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1)
아마추어건 프로건, KBO건 MLB건 절대 변하지 않는 명제가 한 가지 있다.
‘승리는 항상 옳다.’
그리고 이 말은 바꿔 말한다면 ‘패배는 항상 틀렸다.’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고 야구부원들을 실은 버스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패배는 어떤 상황에서건 틀렸다. 심지어 오늘 중앙고가 당한 패배는 그냥 패배도 아니었다.
대패. 그것도 역전으로 대패.
5회 초 멍게 녀석은 선제 안타에 이은 백투백 홈런으로 3점을 내주고 범타 하나에 이루타 하나를 허용했다. 뭐 거기까지만 하더라도 감독은 멍게를 계속 쓸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팀에 나를 제외하면 녀석만 한 투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멍게는 곧바로 하위 타순에게 볼넷 두 개를 헌납했다. 멍게는 자칭 피네스 피쳐다. 제구력을 장점으로 하는 투수라는 뜻이다.
물론 내 기준으로 보기에 멍게 녀석은 강속구는 물론이거니와 제구력까지 아무것도 없는 그냥 투수였지만, 굳이 세상의 모든 투수를 파워 피쳐와 피네스 피쳐로 나눠야만 한다면 피네스 피쳐에 더 가까운 건 사실이다.
아무튼 그런 녀석이 두 타자를 연속으로 볼넷으로 내보냈다? 그것도 까다로운 상위 타순 타자가 아니라 그냥 잡고 가야 하는 하위 타순의 타자들을?
볼 것도 없다.
원아웃 주자 만루.
박 감독은 치열하게 고민을 했다. 일루에 선 내가 보기에도 아주 고심에 가득 찬 표정이다. 아마 경기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마운드의 멍게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서 불펜에 남아있는 투수들을 바라보는데 그걸 눈치 못 채면 바보다.
현재 우리 팀의 투수는 나를 포함해서 총 일곱 명.
그 가운데 세 명은 일학년으로 불과 여섯 달 전까지만 해도 중학생이던 녀석들이다. 사실상 전력이라고 보기 힘들다.
결국 팀의 세 번째 투수인 진우 선배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그리하여 결론은 7회 11:3 콜드게임. 5회 초까지 2:0으로 앞서던 경기를 역전패하는 걸로 모자라 콜드게임까지 당해버렸다.
아, 근데 왜 11:2가 아니라 11:3이냐고?
***
“응? 야, 이지연. 너 이거 뭐야.”
“뭐가요.”
“내가 오늘까지 기사 하나 쳐내라고 했더니 지금 반항 하는 거야?”
기자라는 직업이 엘리트의 대명사이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2025년인 지금도 기자라는 직업은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상당한 엘리트 만이 다다를 수 있는 직업이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10대 일간지와 3대 경영지. 지상파 3사와 2대 뉴스. 그리고 4대 종편으로 대표되는 일명 언론고시 출신의 기자들에게 한정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지연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 언론고시에 딱 합격한 재원 중의 재원이었다. 세상에는 기레기가 널렸지만 그래도 10대 일간지 기자 정도 되면 그 위상이 다른 법이다. 매년 졸업하는 명문대의 문과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가운데 10대 일간지의 기자가 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쉰 명 남짓. 이지연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기사 가져왔잖습니까.”
“아 이 또라이 새끼. 야, 이거 고교야구잖아. 고교야구. 요즘 세상에 누가 고교야구 기사를 본다고 이딴 걸 가지고 오고 있어. 지금 남들은 죄다 박가람 홈런 신기록 여부 놓고 떠들고 있는데 뭐? 고교야구? 야, 좀 생각을 하고 기사를 쓰자. 응?”
“이제 5월입니다. 홈런 신기록은 개뿔.”
“그래, 5월이니까 신기록 설레발이 제일 잘 먹히는 타이밍이지. 다들 올해는 다를 거다. 아주 기대에 잔뜩 부풀어있을 때잖아. 어?”
대충 길러 삐죽삐죽한 머리. 연한 화장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짙은 다크 서클.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까지.
이지연이 자신의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팀장님. 우리가 뭐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나 듣기 좋게 지껄여주는 그런 사람입니까? 기사 써야죠. 기사.”
“이 새끼 이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래서 너는 인마 기자가 무슨 자기 쓰고 싶은 이야기 쓰는 직업인 줄 알아? 그럴 거면 저기 어? 블로그 글로 시민기자단 모집하는 거기나 가세요. 우린 인마 기사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판매직이야.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거. 듣고 싶어 하는 거. 쓰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서 지금 그런 설레발 기사들 우라까이라도 하라고요? 팀장님 좀 보십쇼. 한 경기 3홈런입니다 3홈런. 그것도 상대가 하남고 백하민이에요. 백하민. 이번 시즌 1라운드 상위픽이 확실한 150 던지는 투수. 심지어 그걸 또 2학년이 했어요. 고교야구가 나무 배트로 바뀌고 한 경기 3홈런. 2004년 이후로 처음입니다. 팀장님 좋아하시는 그 박가람도 학창시절에 멀티 홈런 경기가 하나도 없었다고요.”
“그래서. 너 이 기사 올리면 조회수 얼마나 나올 거 같은데. 하다못해 왕중왕전도 아니고. 뭐 주말 리그? 그것도 콜드게임이 나온 경기? 이거 장담하는데 박가람 특집의 10%도 안나온다. 잔소리 그만하고 가서 내일까지 박가람 특집 기사로 가져와. 알겠어?”
