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깰 수 있을 때 깨는 게 좋다(1)
이지연 기자가 빠르게 기사를 작성했다.
이전에 송고했던 기사는 요즘과 같이 고교 야구의 투고타저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4연타석 홈런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프로야구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덤으로 20년 전에 이미 4연타석 홈런 기록을 세웠던 그가 KBO에 얼마나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지를 살짝 끼얹었는데 그 모든 것은 결국 야구팬이 인터넷 기사를 눌러보려면 KBO의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사에는 최수원이 또 한 번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종전의 기록을 깨트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멍청하기는. 대체 왜 생각을 못 했던 거야.’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앞에 뒀을 때 도전의 성공 실패가 아닌, 그 너머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최수원의 4연타석 홈런은 바로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물론 1회 초, 그것에 성공했을 때 5연타석 홈런의 가능성도 잠깐 스치기는 했지만, 미리 작성해둔 원고는 4연타석 홈런에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두 가지 경우에 관한 원고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지선다 앞에서 세 번째 선택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미 최수원이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종전의 기록을 경신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기록이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제목을 두고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엔터키를 두들겼다.
[한국 프로 야구 42년 역사를 갈아치울 최고의 슬러거가 온다!!]
괜찮을까?
너무 도발적인 제목은 아닐까?
이제 막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수준의 과한 기대감과 어그로가 쏠리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악플에 망가진 사람을 직접 본 이라면 절대 그 말에 동의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저만한 실력이라면······.
홈런 신기록을 달성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라운드를 돌던 최수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 저만한 실력이라면 이 정도 관심은 오히려 약이 될 것이 분명하리라.
-딸칵
송고가 완료됐다.
***
예전에도 한 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타자에게 루틴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2033년 늦겨울의 이야기를 굳이 다시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니 잠깐 다시 이야기하고 넘어가자면······(중략)······해서 마침내 나는 지명타자로써 수비에 나가지 않고도 나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당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오늘 이렇게 연달아 홈런을 때리는 건 불가능했을······ 리는 없겠다. 사실 아무리 내가 컨디션이 난조라고 해도 도저히 고등학생을 상대로 고전하는 건 상상이 되지 않으니까.
뭐, 당연한 일이다. 당장 여기 애들 아무나 붙잡고 리틀 야구 뛰는 애들이랑 야구 하라고 하면 어떤 성적이 나올까?
어지간하면 죄다 배리 본즈의 강림이다. 물론 그게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 시절일지, 아니면 약마 시절일지는 개인의 기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평균적인 고교 야구의 수준과 내 실력 사이에는 그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지금 저기 관객석만 봐도 알 수 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죄다 1루 쪽으로 치우쳐있다. 왜 1루 쪽이냐고? 그야 오늘 우리 중앙고가 원정팀이고 따라서 우리 덕아웃이 3루에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경기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잘생겼다. 이왕 찍힐 거라면 잘생기게 찍히는 게 좋다. 아, 혹시 왕자병이냐고?
그럴 리가. 이게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다.
야구에는 5툴 플레이어라는 게 있다.
야수에게 꼭 필요한 다섯 가지 툴을 두루 갖춘 선수를 말하는 것인데 빠른 타구 속도, 공을 멀리 날리는 능력, 효율적인 수비, 빠른 송구, 뛰어난 주루 능력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누구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야수에게 정말 중요한 여섯 번째 툴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잘생긴 얼굴이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애초에 프로 야구, 아니 프로 스포츠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돈을 내는 관중이 필요하다. KBO의 경우 여러 가지 기형적인 형태로 인하여 그것이 조금 덜한 부분이 있지만, MLB는 완전하게 자본주의 그 자체다.
애당초 구단이 우승을 하려는 것은 그것이 팬을 끌어모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많은 팬은 곧 많은 수익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각 팀들은 우승을 위해 필요한 선수를 매우 ‘효율적’으로 끌어모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승과 논외로 팬들을 끌어모을 방법이 있다면? 혹은 구단의 이익을 증대시킬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구단은 기꺼이 거기에 그만한 돈을 투자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확실한 게 바로 선수의 ‘외모’다.
