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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7화 (17/305)

17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5)

사람이 너무 놀라면 순간 말을 잃어버린다고 하던가?

조유진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최수원이 살짝 몰린 속구를 때리는 그 순간 중앙고의 덕아웃은 얼어붙었다.

시원하게 방망이를 돌리고는 등 뒤로 배트를 툭 떨어트렸다. 그리고 아주 잠시 타구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루를 향해서 조깅하듯 가볍게 달렸다.

최수원의 그 연결 동작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개멋지네 진짜.’

그렇기에 빠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타구를 감상하는 것은 투수를 도발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점이라든지, 지금 마운드에 선 풍천고 투수인 이경석은 3학년이고 방망이를 휘두른 최수원은 2학년이라는 점이라든지. 심지어 한국 야구. 특히 아마 야구에서는 타구를 감상할 시간에 0.1초라도 빨리 주루 플레이를 하라고 강조한다는 점 따위는 전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조유진은 3루를 밟고 돌아오는 최수원을 향해 이번에도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와,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홈런을 다섯 개를 연속으로 쳐? 돌았네. 돌았어.”

솔직히 말해서 홈런 두 개 쳤을 때는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그랬다. 근데 뭐랄까? 게임도 한 골드 등급 정도 되면 부럽지만, 아예 그랜드 마스터나 챌린저급 정도 되면 이제 그저 부럽기보다는 압도가 된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이제는 부럽다기보다는 그저 경외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좀 걱정이 됐었다.

아무리 병영 선배의 지랄이 좀 심하다 할지라도, 수원이의 언행은 분명 도를 넘어선 것이었으니까.

정말 야구를 그만둘 각오까지 하고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150을 던지는 투수는 귀하지만 그렇다고 프로에 가면 무조건 성공할까는 장담할 수 없다. 강속구가 재능인 것처럼 제구 역시 재능의 영역이고, 수원이의 제구는 분명 상당히 부족했다.

어디 그뿐일까. 투수의 어깨는 분필이다. 결국 쓰다 보면 닳기 마련이고 그 내구가 얼만큼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무엇보다 최 수원 녀석 집이 잘산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회사에 직원이 막 오백 명쯤 되고 그런다고 했다. 보통이라면 여기까지 오면 어쩔 수 없이 야구로 끝을 봐야 할 법도 했지만 저런 집안이라면 야구를 그만두고 재수해서 대학 가고 사업 물려받아도 하등 상관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이 꼴을 보고 있자니 그 모든 걱정이 참 부질없는 걱정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최수원이 저렇게 나온 것은 그냥 이제 그렇게 참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뭐, 선후배 관계가 어쩌고, 저쩌고 매장? 인성 논란?

그래,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병영 선배의 지랄은 확실히 심했지만, 한국은 엄연한 유교 탈레반의 나라로 장유유서의 기치에 반하는 일은 존재할 수 없다는 선비들이 널렸으니까.

하지만 저만한 실력이라면 그딴 논란이고 뭐고 무조건 1라운드다.

손을 뻗어 녀석의 헬멧 쓴 머리를 두들겼다.

높다.

조유진 자신도 181cm로 작은 키가 아닌데 이 녀석 이상하게 높아 보인다. 실력 때문일까?

아니, 아니다. 키는 10cm도 차이 나지 않지만 어깨 높이는 10cm가 훌쩍 넘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이 다 가진 새끼······.

최수원의 헬멧을 두드리던 조유진의 손바닥에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힘이 더 들어갔다.

***

3회 말

-부웅!!

“스트으라잌!! 아웃!!”

슬라이더가 정말 아슬아슬한 코스로 들어갔다.

선두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낸 안병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경기 벌써 두 번째 삼진이다.

“안병영이 오늘 뽈이 좋은데?”

“승부욕은 있는 녀석이니까요. 지난 경기 그렇게 망치고 아주 이를 갈았을 겁니다.”

박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정말 크게 기대를 걸던 녀석이었다. 만약 성장만 멈추지 않았더라면······.

이어지는 풍천고의 9번 타자.

