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1화 (11/305)

11화.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4)

“뭐야?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고교야구는 선수들 간의 레벨 차이가 상당하다. 그리고 그것은 명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커진다.

중앙고는 빈 말로도 야구 명문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물론 20년 쯤 전에는 잠깐 강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근 십 년을 통틀어 중앙고 야구부가 가장 강한 시점은 최수원이라는 에이스가 존재하는 바로 지금이다.

물론 장작을 좀 자주 쌓고 가끔 그렇게 쌓아 올린 장작에 멋지게 불을 지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150을 던지는 투수는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에이스다. 그리고 보통 그런 절대적인 에이스는 바로 며칠 뒤에 또 던져야 하는 토너먼트라면 또 모를까. 주말리그에서는 고교야구 규정상 한계 투구 수인 105개를 거의 무조건 채운다.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근데 왜 투수를 교체해. 쟤 지금 이제 여든네 개 던졌잖아.”

“그게 부상이면 아예 경기에서 빠져야 할 텐데 제출표를 보니까 일루수 교체라서요······.”

“뭐? 일루수?”

***

야구의 글러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미트와 글러브다. 물론 세부적으로 보면 포지션별로 그 형태가 매우 다르고, 거기에 선수마다 약간의 커스텀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고교레벨에서는 사실 대부분 기성품 사다 쓰는 거라서 선수 개개인에 맞춰서 특이한 형태의 뭔가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 근데 갑자기 왜 글러브를 설명하고 있냐고?

“이거 영 불편하네······.”

그거야 내가 지금 끼고 있는 것이 글러브가 아닌 미트라서 그렇다.

나는 투수다. 당연히 포수와 일루수만 사용하는 미트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다. 즉 이 미트는 지금 저기 덕아웃에서 불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규혁 선배의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다, 4회가 끝나고 내가 감독님에게 찾아가서 한 이야기가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다.

“감독님 저 공 던지는데 어깨가 조금 뻐근한데요.”

“뭐? 어디가? 여기가?”

열 개 구단 스카우트가 모여있는 경기다.

설마 어느 미친 투수가 꾀병을 부릴까.

감독님은 나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얼마나 불편한 거야? 병원 가야 할 정도야?”

“아뇨, 그 정도는 아닌데. 그때 왜 감독님이 불편하면 바로 말씀하라고 하셨었잖아요? 타격 할 때는 괜찮았는데 공을 던질 때는 약간 뻐근한 느낌이 있네요.”

“흐음······. 그래?”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내가 타격을 계속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크게 아픈 건 아니다. 하지만 공을 던지고 싶지는 않다. 뭐 이런 어필의 일종이었다. 게다가 사실 그냥 참을만하면 1이닝 더 던지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자주자주 어필을 해둬야 나중에 왕중왕전과 같은 토너먼트에서 무리를 시키지 못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감독님의 선택은 나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그러면······. 그래, 이렇게 하자. 오늘 수원이 네 타격이 너무 좋으니까 이대로 빼기는 좀 그렇고. 규혁이가 빠지고 수원이 네가 일루에 들어가는 걸로 하자.”

“네?”

“뭘 그리 놀래? 어차피 내야 수비 연습은 종종 해봤잖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일루를 보려면 미트가 필요하잖아요. 제가 딱히 그거 준비된 것도 없고.”

“규혁아, 너 미트 쓰던 것 좀 줘봐라.”

아니, 아버지. 대체 감독님께 봉투를 얼마나 두툼하게 드렸길래 감독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게 만드시는 겁니까······.

규혁 선배가 감독님의 이야기에 별말 없이 자신의 미트를 가져다 나에게 건넸다.

분명 별말은 없는데 이상하게 야구 유니폼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매우 위협적이다. 이 선배 키가 나보다 10cm는 작은데 몸무게는 나보다 거의 20kg은 더 나간다. 멍게 놈이야 인상을 써도 그리 무섭지 않았는데.

와, 이 선배는 좀 무섭네······.

아무튼 그리하여 결국 난 규혁 선배의 미트를 손에 끼고 일루에 올라왔다.