“아니, 콜드게임이 나오긴 했지만 그건 3홈런 친 중앙고의 콜드게임이 아니라!!”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서 박가람 특집 기사 가져오라고. 여기서 지금 너 한 마디만 더 붙이면 이 기사 업로드 없다. 그냥 삭제해버릴 거야.”
“올려주시는 겁니까?”
“왜? 안 올린다고 하면 또 사표 낼라고? 됐으니까 얼른 사라져 버려. 내일 화요일에 브레이브스 대전 원정 경기 잊지 말고.”
“넵!! 알겠습니다!! 충성!!”
문을 닫고 나가는 싸가지 없는 이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공 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MZ인지 지랄인지. 자신이 2년 차일 때는 선배 그림자도 제대로 못 밟았었는데 요즘 것들은 아주 상전이 따로 없다. 게다가 걸핏하면 때려치우기나 하고. 작년에도 7명을 뽑았는데 남은 건 결국 3명이다. 뭐, 자기가 생각했던 기자랑 다르다는 놈부터 워라밸이 영 별로라는 놈들까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바뀐 것을.
공 팀장의 시선이 이지연이 제출한 기사 제목으로 향했다.
-홈런!! 홈런!!! 그리고 또 홈런!!!!-
젠장, 제목만 보면 딱 박가람 기사인데.
그가 기계적으로 이지연의 기사를 업로드했다.
뭐, 그래봤자 어차피 넘쳐나는 트래픽 속에 묻혀버릴 그저 그런 기사 중 하나겠지만.
***
토요일의 심각한 패배 덕분이었을까? 일요일에 있었던 연습은 유독 힘들었다고 했다.
아, 왜 문장이 직접경험이 아니라 간접경험이냐고?
그야 당연히 나는 연습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나는 선발로 나와 4이닝 무실점으로 상대를 완벽히 틀어막는 동안 80개가 넘는 공을 던졌다. 게다가 미리 어깨도 아프다는 떡밥을 던져뒀다.
그리고 애당초 어제 특훈은 펑고랑 특타였다. 둘 다 나랑은 상관이 없는 부분이다. 듣기로는 감독보다 타격 코치가 화가 많이 났다고 하더라.
‘선발 투수가 3홈런을 치는 데 공을 스치지도 못해?’
뭐 대충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는 하던데 사실 이 녀석들에게는 조금 가혹한 말이기는 했다. 솔직히 나니까 3홈런이나 때려낸 거지 어제 백하민 정도면 프로 2군 애들로만 데려다 놔도 3실점 이내로 틀어막을 만큼 잘 던지기는 했다. 특히 본인도 홈런 한 방 친 다음부터는 공이 더 매서워지는 게 자칫 잘못하면 나도 홈런 못 칠 뻔했다. 뭐, 마지막에 볼넷으로 내보내느냐 삼진 잡느냐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던져준 덕분에 어찌어찌 넘기기는 했지만, 마지막 그 홈런은 잠실이었다면 외야 플라이로 끝났을 만한 타구였다. 아무래도 얼른 몸을 키우기는 해야 할 것 같다.
“일찍 나왔네?”
“네가 새벽부터 전화해서 깨웠잖아.”
월요일 새벽 연습.
연습장에 가장 먼저 나와 있던 것은 조유진이었다. 이제 겨우 새벽 6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지금 팀 분위기 장난 아니라니까.”
“나도 알아. 연습경기도 11:6으로 졌다며.”
야구는 기세의 스포츠라는 말이 있다.
사실 어느 스포츠가 안 그렇겠냐마는 야구 역시 멘탈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일전에도 한 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루틴이 조금만 깨져도 슬럼프에 들어가는 게 야구 선수다. 물론 주말리그 이후에 있었던 연습경기는 주말리그에 출전하지 않았던 애들 위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팀 분위기라는 것이 그렇게 개판이 난 상태에서 본 실력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도 그건데 타격 코치님이 특타 때 자꾸 네 이름 들먹이는 바람에 지금 팀 분위기 완전 개박살 났어. 이런 상황에서 너 아침 연습까지 늦잖아? 너 진짜 완전 엿 되는 거다.”
“글쎄다.”
“하여간 쿨한척하기는.”
“이건 쿨한 척이 아니라 그냥 쿨한 거야.”
실내 체육관으로 들어가 요가매트를 깔고 폼롤러로 몸을 꼼꼼하게 풀어주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데우는 사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애들이 하나둘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7시부터 연습 시작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녀석들이 미리 나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묘하게 껄끄러운 감정이 드는 남자.
179cm에 101kg.
삼시세끼 닭찌찌살만 먹을 것 같은 거대한 근육질의 사내
일루수 규혁 선배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참 스트레칭에 열중하던 나를 지켜보던 선배가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왔다.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이두근이 거의 내 머리만 했다.
“최수원.”
“아, 네. 선배.”
대체 무슨 일일까?
토요일 경기 때문일까? 아니면 타격 코치와의 특타 때문일까. 물론 그 모든 것들에서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냥 야구를 너무 잘한 것뿐이지만, 어디 세상 사람이라는 것이 모두 정상인만 있다던가.
나 최수원.
불과 이틀 전에 안타를 아웃으로 만들어주고도 욕을 먹었던 남자.
이제는 어떤 또라이가 나타난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리 와봐. 내가 스트레칭 도와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