키는 180 중반 정도? 체격은 제법 좋았지만,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 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온 애송이다. 오늘 자신의 선배들을 상대로 고작 1안타를 허용한 안병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긴장이 가득했다.

“김주연? 0.200/0.182/0.500? 일학년 치고는 타격이 괜찮네. 안타 두 개가 이루타에다가 삼루타네? 아까 보니까 삼루 수비도 곧잘 하고. 어쩌다 풍천고에 간 거야?”

“중학생 때는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겨울방학 때 키가 좀 많이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뭐 다른 명문고에 갔으면 일학년 때부터 저렇게 붙박이 스타팅 멤버로 경기를 뛸 수는 없었을 겁니다.”

당장 작년 중학 리그와 고교 리그의 리그 평균자책점을 비교해보면 중학 리그는 5.19로 극도의 타고투저. 고교 리그의 경우 3.58로 극도의 투고타저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벌어지는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점은 배트라고 볼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 중학생까지는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고 고교 야구부터는 나무 배트를 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생각 이상으로 매우 컸다.

스윗 스팟으로 정확히 야구공을 때려야하는 나무배트와 달리 알루미늄 배트는 배트 전체적으로 반발력이 매우 크다. 먹힌 타구도 장타로 연결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렇기에 알루미늄 배트를 쓰던 타자가 나무 배트로 전환하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 투수라면 몰라도 타자가 일학년부터 주전으로 뛰기 쉽지 않다.

마운드의 안병영이 투구를 준비했다.

오늘 제일 잘 들어오는 공은 슬라이더. 하지만 좌타자를 상대로 우완투수인 그가 슬라이더를 던지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문득 조유진의 머릿속에 오늘 경기 직전 최수원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막 고등학교 올라온 놈 요리하기에는 역시 변화구만 한 게 없지. 변화구 던지면 배트 중심 절대 못 맞출걸? 걔 그거 안타 친 것도 죄다 속구 친거잖아.’

‘응? 그걸 수원이 니가 어떻게 알아?’

‘어, 어? 아니. 그거야 나 선발 투수잖아. 난 당연히 내가 등판할 줄 알고 미리 조사 좀 했지.’

‘네가 조사를 했다고?’

조유진이 초구로 커브를 요구했다.

안병영이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지금 삼진 잡고 한참 기세도 좋은데 9번 상대로 커브는 무슨 커브? 쓸데 없이 볼카운트 낭비하게 하지 마라.’

눈빛 한번 살벌하다. 직접적으로 들은 건 아니지만 귓가에 안병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선 커브 하나 던져 보는 게 답 같은데 어쩔 수 없었다.

몸쪽 낮은 속구.

그래, 그래도 오늘 전체적으로 구속은 나쁘지 않았으니 어쩌면 병영 선배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와인드업.

야구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살짝 몰린 공.

하지만 괜찮았다. 그래도 거의 130에 육박하는 속구다. 아무리 조금 몰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학년이 치기에는······.

-딱!!!

하얀 공이 높게 솟았다.

안병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이루수를 넘어 저 뒤편의 외야수에게 향한다.

아슬아슬한 타구.

넘어가는 건가? 아니, 아니다. 차라리 우측이었다면 모르겠으나 가장 깊숙한 우중간이다.

안양천의 맞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던 타구가 펜스를 두들겼다.

풍천고의 1루 코치가 미친 듯이 팔을 휘둘렀다.

타자 주자는 빨랐다.

멀리 날아가는 자신의 타구가 궁금할 법도 했건만 굳이 그것을 지켜보는 대신 그는 공을 쳐 내자마자 전력을 다해 일루로 달렸다. 일루 베이스를 지났을 때까지 외야수는 아직 공을 잡지 못했다.

삼루타.

안병영이 마운드를 거칠게 짓밟았다.

***

내가 이래서 조심하라고 몇 번을 이야기 해줬거늘.

역시 마운드에 선 투수가 멍게 놈이다 보니 알아먹지를 못한다.

김주연.

