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3)
“백하민 저 새끼 저거 또 삘 받았네. 눈에서 아주 레이저 나오겠다.”
“그럴 만도 하지. 기억 안 나냐? 봄에 뉴월드 배 준결승에서 떨어지고 슬라이더만 졸라 연습했던 거? 게다가 저 미친놈 저거 졸업할 때까지 무실점이 목표였잖아.”
“하여간에 성격은 저렇게 좋은 놈이 어떻게 마운드에만 서면 저렇게 승부욕의 화신이 되는 건지. 야구에서만큼은 지는 걸 못 참는다니까.”
“그러니까 저만큼 하는 거겠지.”
백하민을 아는 이라면 백이면 백 그 인성을 칭찬한다.
솔선수범하며 착하고 예의 바르다.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천성이 솔선수범을 좋아하고 착하고 예의 바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백하민은 그저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백하민은 자신이 프로에 갈 재능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단순히 야구에 국한되지 않았다.
체육을 하는 아이들은 또래의 아이들과 체격 자체가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에 운동을 시작하는 아이들 대부분은 거기에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에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가 남들 공부하거나 피씨방가서 게임할 시간에 죽어라 운동만 한다. 그런 만큼 나쁜 유혹에 빠지기도 쉬웠다. 힘이 있다는 것은 본래 그런 의미니까.
하지만 백하민은 달랐다.
일진이니 이진이니 하면서 학교에서 장난질 치는 것들? 그저 우스웠다.
체육을 한다면서 거기에 어울려 노는 것들? 그저 한심했다.
그 어린 시절부터 그는 훗날 프로가 되어 성공했을 때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백하민은 매우 모범적인 삶을 무려 6년이나 이어왔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런 가식적인 태도를 벗어던져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운드였다.
물론 세상 어느 스포츠가 똑같겠냐마는 야구에는 보통의 팀 스포츠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부분이 존재한다. 바로 모든 경기가 결국 타자와 투수. 개인과 개인의 일대일 대결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등판하는 날의 선발 투수만큼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래, 선발 투수는 왕이다. 적어도 그날의 경기만큼은.
백하민이 마운드에 서서 타자를 내려다봤다.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들기는 녀석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몇몇 꼰대들이 본다면 2학년 주제에 겉멋만 잔뜩 들었다고 그러겠지만 야구에 나이가 어딨겠는가. 공 잘 치는 타자는 저 정도는 해도 괜찮다.
그래, 나는 너의 실력을 인정한다. 비록 실투라고는 하지만 무려 나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는 타자는 흔치 않다.
“전력으로 상대해주지.”
각오를 굳힌 백하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
뭐가 올까?
속구? 슬라이더?
물론 별로 고민거리는 아니다.
내가 그래도 짬밥이 있는데 하다못해 KBO도 아니고 2군에 가도 에이스 놀이 하기 힘든 고등학생을 상대로 어떤 공이 올지를 치열하게 고민할 짬밥은 아니지.
-딱!!!
이건 그저 뭐랄까? 이건 그냥 투수의 성향이 어떨까? 뭐 그런 사소한 궁금증 정도일 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배트를 내던지고 일루를 향해 달렸다. 마운드에 선 백하민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저 뒤편에 선 스카우트들은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두 타석 연속 초구 홈런.
그래도 1회에는 덕아웃에 얌전히 앉아있다 나를 반겨줬던 조유진이 홈플레이트까지 무섭게 달려 나와서 헬멧을 두들겼다.
“최수원!! 이 미친 새끼!! 뭐야? 너 최수원 맞아? 어디 가서 뭐 박가람한테 타격 레슨이라도 받은 거야?”
“뭐라는 거야. 야, 아프니까 저리 치워. 메이저리그도 아니고 주말 리그에서 홈런 친 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 난리야.”
박가람에게 타격 레슨?
물론 그 선배가 작년 KBO 홈런왕에 올해도 매우 유력한 건 맞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내후년까지다. 나는 프로 2년 차부터 MLB로 떠나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홈런왕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다.
