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깰 수 있을 때 깨는 게 좋다(2)
이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야구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경기다.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현대적인 야구의 틀이라고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만들어진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약 180년. 완벽하게 현대 야구라고 볼 수 있는 라이브볼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전통과 불문율’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기록을 고의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다.
예컨대 투수가 노히트 혹은 퍼펙트 게임과 같은 기록을 작성 중이라면 번트와 같은 방법으로 그 기록을 깨트리는 것은 해서는 안될 짓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타자가 연속안타나 홈런 뭐 기타 등등의 타이틀이 걸린 상황에서는 고의 볼넷을 주면 안 된다.
물론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규칙이 아닌 불문율에 불과하다. 어긴다고 해도 특별히 제재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또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그러니까 때는 바야흐로 2039년. 쌀쌀한 바람이 부는 10월 2일이었다. 당시 나는 메이저 역대 최다 홈런인······(중략)······. 그 결과 녀석은 자기 홈팀에서까지 오지게 욕을 먹었고, 다음 시즌인 2040년부터는 우리 홈에 올 때마다 야유 세례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나중에는 나한테 따로 사과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문의 공개 사과까지 띄우고 내가 그걸 받아주는 퍼포먼스까지 했음에도 여전히 홈팀의 팬들은 녀석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녀석도 참 불쌍하긴 했다. 어차피 덕아웃에서 나온 지시를 그냥 실행한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렇듯 불문율이란 꼭 지키지는 않아도 괜찮지만, 그 여파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뭐 그런 성질의 규칙이다.
물론 이것 역시도 리그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진짜로 200년쯤 역사가 있는 꼰대의 리그, MLB에서는 이 불문율에 매우 더 민감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KBO의 경우는 그래도 승부처에서는 굳이 그걸 지킬 필요 있나? 하는 의견이 많긴 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굳이 이렇게 구구절절 야구의 불문율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 풍천고의 선택 때문이었다.
-뻐엉!!
슬쩍 빗나가는 공을 포수가 한 걸음 옆으로 빠져나와 잡았다.
2-0.
마운드에 선 풍천고 투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뭐. 투구수가 지금까지 89개 정도? 슬슬 지칠 때도 됐다. 하지만 저 표정은 단순히 체력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우우우우우
관중들의 야유가 들려온다.
총 관중이 삼백 명 남짓하다는 것과 그 가운데 일정 숫자가 풍천고 선수들의 지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법 큰 야유다.
이거 어쩌면 저 투수에게는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해야 고등학생이다. 수백 명의 사람이 자신을 야유하는 경험은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힘들다. 그러니 부디 저 풍천고의 선발 투수도 멍게 놈과 같은 단단한 정신의 소유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현재 점수는 4:2
노아웃에 주자 1, 3루.
홈런까지도 필요 없다. 장타 하나면 그대로 동점인 상황이다. 풍천고 감독의 선택은 분명 합리적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까지 5연타석 홈런을 기록 중인 타자 아닌가.
투수가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프로에서는 이제 콜드 고의사구가 생겨 별 의미 없는 룰이기는 하지만, 야구의 룰 가운데 가장 복잡한 규정인 보크에는 투구가 공을 던지기 전에 포수가 캐쳐박스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통상적으로 고교야구의 경우 이런 것에 조금 더 깐깐한 편인데 물론 그것도 구심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은 주자 1,3루인 상황. 풍천고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고 덕분에 포수는 일단 투수가 공을 던질 때 까지는 캐쳐 박스 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관객들의 야유가 부담이 됐기 때문일까?
혹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단순한 실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명백하게 빠지는 공이었다.
하지만 앞선 두 개의 공처럼 절대 방망이가 닿지 않는 범위가 아닌 그래도 한번 쳐볼 만한데? 싶은 그런 범위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기회라고. 아마 내가 지금 여기서 방망이를 내민다면 이 뒤로는 공이 빠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더 멀찍한 곳까지 공을 던지겠지.
그러나 지금 투수가 고의사구로 나를 경원하려는 판국에 이걸 굳이 무리해서 건드렸다가 선행 주자들을 다 죽이는 범타라도 나온다면? 아마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 그런 걱정 때문에 쉽게 방망이를 휘두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그런 걱정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2031년에 내가 KBO 단일 시즌 최다 홈런에 도전할 당시.
기존 기록을 가지고 있던 상대팀의 감독님이 언론사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수원이의 홈런 신기록 도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하하, 그거라면 예전에 제가 다른 후배한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깰 수 있을 때 깨는 게 좋다.’ 뭐, 이거라면 답변이 된 것 같군요.”
자신의 기록에 도전하는 후배에게 해줄 수 있는 덕담으로는 정말 최고의 덕담이 아니었을까? 당시 난 그 감독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전까지의 타격 폼으로는 무리였다.
왼쪽 다리를 살짝 들었다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다리를 스윙축으로 삼아 극단적으로 무게를 싣는다.
거친 회전.
한순간 발목과 다리 무릎이 욱씬하게 아려왔다.
회귀 직전, 지금의 완성된 타격폼을 갖기 이전에 사용하던 타격폼이었다. 부상 위험도 크고 컨텍률도 떨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파워만큼은 예술이다.
그렇게 상당히 빠지는 공을 내가 강하게 후려갈겼다.
-딱!!