당장 유니폼 판매량만 보더라도 그냥 야구 잘하는 선수랑 야구 잘하는데 생긴 것도 잘생긴 선수의 판매량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찍히는 사진들은 훗날 내가 더 큰물에서 놀게 됐을 때, 과거 사진이라면 여기저기 돌아다닐 사진들이다.
미리미리 관리해둬서 나쁠 것 하나 없다.
그렇게 내가 열심히 사진에 피사체가 되는 와중에도 마운드의 멍게는 고군분투를 했다.
이제 겨우 5월 초. 아직 저녁에는 조금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울퉁불퉁한 여드름 사이로 땀방울이 줄줄 흐르는 모양새가 거의 뭐, 한여름 장마 직후 계곡의 물살처럼 거칠었다.
노아웃 주자 1, 3루.
3번 타순부터 시작된 타자들이 슬슬 멍게의 공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고교야구는 그 특성상 선수 간의 실력 차가 클 수밖에 없고 풍천고등학교가 비록 명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클린업 트리오 정도 되면 제법 야구 좀 하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라면 세 번째 타석쯤 되면 멍게 정도는 충분히 공략한다.
뭐, 멍게 녀석이야 최근 매일 내 뒤를 이어서 5회나 6회 즈음 등판하고 기껏해야 2~3이닝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갔으니 평자책으로 따지면 자기나 나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애당초 타자가 같은 투수를 두 번 보느냐, 세 번 보느냐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가끔 변태 같은 투수 놈이 있어서 오히려 세 번째 타순에서 피안타율이 더 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투수는 진짜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다.
물론 멍게도 어떤 의미에서는 극소수에 속하는 변태 같은 놈이었지만 아쉽게도 그 의미가 앞선 경우와 달리 굉장히 부정적인 쪽이라 너무나도 당연하게 세 번째 타순부터는 저렇게 감당이 안 된다.
타석에 풍천고의 5번 타자가 들어왔다.
거대했다.
물론 우리 규혁 선배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체구가 무시할만한 체구가 아니다.
조유진이 마운드로 올라가서 미트로 얼굴을 가리고 멍게에게 뭐라뭐라 떠들었다.
뭐, 뻔하다.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니 1점 준다는 편한 마음으로 병살로 처리하고 이닝 잘 마무리하자는 소리? 아니면 여기선 볼넷을 줘도 좋으니 까다롭게 승부 하자는 말 정도겠지.
쯧, 멍청한 놈 같으니.
저 녀석은 아직 심연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이스 캐치 대신 송구 똑바로 하라고 을러대는 미친놈을 상대로 정상적인 격려가 먹힐 리가 만무하다.
“@!#$%!#@$%[email protected]!!!”
역시나.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개 짖는 소리? 혹은 돼지 멱따는 소리 비슷한 뭔가가 멍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유진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그래, 유진아. 이건 네가 잘못한 게 분명하다. 애초에 대화를 하려면 사람 새끼랑 대화를 시도해야지 어찌 사람이 멍게와 말을 섞으려 했단 말이더냐.
“끄응······.”
감독님의 얼굴이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나를 힐끔 한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 누가 봐도 ‘아 저 새끼 마운드에 올리면 딱 좋겠는데. 하필 홈런 신기록을 도전 중이네? 이거 마운드에 올릴 놈은 없고. 미치겠다.’라는 얼굴이다.
멍게 놈이 공을 뿌렸다.
승부가 이어진다.
볼, 볼, 파울, 볼, 파울, 파울.
그리하여 볼카운트는 3-2 풀카운트.
그래도 멍게 주제에 제법 까다로운 공들만 연달아 던져댔다.
이대로라면 볼넷으로 무사 만루인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아랫입술을 꽉 깨문 멍게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느낌이 왔다.
이 새끼. 이거 존에 공 하나 집어넣을 생각이다.
살짝 높은 코스.
차라리 커브라서 원바운드를 시켰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멍게 자식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원바운드되는 공을 매우 높은 확률로 블로킹해내는 조유진의 솜씨가 있었기 때문이니까.
