 같다.
***
김 대리는 오늘도 중앙고의 연습을 찾아왔다.
물론 드래프트라는 것은 이번 시즌 팀의 순위에 따라 결정이 나는 것이고, 지금 최수원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라면 어지간하면 내년 전체 1번은 따놓은 당상이라지만, 그래도 그와의 관계를 만드는 것에 소홀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드래프트 순번은 팀의 성적에 따라 결정이 나지만, 드래프트 참가를 결정하는 것은 최수원이기 때문이었다.
‘저 새끼 또 왔네······.’
최근 경기.
꾸준하게 보이는 갈색 머리의 외국인.
그리고 누가 봐도 NPB 쪽에서 온 것 같은 외국인까지.
오늘도 최수원은 잘 쳤다.
비록 투수의 수준이 매우 낮았기에 진짜 프로를 만나면 어떻게 될지는 매우 궁금했지만 어쨌거나 매우 잘 쳤다.
그리고······.
-쾅!!!
아, 물론 현실에서 이런 대포음이 터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 대리는 보았다.
“미친······.”
156km/h.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시즌은 구단의 미래를 위해서 대승적으로 꼴찌를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