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5)
천남고의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조금 전에 두 번이나 상대했지만, 솔직히 어떤 타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정도면 혹시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그럴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이번 경기 천남고의 타자들이 아닌 나 자신과 싸웠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건대 그리 대단한 타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2번 아닌가. 물론 요즘, 아니 이제는 십 년도 더 됐으니 요즘이라고 하기 좀 그렇다만. 하여간 강한 2번이 대세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메이저리그. 혹은 KBO에서도 몇몇 팀 정도나 하는 짓이다.
강한 2번을 쓸 만큼 풀이 넉넉하지 않아서, 혹은 지도자들이 평생 해온 야구라는 것이 그런 야구라서. 어떤 이유가 됐건 고교야구에서 강한 2번은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다.
-딱!!
어······.
음······.
하여간 보기 힘들다.
유격수 키를 살짝 넘기는 안타. 발이 제법 빠른 타자였지만 2루까지 뛸 여유는 없었다. 녀석이 1루에 서서 정강이 보호대를 풀고, 배팅장갑을 벗어 뒷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나에게 조용하게 말을 걸어왔다.
“뭐야, 너 어디 고장 났냐? 아니면 이제 타순도 두 번 돌았겠다 슬슬 두들겨 맞을 것 같아서 쫄은 거냐? 근데 어쩌냐. 대타를 올리려면 좀 제대로 된 놈을 올리든지 했어야지. 이제 너희 큰일 났다. 존나 두들겨 맞는 일만 남았네.”
뭐지? 이건 걱정일까? 도발일까? 아니면 멍게 놈은 나에게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칭찬일까.
뭐, 적당히 복합적인 거라고 해두자. 그렇다면 답변도 적당히 복합적으로 해줘야겠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이럴 때는 공손하게 대답해주는 게 좋다.
물론 나도 조용히 녀석만 들릴 정도로.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몸은 괜찮아요. 그리고 솔직히 제 공에 방망이도 못 스치는 타자들한테 두들겨 맞을까 걱정은 하나도 안 됐고요. 멍······, 아니 병영 선배도 공에 파리가 앉을 만큼 느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나쁜 투수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딱히 빠따가 좋은 것도 아닌 작전형 2번 타자한테 안타 쳐맞는 걸 보니까 저도 앞으로 존나 두들겨 맞을 일이 걱정이 되긴 하네요.”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상대가 더 빡이 치거든.
“뭐 이 새끼야? 너 시발 2학년 새끼가 지금 뭐라고 그랬냐?”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왔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런 종류의 녀석이 나이를 거론했다는 건 사실상의 패배선언이다.
그나저나 멍청한 녀석 같으니.
설마 지금 여기 있는 게 우리 둘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거기 무슨 일이야?”
사실 프로 경기였다면 이 정도 선에서 심판이 개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말싸움 역시 경기의 일부이니까. 하지만 이건 고교야구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일루심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 선배가 제 공 너무 좋았다고 도저히 칠 엄두도 안 났었다고 칭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제법 널리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멍게 녀석의 사나운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졌다.
‘이 @#[email protected]$% 새끼가?’
눈으로 욕하는 걸 겨루는 대회가 있다면 적어도 결승전 정도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음 직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멍게 녀석. 목 위로 달고 다니는 게 단순한 무게추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 말이 자기를 멕이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만한 지능은 있었다니 놀랍다.
“사실이야?”
일루심이 나이 말고는 자랑할 게 없는 천남고 2번 타자에게 되물었다. 잠깐 어버버 거리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최소한 상식은 있는 녀석이라서.
분명 이 녀석은 평소 자신이 아무리 싫어하던 후배라도 자기를 도와주면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던질 줄 아는 상식인일 것이다. 어디 마운드에 서서 눈으로 레이저나 쏘면서 피안타나 허용하는 멍게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타석에 대망의 3번 타자.
백하민이 올라왔다.
지금은 관리가 안 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라 비주얼적으로 좀 촌스럽긴 하지만 프로에 가서 열심히 헤어샵 가고, 피부과 좀 다녀주면 비주얼로도 유니폼 좀 팔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 마운드 위의 멍게와 참으로 대조적이다.
백하민이 힐끔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타석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멍게 녀석의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하긴, 마운드에 선 투수는 자신인데 타자가 투수가 아닌 일루수를 의식하고 있으니 얼마나 열이 뻗칠까.
사람은 화가 나면 본래 힘이 더 강해 진다.
무슨 교감신경이니 부교감신경이니 하여간 대충 그런 것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가끔 도발 당하면 구속이 더 빨라지는 괴물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멍게는 어떨까?
-딱!!!
시원한 초구 공략. 높게 뜬 타구가 두둥실 날아간다.
어림없는 파울볼. 하지만 크긴 컸다. 아마 프로 구장이었다면 내야 3층도 거뜬히 때리는 파울 홈런이 아니었을까?
그 시원한 파울 홈런에 멍게 녀석의 벌개진 얼굴이 조금씩 본 상태로 돌아 왔다.
그래, 침착해라.