***

“여기서 지명타자를 소멸시키다니. 중앙고의 감독도 제법 과감하네요.”

“아직 고교야구니까. 게다가 지금 백하민이 공략하는 게 최수원 뿐이기도 하고. 게다가 어쩌면 지금 마운드에 올라오는 중앙고의 저 투수도 지금 내려간 일루수보다 타격이 더 좋을 수도 있어.”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보통 투수는 재능있는 선수를 시키는 법이니까요.”

모든 오래된 것들이 그러하듯 야구의 룰은 매우 복잡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심플했던 룰이 시간에 따라 보완에 보완을 거듭하면서 누더기가 되고, 그렇게 누더기가 된 룰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또 존중 받는다. 지명타자와 관련된 룰 역시 그러했다.

최초의 야구는 지명타자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선수는 수비와 공격에 모두 가담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1973년 아메리칸 리그에서 최초로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이래 52년이 흐른 지금 지명타자를 사용하지 않는 리그는 이제 저기 바다 건너 일본에 센트럴 리그가 유일하다.

아무튼 현재 KBO와 그 영향을 받는 고교야구리그의 규정에 따르자면 선발 투수가 지명 타자로 출전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경우 투수가 교체되면 교체된 투수도 지명타자로 나가야만 한다.

오래된 규칙에 따르자면 지명 타자로 뛰던 선발 투수가 투수 역할만 내다 버리고 지명타자로 계속 뛰는 것은 규칙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식 규칙이었다면 굳이 최수원이 일루수를 볼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죠.”

“오타니 룰?”

“네.”

“아서라. 아서.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하지만 덕분에 최근에 마이너에는 제법 괜찮은 투타겸업 선수들이 나오고 있잖아요.”

“그 대신 그보다 훨씬 많은 유망주들이 갈려 나가고 있지. 백 년 넘게 못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투수 하나만 해도 롱런 하기 힘든 게 현대 야구인데 투수랑 타자를 같이하겠다고? 가뜩이나 인재풀도 좁은 KBO 같은 곳에서 그런 짓 시켰다가는 고등학교 레벨에서 애들 죄다 갈려 나갈 거다.”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

그리고 잘하는 놈이 계속 뛰게 내버려 두면 유망한 놈들은 죄다 일찌감치 작살이 나버린다. 그것이 메이저리그에 오타니 룰이 정착된 지 3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KBO가 오타니 룰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였다.

***

멍게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멍게, 그러니까 안병영은 중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법 이름 높은 유망주였다. 뭐, 세계대회에 나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120후반대의 속구에 커브와 슬라이더까지 그럭저럭 존에 넣을 줄 아는 투수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성장이 멈췄다는 점이다.

중3 때 키가 지금 키라고 하는데 솔직히 투수 사이즈로 173cm는 너무 작은 키다. 물론 작은 키로 강속구를 던진 투수가 없는 건 아닌데, 멍게의 경우는 해당이 없다.

고1 때 최고 구속 132km/h를 찍었다는데 지금도 여전히 최고 구속은 132km/h다.

물론 그래서 멍게가 나쁜 투수냐? 하면 뭐 또 그런 건 아니다.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충분히 쓸만한 투수다. 본인도 자기 구속이 안 되는 걸 알아서 변화구에 힘을 쓴 덕분에 지금은 속구뿐만 아니라 슬라이더와 커브까지도 존 안팎으로 넣고 뺄 줄도 안다. 그것도 가끔 컨디션 좋은 날에는 거의 100%다.

타석에 천남고의 1번 타자가 들어왔다.

이번 경기 세 번째 타석이었다.

멍게 녀석 얼굴에는 비장미가 가득하다. 뭐, 이번 경기에서 스카우트들 눈에 띄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게 너무 뻔하다.

‘에휴······.’

싫어하는 놈이기는 하지만, 또 저런 불가능한 기대를 품고 있는 걸 보니까 안쓰럽다. 하여간 나는 꼭 이런 쓸데없는 부분에서 마음이 여려진다니까.

녀석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부드러운 투구 폼.

존 바깥으로 살짝 빠지는 슬라이더였다.

-딱!!