“와, 뭐냐. 최수원.”
“뭐가?”
“주말 리그 따위에서 홈런 친 게 뭐 대수냐니. 존나 멋있네. 야 니들도 다 들었지. 방금 최수원이 했던 말.”
“잘난 척 같아서 좀 재수 없긴 한데, 두 타석 연속으로 홈런 날리고 와서 하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네.”
“야, 저 정도면 잘난 척이 아니라 그냥 객관적으로 잘난 거지.”
아무래도 두 타석 연속 홈런이었기 때문일까? 첫 타석에서 홈런 쳤을 때는 그래도 안병영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축하 몇 마디 건네던 녀석들이 이번에는 흥분해서 죄다 달려왔다.
이런 걸 보면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이다. 확실히 아직 순수한 면이 남아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 멀지 않은 불펜. 얕은 담장 너머로 여전히 뜨거운 멍게의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것은 멍게만이 아니었다.
저 뒤편에 모인 스카우트들 역시 여간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뭐, 초구 홈런 한 번 정도야 우연으로 넘길 수 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일 년 넘게 피홈런 하나 허용하지 않는 드래프트 1라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게 두 번 연속 반복된다?
“야, 당장 최수원 타격 기록 찾아봐. 어, 공식전 말고. 연습경기까지 전부. 그리고 타격폼 영상 찍어둔 거 있으면 준비해놓고. 여기 꺼도 찍어갈 테니까. 아이참. 다르다니까 그러네. 지금 백하민이 상대로 두 타석 연속 홈런을 쳤어. 그것도 2구 연속으로.”
“뭐? 투구 영상? 아니, 타격 영상이 필요하다고 타. 격. 영. 상!!! 뭐? 뭐라고? 타격 영상 찍어둔 게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최수원이 3할 타자잖아. 근데 왜 구단에 타격 영상 찍어둔 게 없어!!”
열 개 구단 스카우트들이 여기저기 급하게 전화를 걸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저건 무조건 나와 관련된 전화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2타석 연속 홈런이다. 아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참고로 올해 뉴월드 빅마트배 전국대회 최다 홈런이 2홈런이다. 애당초 고교야구에서는 홈런 자체가 잘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중학교까지 알루미늄배트를 사용하다 고등학교로 넘어온 애들이 홈런을 쳐봐야 얼마나 치겠는가. 보통 그 해에 최다홈런이라고 해봐야 전후반기 주말 리그에 모든 토너먼트 다 합쳐서 4~5홈런 정도가 고작이다. 나무 배트를 사용한 이후 역대 최고 기록이 아마 여덟 개였던가?
그런 상황에서 드래프트 1라운드가 확실한 투수를 상대로 2타석 연속 홈런이면 저런 호들갑이 나올 만도 하다.
“김 대리, 방금 백하민 던진 공 좋았지?”
“네, 엄청 좋았죠. 꽉 찬 인코스 150.3km/h 속구였습니다.”
“우리 팀 선수 중에서 저거 들어오면 저렇게 담장 너머로 날릴 선수 몇이나 될까?”
“글쎄요. 아무리 150이라고 그래도 고등학생이 던진 속구고 타이밍만 잘 맞추면······. 너댓 명?”
“김 대리, 너 우리 팀 선수들을 조온나 사랑하는구나.”
“네, 제가 좀 그런 편이죠.”
“헛소리 그만하고 서울 올라온 김에 시간 내서 중앙고 한 번 들르자. 내일 기차표 연기 가능 하지? 3시간만 연기하자.”
조용히 덕아웃에 앉아 어깨에 투수용 점퍼를 덮어썼다.
그래도 조유진 저 녀석 아직 개념은 남아있었는지 헬멧을 두들기는 와중에 오른팔 쪽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운드에 선 백하민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 이해한다. 솔직히 투수했던 것이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나도 한 타자에게 2타석 연속으로 초구 홈런을 두들겨 맞는다면 충격이 컸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봤을 때 지금 백하민이 홈런을 맞은 공은 아마 던진 직후에는 스스로 만족했을 그런 공이었다. 코스도 좋고 구속도 좋았다. 쯧, 이거 괜히 열심히 하는 어린 애한테 너무 끔찍한 기억을 남겨준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부웅!!