화가 나면 더 강해지는 녀석들은 흔치 않다. 그러니까 그런 놈들을 괴물이라고 하는 거다. 물론 멍게 너도 얼굴과 개념은 충분히 괴물이긴 하지만 실력은 아니다.
백하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타석에 섰다.
멍게 녀석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일루를 한 번 바라봤다. 드디어 제 정신이 든 것일까? 녀석의 시선이 내가 아닌 주자를 스친다.
두 번째.
멍게 녀석은 최고 132km/h. 평균 120후반 대의 똥볼을 던지는 투수였지만 그래도 슬라이더와 커브 모두 존의 안과 밖을 드나들 줄 아는 나름 기교파 투수다.
볼카운트는 0-1. 개념이 있다면 여기서는 유인구를 던져야 한다. 앞서 초구는 커브였으니 이번엔 슬라이더. 조금 뻔하지만 나쁘지 않다.
-뻐엉!!
하지만 백하민이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멍게에게 개념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실력은 부족했다. 존에서 살짝 빼서 방망이를 끌어내려는 의도로 던진 슬라이더가 살짝 대신 아주 크게 벗어났다.
볼카운트 1-1
멍게가 –탁탁 로진백을 두들겼다. 아직 비교적 선선한 5월의 날씨. 지금까지 두 타자를 상대로 고작 공 세 개 던진 게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몸에서는 땀이 잔뜩 흘러내렸다.
조유진의 싸인에 멍게 녀석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하여 세 번째.
-뻐엉!!
이번에도 역시 방망이는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보다는 괜찮은 코스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골라낼 줄 안다는 뜻이다.
굵직한 땀방울이 멍게 녀석의 울퉁불퉁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가 보면 월드시리즈 결승전쯤 되는 것같은 비장함이다.
하지만 굳이 이 비장함을 놀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이건 멍게 녀석 인생에서는 그 정도로 중요한 순간일지도 몰랐으니까.
볼카운트 2-1.
쓸데없는 긴장감이 그라운드를 감돈다.
백하민이 여유로운 자세로 네 번째 공을 기다렸다.
멍게 녀석의 시선이 슬쩍 1루 주자를 스친다.
이어지는 슬라이드 스텝. 수도 없는 연습으로 만들어낸 교과서적인 자세였다.
절묘한 코스.
마침내 공 세개 만에 그가 던지고 싶던 그런 공이 흘러나왔다.
존 안쪽에서 바깥으로 공 하나 정도 빠져나가는 절묘한 슬라이더. 비록 구속은 120km/h 남짓에 불과했지만 고교야구 레벨에서는 정상급이라고 봐도 무방할 공이었다.
-딱!!
그래, 분명 방금 멍게가 던진 공은 고교야구 레벨에서는 정상급 슬라이더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아쉽게도 지금 타석에 선 백하민은 투수로는 이미 탈고교급. 그리고 타자로써도 충분히 고교야구 정상급 타자였다.
백하민이 살짝 빠져나가는 공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어쩌면 앞서 두 개의 공이 바깥쪽으로 어림없이 빠져나갔기에 눈과 몸이 그것에 적응된 탓일지도 몰랐다.
안일했다.
차라리 커브를 조금 더 활용했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속구를 섞었더라면.
물론 초구가 커브였고, 백하민이 그 공을 저 높은 곳까지 날려보낸 것이 불안했을 수도 있다.
또한, 불펜에서 공을 던져봤을 때 오늘은 커브보다 슬라이더가 좋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슬라이더 위주로 볼배합을 가져간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3구 연속 슬라이더라니.
방망이를 집어던진 백하민이 가볍게 일루를 향해 달려왔다.
“이걸로 동점이네.”
그리고 녀석은 내 답변 따윈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만만 남긴 채 일루를 지나 이루로. 다시 이루와 삼루를 지나 홈까지 달려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절대 마운드의 멍게가 멍한 표정으로 저 멀리 야구공이 떨어진 지점을 바라보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동점? 동점이라니. 물론 팀은 2:2 동점이다.
하지만 난 녀석을 상대로 삼진 하나에 볼넷 하나고. 녀석은 나를 상대로 홈런만 두 방을 맞았는데 그걸 어떻게 단순하게 동점이라 퉁을 칠 수 있을까. 하여간 이러니까 사람들이 야구 선수들이 수학도 잘못하는 무식한 놈들이라는 편견을 갖는 것이다.
“선배, 괜찮습니다!! 아직 2:2 동점이에요. 차근차근 하나씩 가시죠.”
유진이 녀석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멍게가 다시 로진백을 주어들었다.
멍게는 이제 나를 노려보지 않았다.
타석에 천남고의 4번 타자가 들어왔다.
체격을 보니 힘은 제법 좋았던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어떤 타자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멍게가 공을 던졌다.
좋은 공이었다.
그래, 두들겨 맞기 딱 좋은 공.
-딱!!
백투백 홈런으로 3:2.
내 예상처럼 타자는 아주 힘이 좋은 타자였다.
그렇게 게임은 완전히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