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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6화 (16/305)

16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4)

“근데 은진아. 수원이는 어떻게 아는 거야? 너 1학년 때도 쟤랑 같은 반 아니었잖아. 게다가 특활 같은 것도 딱히 같이 한 적 없었고.”

이제 코밑이 조금 거뭇해지기 시작한 남자애 하나가 박은진에게 슬쩍 물었다.

“어? 수원이? 그냥 학교에서 유명하잖아.”

“따로 뭐 아는 사이는 아니고?”

그녀는 사내의 그 질문이 참으로 우스웠다. 본인 딴에는 마음을 숨긴다고 숨겼다지만 너무 뻔하지 않은가.

“응, 수준별 학습 같이 한 번 들은 적 있기는 한데, 아마 쟨 나 기억도 못 할거야.”

“에이, 그럴 리가. 은진이 네가 얼마나 유명한데.”

남자애의 과장된 목소리에 은진이 그냥 웃었다.

“아, 저기 최수원이다.”

남들보다 큰 키에 길쭉한 팔다리. 운동선수라기보다는 모델에 가까워 보이는 외모였다.

역시나 여기 모인 저 어른들도 그 목적인 모두 그였는지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던 그들이 모두 카메라를 들고 수원이를 찍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모자 두 번.’

왼손으로 자기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본래는 여기서 방망이로 바닥에 선을 두 번 긋고 어깨를 한번 으쓱했었다.

‘하지만 지난 경기부턴 변했지.’

방망이로 홈플레이틀 한 번 톡 치고는 방망이를 크게 돌려 자세를 바로 잡는다.

경기장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쑥덕대던 어른들이 모두 조용해져서였을까?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여기 모인 이 아이들도 뭔가를 느낀 것이다. 지금 타석에 선 저 타자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초구.

최수원이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구심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이다.

‘은진아, 저게 볼이라는 거야. 야구는 저기서 공 던지는 애 투수고 투수가 던진 공을 타자 그러니까 수원이가 쳐야 하는 경기인데. 빗나간 공은 안 쳐도 되거든. 지금은 공이 빗나간 거야. 4번 빗나가면 수원이는 1루에 나가는 거고 만약 제대로 던진 공을 3번 못 치면 아웃이 되는 거야.’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이듯 이야기하는 것까지는 참을만했다. 그 속이 너무 뻔하여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 그렇기에 야구룰 따위 너보다 내가 잘 안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괜히 참은 것일까? 녀석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녀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내가 보기엔 오늘 신기록은 좀 힘들 거 같아. 사실 목동 구장이 고등학교 선수들 수준에서는 홈런 치기 되게 힘든 구장이거든. 게다가 지난 경기는 상대 투수가 수원이를 좀 얕봐서 계속 정면 승부를 했었고, 오늘은 조금 전처럼 피해갈 거라서. 야구는 원래 투수가 제대로 상대 안 해주면 타자는 뭐 할 수 있는 게 없거든. 그래서 말인데······.’

사내놈이 잠시 망설였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뭐 경기 끝나고 같이 밥이나 먹자는 이야기겠지.

“우빈아. 쉿!!”

“어······, 어?”

“경기 보는 데 방해되잖아. 그리고 볼은 빗나간다고 하는 게 아니라 존에서 빠진다고 하는 거야. 투수가 일부러 노리고 던질 수도 있는 거거든.”

우빈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나······, 나도 아는데. 그냥 너한테 쉽게 설명을 해주려고······.”

“알았어. 우빈아. 그러니까 우리 경기 좀 보자.”

순간 괜히 악플러 하나 만든 거 아닌가 싶어 약간 후회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타석에 최수원이 또다시 자신의 루틴을 시행하고 방망이를 멋지게 치켜드는 순간 싹 사라졌다.

***

그라운드에 적막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이 퍽이나 우스웠다.

아니,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비장함이 연출되는 건지.

마운드의 투수가 던진 초구는 건드려볼 이유가 없을 만큼 멀찍이 떨어진 곳에 들어갔다. 그 공을 잡아낸 포수가 용할 지경이다.