무슨 공이 쪼개지는 것 같은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물론 정확한 스윗스팟은 아니었다. 보통 방망이의 스윗스팟존을 배트 끝에서 15센티 정도 아래라고 볼 때 방금 공은 거기서 한 2, 3센티 정도는 벗어났다.
뒷발이 살짝 지면에서 떠오르며 몸이 흔들렸다. 하지만 마지막 팔로스윙이 끝나는 순간까지 방망이를 꼭 쥔 두 손은 놓지 않았다.
마운드의 투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등을 돌려 저 멀리 날아가는 공을 바라봤다.
“미친······.”
포수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흘러나왔다.
방망이를 가볍게 던지고 조깅하듯 일루를 향해 달렸다. 으······, 왼쪽 다리에 살짝 통증이 느껴진다. 뭐 크게 다치거나 상처난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한순간에 너무 큰 힘을 싣는 바람에 약간 무리가 온 정도인 듯싶다. 이 정도야 보통의 야구 선수라면 시즌 내내 달고 다니는 수준의 통증이다.
그렇게 멀리 날아간 타구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위치, 목동 펜스 너머의 그물망을 때렸다. 살짝 아쉬웠다. 조금만 더 잘 맞았으면 장외도 가능했을 것을. 뭐, 외야 1층을 맞추건 3층을 맞추건 장외로 넘어가건 다 똑같은 홈런이긴 하다지만, 그래도 느낌이라는 게 다르다.
6타석 연속 홈런. 지금까지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그라운드만 돌던 내가 오른팔을 힘껏 들어올렸다. 그 가벼운 퍼포먼스에 관중석이 또 한 번 끓어올랐다.
물론 그래봐야 고작 300명이었지만······.
***
“C발, 돌았네······. 완전 미친놈이네. 저거.”
김 대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흘러나왔다.
학창시절이라면 또 모를까. 성숙한 사회인이 된 이후로는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비속어였다. 하지만 방금 그 장면은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남중 남고 공대로 대표되는 모태솔로 테크 트리를 탄 이 남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 육두문자는 그야말로 최상의 감탄사 그 자체였다.
아니, 고의사구를 하던 중에 바깥으로 빠지는 공을 잡아 당겨서 홈런을 만든다고? 이게 고등학생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아니, 지금 이건 고등학생이고 자시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다. 프로 선수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까?
작년에 21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팀내 최다 홈런 타자인 노형욱?
김 대리가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 노형욱이 저 자리에 있었다고 상상 해봐도 도저히 방금과 같은 공을 홈런으로 만드는 이미지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년 37개의 홈런으로 리그 홈런왕에 올랐던 돌핀스의 백강호? 이번 시즌을 끝으로 포스팅으로 미국에 간다는 소문이 자자한 그 녀석이라면······.
어렵다······.
김대리가 상상의 폭을 넓혀보았다.
비록 지금은 전성기가 지났지만, 홈런왕 하면 떠오르는 돌핀스 박주원의 전성기라면 또 어떨까? 그는 오늘 최수원이 깨버린 20년 전 고교 4연타석 홈런 기록의 주인공이자 전성기 시절 말 그대로 KBO를 파괴했던 남자다. 비록 메이저에서는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김대리가 직접 본 타자 가운데 가장 파괴력 있는 사내였다.
‘그래······, 전성기 박주원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가 흠칫 놀랐다.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고등학생이 타격하는 걸 보고 프로, 그것도 그냥 프로도 아닌 2010년대 KBO 최고의 강타자를 떠올린다고?
“아······, 미치겠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박주원까지는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지금 최수원의 홈런을 본 스카우트라면 누구나 방금 저 플레이가 얼마만큼 미친 플레이인지를 알 수밖에 없었다.
‘올해 우리 성적이 그러니까 지금 7위였지? 그러면 이렇게 어정쩡 하게 가을야구도 못 할 바에 차라리 꼴찌를······.’
자신도 모르게 든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최수원이 탐나도 그렇지 팀이 꼴찌 하기를 바라다니.
하지만 그는 몰랐다. 오늘 그에게 놀랄 일이 더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
결국 안병영은 6회 초를 감당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노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투구수 105개. 중앙고의 투수들이 안병영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왔다.
‘아······.’
그리고 박은진은 알게 됐다.
얼굴에 여드름 빡빡 난 저 투수가 중앙고에서는 그나마 사람이었다는 것을.
7회 초까지 고작 2이닝 동안 세 명의 투수가 무려 6실점.
중앙고를 응원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속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풍천고 역시 마찬가지로 오늘 에이스로 내민 이경석이라는 투수 외에는 딱히 사람이 없다는 점 정도였다.
현재 점수는 11:10
고작 2이닝 동안 각자가 6점씩이나 낸 셈이다.
점수만 보면 엄청난 난타전 같았지만, 사실 그보다는 볼질과 에러의 대환장 콜라보레이션이었다고 봐야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박은진의 혈압을 더 크게 올렸던 것은 이미 5회에서 수원이에게 고의사구를 실패했던 풍천고가 7회에 또 고의사구를 시전해서 기어코 연타석 홈런 기록을 끊어 놨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경기가 이어졌다.
“어? 은진아. 저거 뭐야?”
지금까지 옆에 앉은 야알못 친구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질문에는 차마 뭐라고 답을 할 수 없었다.
8회 초.
마운드에 최수원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