타자의 방망이가 흘러나왔다.

일루 쪽. 그러니까 내 쪽이었다.

스핀이 제대로 먹힌 타구가 라인 근처를 두들기고 크게 튀어 올랐다. 최종 낙구 지점은 파울 라인 밖이다.

하지만 이거 페어볼이다. 심지어 처리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공이다.

“아!!!”

그래, 만약 내가 그냥 평범한 땜빵 일루수였다면 말이다. 나는 이래 봬도 KBO에서 무려 일곱 시즌이나 일루수로 뛴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골든글러브만 무려 다섯 개다.

물론 메이저에 가서는 1루 수비가 불가능한 폐급 판정을 받긴 했지만······. 뭐라더라? 몸이 너무 둔하고 유연성이 떨어진다나?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무려 40kg이나 날씬할뿐더러 가동범위 역시 그때보다 훨씬 좋다.

아······. 근데 말하고 보니 이건 날씬한 게 아니라 진짜 거의 기아 상태네······.

아무튼 낙구 예상지점으로 성큼성큼 달려가 미트를 쭉 내밀어 떨어지는 공을 캐치했다. 미트가 조금 뻑뻑해서 공이 미트 안에서 헛돌긴 했지만 그래도 튕겨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가볍게 공을 잡아서 커버를 나온 멍게 녀석의 글러브에 정확하게!!

-뻐엉!!

“아웃!!”

아, 그래. 정확은 아니었다. 아주 조금 벗어났다. 하지만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백 점 만점의 수비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나저나 확실히 어깨가 좋긴 좋다. 대충 던진 공도 벼락처럼 날아가 꽂힌다.

수비가 인상적이어서였을까?

아니, 그보다는 그냥 오늘 내가 워낙에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탓일지도······.

스카우트들이 또다시 들썩거렸다.

“뭐야, 저걸 저렇게 간단하게 처리한다고? 저 녀석 평소에 야수도 봤었나?”

“아뇨, 왕중왕전 기록까지 다 봐도 그런 적은 없습니다.”

“중학교 기록!! 중학교 기록도 좀 살펴봐. 이왕이면 연습경기까지 전부 다.”

물론 일루수는 모든 야수 가운데서 가장 수비 가중치가 낮다.

공용 스탯을 기준으로 보면 풀시즌 전 경기를 지명타자로 출전했을 때 WAR을 1.75 감한다면 일루수는 1.25를 감한다. 참고로 저기 앉아서 공 받는 녀석은 1.25를 더한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평가받을 만큼 일루수의 수비는 모든 야수 가운데서 가장 쉽다. 몸을 불리기도 괜찮은 포지션이고. 괜히 거포형 타자들이 말년에 지명 타자 아니면 일루수로 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쨌거나 야수는 야수다. 아무런 연습 없이 이만한 수비를 보여주는 건 쉽지 않다. 아마도 스카우트들의 머리가 제법 복잡해지지 않았을까? 150을 던지는데 이렇게 홈런을 뻥뻥 쳐대고 심지어 일루 수비까지 잘 본다고?

아,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머리가 복잡해진 것은 스카우트들이 아닌 것 같았다.

안병영.

저 멍게 자식. 복잡한 눈동자를 좀 봐라. 지가 마운드에 올랐는데도 여전히 내가 주인공인 것 같아 화는 나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나이스한 수비를 보여준 걸 뭐라고 할 수도 없다. 뭐 그런 거겠지?

멍게 녀석의 입이 열린다.

그래, 그거다. 어서 칭찬해라. 나이스 캐치였다고 나에게 칭송과 감사를 표해봐라. 이 멍게 녀석아.

“야, 최수원. 너 송구 똑바로 못 하냐?”

“······.”

아······.

어, 음······.

그래. 남자답게 쿨하게 이건 인정하겠다. 아무리 나라도 여기까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대단한 미친놈 같으니라고. 이렇게까지 나의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다니.

그래 좋다. 이 정도는 돼야 그래도 나 최수원 인생 최초의 빌런 자격이 있지.

5회 초 원아웃 주자 없는 상황.

멍게 놈의 피칭이 계속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