“스트라잌!!!”
초구 슬라이더.
헛스윙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녀석이 우리 덕아웃을 바라봤다. 아마 나를 바라보는 거겠지? 이거 뭐, 눈에서 레이저라도 쏠 것 같은 기세다.
덕분에 올라오던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쑥 들어갔다. 물론 녀석이 건방지다거니 괘씸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런 녀석에게는 고작 이런 걸로 미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가끔 투수 놈들 가운데는 두들겨 맞으면 기가 죽어서 실력을 발휘 못 하는 놈들이 있다. 나는 그런 놈들을 개복치 같은 놈들이라고 부른다. 보통은 큰물에서 놀기 힘든 유형으로 선발 투수 중에는 정말 보기 드물고, 일단 호구를 잡으면 시즌 중에 슬럼프 탈출용으로 제격인 놈들이다.
반면 저런 녀석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바락바락 기어 올라온다. 언제 두들겨도 두들기는 재미가 있는 유형이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보건대 저런 놈은 크게 된다.
-부웅!!!
“스트라잌!!!”
물론 그건 어디 안 다치고 무사히 커리어를 이어갈 때 이야기다.
그래서 백하민 쟨 어떻게 됐더라?
“부웅!!”
“스트라잌!! 아웃!!”
네 번째 이닝.
너무 짧게 덮고 있던 점퍼를 벗고 내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
세상은 불합리하다.
안병영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의 귓가에는 아직도 그날의 협박이 생생했다. 물론 정확한 워딩이 생각난다는 것은 아니다. 얼추 느낌적으로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야구 안 해도 그만인데, 너는 어쩌려고 그러냐? 무릎 꿇고 야구 하고 싶다고 빌어봐. 혹시 알아? 그러면 내가 용서해줄지. 병신아.”
개자식.
그것은 안병영으로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폭언이었다.
어떻게 감히 하늘과 같은 선배에게. 물론 안병영 자신이 최수원에게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쿠사리를 줬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거야 다 후배를 생각하는 따듯한 선배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어디 안병영 자신만 그랬던가. 애당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가 보기에 팀에서 최수원 그 새끼한테 좋은 감정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
당연하다. 세상 어느 미친놈이 감독한테 봉투 건네는 새끼를 좋아할까.
“굿 볼!! 굿 볼!! 수원아. 침착하게 가자. 침착하게.”
어림없이 빗나간 공을 쥐고 조유진이 녀석을 살살 달랬다. 하여간 저 녀석도 참 고생이 많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순수하게 성적만 놓고 본다면 안병영 자신이 저 녀석에게 뒤질 것이 뭐 있을까.
구속만 150km/h이면 뭐 하는가.
봐라.
-뻐엉!!
주자 1, 2루.
최수원이 볼넷으로 또 두 타자를 연속으로 출루시켰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일이다. 저러다가 장작 실컷 쌓아놓고 교체되면 죽을고생하는 건 결국 안병영 자신이다. 어차피 저럴 거 그냥 확 두들겨 맞고 빨리 마운드에서 내려왔으면 좋겠다.
-딱!!
하지만 원아웃 주자 1, 2루에서 병살타.
‘운도 좋은 새끼.’
최수원이 수비의 도움으로 꾸역꾸역 이닝을 막아냈다.
그리하여 4회까지 투구수는 벌써 84개. 뻔했다. 아마 오늘도 5회까지 던지고 승리투수 요건은 챙긴 다음 마운드를 넘기겠지.
젠장.
기회가 필요하다. 모두의 눈에 확 띄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병영아, 준비해라.”
“네?”
“‘네?’는 무슨 ‘네?’야. 공 안 던질 거야?”
5회 초.
열 개 구단 모든 스카우트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