잘 아는 녀석이었다. 내가 MLB에 진출한 이후 KBO에서 MVP까지 한 번 따내고 서른 살에 메이저에 진출하는 녀석이다. 내가 워낙 메이저에서 잘나간 덕분에 계약금도 제법 두둑하게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2년 뛰고 성적 안 나오는 바람에 다시 리턴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타자를 상대로 저런 안일한 승부라니.

쯧쯧쯧.

게다가 멍게 놈 표정만 봐도 그 속이 너무 뻔히 보였다. 저 자식은 지난주에 내가 완벽하게 수비를 해줬을 때는 송구 똑바로 못하냐고 지랄을 했었다. 아마 지금도 제 놈 공이 어설펐음을 탓하기 전에 아마 누군가 남의 탓을 하고 있겠지.

뭐 예컨대 외야 수비가 슈퍼 캐치를 못 보여준 일이라든지, 아니면 괜히 조유진이 초구로 이상한 공을 달라고 싸인 내는 바람에 흐름이 끊겼다든지 뭐 그런 이상한 종류의 남 탓일 것이다.

설마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고를 할 수 있겠냐고?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놀랍게도 멍게 놈의 머릿속에서는 그게 말이 된다.

저 놈은 대체 머릿속 프로세서가 어떻게 된 것인지 문제가 생기면 일단 다른 사람의 작은 흠집이라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면 뭔가 엄청난 일이라도 생기는 줄 아는 것이다.

물론 그런 성격이 선발 투수에게 매우 나쁜 것인가 물어본다면 글쎄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또 2036년 여름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당시 나는······(후략).

-뻐엉!!

“스트라잌!!”

아무튼간 오랫동안 프로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상한 놈들을 잔뜩 만날 수밖에 없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만 사실 따져보면 애초에 이 프로 선수라는 것은 인성이 제대로 함양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딱히 배우는 것 없이 운동만 죽어라 하는데, 그 와중에 프로가 되는 놈들은 모두가 그 집단에서 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놈들이다. 배운 것도 없는 놈들이 오냐오냐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가끔 보이는 좀 제대로 된 놈들은 대부분이 승승장구하던 유망주 출신이 아니라 나름대로 고생을 좀 해본 녀석들이었다. 역시 사람은 고생을 해야 성숙해지는 법인가 보다.

-따악!!

희생플라이 1실점.

멍게 저놈 저거 눈빛 봐라. 지가 제대로 못 해 놓고 이번에는 좌익수가 레이저 송구 못한다고 지랄하는 눈빛이다. 정작 투수인 제 놈도 저 자리에 세워 두면 레이저 송구는 못할 거면서.

아무튼 어쩌면 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옹졸한 성격은 어떤 의미에서는 선발 투수에게는 필요한 자질일 수도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프로 선수라는 것이 인성이 제대로 함양되기 힘든 조건들로 가득한데, 그 가운데서도 선발은 더 극악하다. 선발은 한 경기에서 역할이 가장 큰 자리다. 그 말은 부담감도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저런 옹졸하고 지랄맞은 성격으로 어지간한 건 다 남 탓을 해버리면 그 부담을 이겨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아, 그래서 내가 멍게 녀석의 옹졸함을 이해하는 거냐고?

그럴 리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게다가 저 멍게 녀석은 마운드에 섰을 때만 지랄 맞은 게 아니라 평상시에도 아주 지랄 맞은 놈이다.

-딱!!

내야 땅볼 아웃.

마운드의 멍게가 마치 KKK로 삼자범퇴라도 한 것마냥 파이팅 있게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하여 이제 4회 초.

-딱!!

초구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큼지막한 단타.

-부웅!!!

“스트라잌!! 아웃!!”

-딱!!!

또 초구 유격수 정면 땅볼 병살타.

5분.

깔끔하게 공 여덟 개 만에 우리의 공격 이닝이 정리됐다.

“아, 씨발······. 무슨 쉴 틈을 안 주네.”

그리고 그 꼴을 본 멍게 놈이 과연 선발 투수다운 인성을 자랑하며 다시 마운드로 올라갔다.

점수는 아직 2:1.

나에겐 최소 두 번의 찬스가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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