가볍게 루틴을 수행하고 타격을 준비했다.

오늘의 상대 팀은 풍천고.

중앙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기껏해야 전국대회 2차전. 뭐 운이 좋다면 3차전 정도 나갈 전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풍천고의 에이스는 최고 141km/h의 속구에 체인지업이 주특기라고 들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그 정도면 그래도 프로에 지명 정도는 받지 않았을까? 그리고 많은 하위 라운드들이 그렇듯 1, 2년 이내에 방출되지 않았을까 싶다.

두 번째 공.

폼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공의 느낌이 다르다.

-뻐엉!!

“스트라잌!!”

역시 체인지업이었다.

볼카운트 1-1.

최고 143을 던진다는 속구를 노리고 있던 만큼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물론 그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고 해도 방망이를 휘두른다면 내야수 키를 넘기는 타구 정도는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애당초 내가 상대하던 투수들은 체인지업이 143이 나오던 괴물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뭐 20년 만의 기록인지 뭔지에 도전하는 상황이다.

아, 그거 신경 안 쓰는 거 아니었냐고?

그럴 리가.

나라면 너무 당연하게 해내야 하는 기록이기에 굳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방금 내가 자신의 체인지업에 당황해서 반응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마운드 위 투수의 얼굴에 제법 자신감이 엿보였다. 하긴 생각해보면 3연 타석 홈런이라고는 하지만 이전까지 나는 투수로 유명했지, 전국구로 유명한 타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회귀하기 이전.

모두가 피해가는 홈런왕 최수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세 번째.

공이 날아든다.

낮게 깔린 빠른 공.

좋은 공이었다.

뭐,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수준에서의 이야기였지만.

-딱!!

완벽하게 잡아당겼다.

시원하게 유격수의 키를 훌쩍 넘어가는 타구. 한 0.1초 정도 타구를 살피고 방망이를 휙 던졌다.

풍천고의 좌익수가 허겁지겁 담장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어림없다. 저건 2000년대 최고의 좌익수 수비를 보여줬던 알렉스 고든이 전성기 때의 폼으로 저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해도 잡아낼 수 없는 공이다.

당연한 일이다.

미친 야수는 안타를 훔칠 수 있지만, 심지어 때로는 아슬아슬한 홈런까지 훔쳐 가는 놈들도 있지만, 펜스를 훌쩍 넘어 외야 그물망을 때리는 공을 훔칠 수 있는 야수는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

4연타석 홈런.

아쉽지만 힘이 부족해서 목동의 장외는커녕 그물망의 상단도 때리지 못했다. 만약 목동이 다른 구장처럼 외야가 있었더라면 1층 중간 정도? 만약 잠실이었다면, 그리고 만약 외야수가 알렉스 고든 정도 됐다면 잡혔을지도 모르는 타구였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야구에는 만약이란 게 없다.

일루로 가볍게 뛰어가는 나를 향해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고작 삼백 명도 안 되는 적은 인원이었지만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역시나 언제나처럼 조유진이 가장 먼저 방방 뛰며 나에게 달려왔고 그 뒤로 요 며칠 친해진 규혁 선배가 슬금슬금 따라왔다.

“이걸 진짜 해내냐. 와 미친. 나라면 숨 막혀서 방망이도 제대로 못 휘두를 것 같은데.”

“확실히 코어의 유연성이······. 수원아 잠깐 허리 좀 만져보자.”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티몬과 품바. 그리고 그 외에 여러 동료들. 심지어 코치님과 감독님까지 모두 달려 나와서 나의 네 번째 홈런을 축하했다.

그것도 거의 2, 3분이나.

마운드의 투수가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20년 만의 타이기록이라서 그런지 상대 팀도 그렇고 심판도 딱히 우리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만 하고 들어가자고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너무 흥분한 탓인지 도무지 알아먹지를 않았다.

민망했다. 그것도 너무너무.

아, 내가 회귀한 건 나 혼자만 아는 사실이고, 이건 그래도 20년 만의 기록인데 민망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에휴······.