풍천고 5번 타자.
근육덩어리의 방망이가 크게 돌아갔다.
-딱!!
시원하다.
확실히 힘이 좋다. 두둥실 뜬 공이 저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발사각이 영 나빴다. 저건 거의 40도에 가깝다. 물론 힘이 좋으니 멀리 날아가긴 했다. 하지만 저래서야 담장을 넘기는 건 무리다. 게다가 다행이랄까? 애당초 힘이 쎈 타자의 타석이었으니 당연했지만, 우리 외야수들의 위치가 나쁘지 않았다.
1루와 3루 주자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뜬공의 경우 야수가 그 공을 바운드 없이 잡아내면 그대로 아웃이 된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주자가 본래 자신이 있던 베이스로 돌아와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데 만약 주자가 자신이 점유하던 베이스로 돌아오기 전에 공이 먼저 도착한다면 그것 역시 아웃이 된다.
그렇기에 플라이볼 상황에서는 주자들은 자신의 베이스에 서 있는다. 그리고 저렇게 야수가 공을 잡는 그 순간!!
1루와 3루의 주자들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좌익수가 빠르게 2루에 송구했지만 늦다. 주자가 그리 빠른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 좌익수의 어깨는 그것보다 조금 더 안 좋았던 탓이다.
그리고 멍게 녀석은 비록 자기가 그 자리에 가도 레이저 송구는 하지 못하겠지만, 눈으로는 레이저를 날리는 재주가 있음을 마운드 위에서 증명했다.
좌익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쯧.
어쨌거나 원아웃에 주자 2루.
점수는 2:2
아, 근데 잠깐만······.
생각해보니 우리는 2점이 홈런 2방인데 저쪽은 희생플라이로만 2점이네? 음, 그렇다면 멍게가 무슨 생각을 할지 뻔하다.
‘빌어먹을 무능한 야수 놈들!!’
뭐 야수나 탓하면서 머릿속으로 FIP을 열심히 떠들고 있겠지.
결국 FIP은 삼진과 피홈런 그리고 볼넷만을 가지고 투수를 판단하는 지표고 그에 따르자면 적어도 오늘 경기는 풍천고의 투수보다 멍게가 유능하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점수는 역시 피홈런에 있으니까.
아무튼간 이것이 바로 내가 책상물림들이 만든 지표를 싫어하는 이유다.
***
“아!!!”
그것은 참으로 많은 것이 담긴 감탄사였다.
속으로는 오만가지 욕들이 터져 나왔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함께 하고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아이돌을 지망하는 연습생이었으니까.
아니, 대체 왜 그녀가 응원하는 팀들은 하나 같이······.
차라리 집이었다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하면서 볼 수 있었을 것을.
현재 점수는 4:2
5회 초에도 중앙고는 점수를 추가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투수가 5회 말에는 추가 실점을 하지 않았다는 점 정도다.
“차라리 수원이가 공을 던지는 게······.”
“응? 최수원이 공을 던진다고? 쟤는 타자 아니야?”
“원래 투수야. 그것도 팀에서 제일 잘 던지는 투수.”
“근데 그러면 오늘은 왜 안 던지는 거야?”
어설프게 야구를 알던 남자아이는 1회가 끝난 직후 자기 친구들 곁으로 사라졌고 그 아이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야구를 전혀 모르는 여자아이가 그녀 곁에 앉았다.
“글쎄······. 아무래도 기록이 걸렸으니까 타격에 집중하게 해주려는 것 같기는 한데······.”
-딱!!
내야수의 키를 간신히 넘기는 안타.
그리고 중앙고의 박감독이 오늘 영 좋지 못한 9번을 대신하여 대타를 내보냈다.
그녀가 생각할 때는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지금 중앙고는 유일하게 사람같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최수원 앞에 최대한 밥상을 차려두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딱!!
그리고 박감독의 전술인 매우 신기할 정도라 잘 들어맞아 깔끔한 우전 안타.
순식간에 주자 1, 3루.
“됐어!!”
타석에 오늘 2타석 2타수 2홈런을 기록 중인 최수원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