***

-타다다다닥

이지연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프로야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려 20년 만의 기록이었다. 프로 경기였다면 아예 미리 작성해둔 기사를 단신으로 내보낼 만한 뉴스거리다. 고교야구라고 해도 경기 결과를 종합하여 내놓는 기사가 아닌, 이 주제 단독으로 기사를 내보낼 만하다.

미리 작성해둔 두 가지 버전의 기사 가운데 4연타석 홈런을 성공시킨 버전의 기사를 열어서 상황 설명 몇 가지를 더한 뒤 팀장에게 메일로 전송을 했다.

3연타석 홈런 기사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4연타석 홈런은 20년 만의 타이기록이다. 게다가 이전에 4연타석 홈런을 쳤던 선수가 KBO에 전설로 남은 홈런왕인 이상 그와 비교되는 이 기사는 팀장에게도 제법 만족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경기는 쭉쭉 진행됐다.

사실 최수원이 너무 쉽게 홈런을 쳐낸 탓에 조금 가려지기는 했지만 풍천고의 에이스인 이경석은 무시할만한 투수가 아니었다. 최고 141km/h의 속구와 완성도 높은 체인지업으로 아마 구속이 3~4km/h만 빨랐다면 상위라운드도 충분히 가능했을 투수다.

실제로 오늘 경기.

이경석은 최수원에게 솔로 홈런포를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1회와 2회를 통틀어 피안타 하나만을 허용하며 깔끔하게 중앙고의 타자들을 막아냈다.

물론 중앙고의 투수 역시 오늘은 나쁘지 않았다.

‘안병영이라고 했던가?’

비록 지난 천남고와의 경기에서 터무니없이 무너지며 안 좋은 꼴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천남고는 전국대회 4강 단골팀이다. 그건 저 투수의 수준이 낮다기보다는 천남고 타자들 수준이 높았다고 봐야 했다. 선발라인업 가운데 드래프트에 뽑힐 게 확실한 타자가 셋이나 되는 팀은 흔치 않다.

반면 오늘 그들의 상대인 풍천고는 보통의 흔한 고등학교 야구팀이었다.

최고 132km/h의 속구와 제법 노련한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

안병영 역시 2이닝 동안 피안타 두 개에 볼넷 하나만을 허락하며 풍천고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리하여 3회 초.

선두 타자인 포수 조유진이 내야 땅볼 아웃로 물러났다.

이어진 것은 오늘의 주인공인 최수원의 두번째 타석.

그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잠깐의 정적.

그리고 지금 이 야구장에 모인 사람이 고작 삼백 명 남짓이라는 것을 믿기 힘든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심지어 그 함성을 지르는 사람 가운데는 오늘 최수원의 타격 영상을 찍기 위해 올라온 스카우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지연이 빠르게 스마트폰을 펼쳤다.

“팀장님. 제가 보낸 기사요. 아, 네 그거요. 아직 안 올리셨죠? 아니, 재촉하는 게 아니라. 그거 일단 폐기하세요. 제가 기사 새로 써서 보낼게요. 네, 바로 보낼게요. 아, 그리고 오늘 기사 하나 더 나가야 할 수도 있어요. 일단 지금 보낼 건 인터넷 뉴스용으로 쓰시고, 지면용 따로 준비할게요. 아니, 신기록이에요 신기록!! 타이기록 아니고. 신기록이요. 네!! 5연타석 홈런이라고요. 5연타석!!”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자리.

최수원이 후려갈긴 야구공이 우측 외야 펜스와 그물망 사이를 구르고 있었다.

“끝난 거 아니에요. 진행형입니다. 이거 어떻게 될지 몰라요. 아니!! 지면 비워주세요. 경기 끝나는 시간이 다섯 시가 넘는데 어떻게 다섯 시까지 보냅니까. 팀장님 분명 약속 하신 겁니다. 저 진짜 지면에 안 실어주시면 사표 낼 거예요.”

3회 초.

최수원이 가벼운 걸음으로 3루를 밟고 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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