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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9화 (9/305)

9화.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2)

타자에게 루틴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일단 내가 메이저에 갔던 2033년 늦겨울의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참 추운 겨울이었다. KBO 최고의 타자로 말 그대로 리그를 폭파시키고 미국에 건너가던 당시 나는······(중략)······해서 결국 지명타자로 성공했다. 이렇듯 놀랍게도 단순히 타자는 수비에 나가다가 나가지 않게 되는 것만으로도 타격 성적이 뚝뚝 떨어질 수 있다.

타석에 들어서서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마운드의 투수가 보였다.

고요하다.

아, 물론 진짜로 경기장이 고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집중력이 그만큼 올라가서 마치 고요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백하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제법 역동적인 폼이다. 그의 손끝에서 하얀 공이 강하게 뽑혀 나온다.

나쁘지 않다.

-딱!!

그래. 뭐, 나쁘지는 않다.

***

백하민이 이번 드래프트 최대어인가를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스카우트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이번 드래프트 탑 쓰리 안에 들어가는 투수인가를 묻는다면 단언하건대 그걸 부정할 스카우트는 없을 것이다.

179cm에 79kg.

사이즈는 조금 작았지만 전신의 탄력을 모조리 활용한것 같은 최고 151의 역동적인 강속구.

체력과 투지 역시 가장 최근의 토너먼트 경기였던 뉴월드 빅마트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통해 입증됐다.

토너먼트 2차전과 4차전에서 각각 75개씩 던지고 6차전에서 105개를 던지면서도 마지막까지 구속이 145를 웃돌았다.

2025년 현재. 프로와 아마의 수준 차이가 크게 벌어진 지금 프로에 오자마자 당장 활약할만한 투수는 흔치 않다. 하지만 많은 스카우트들은 입을 모아 저 백하민이라면 슬라이더만 조금 교정해주면 불펜 정도로는 바로 활용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스카우트들의 시선이 모두 마운드의 백하민에게 모였다.

한껏 응축된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149km/h의 강속구.

서너 개의 연습구를 지켜본 스카우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폼이 역동적이야.”

“저런 폼으로도 제구가 잡히니 그게 신기할 노릇인거죠. 최수원이에 비하자면······.”

“뭐, 최수원이도 나쁘지는 않지. 아직 한 살 어리잖아. 저맘때 일 년이면 어휴.”

“그보다 최수원 걔는 너무 삐쩍 말랐어. 일단 몸부터 키워야지.”

“사이즈는 백하민이 더 작잖아요.”

“뭐, 백하민이도 마르긴 했지만 키가 다르잖아. 게다가 쟨 보여준 게 있잖아. 이번에 저 녀석이 뉴월드배 준결승에서 80개 던지고 7회에 또 올라와서 150 던졌었지?”

“150은 아니고 149.3이요.”

“그 정도면 거의 150이지 뭐. 속구 위력은 이미 프로급이야. 제구 조금만 더 잡고, 슬라이더만 제대로 교정하면 당장 써먹을 수도 있겠어.”

그리하여 스카우트들이 가져온 모든 카메라가 오직 백하민만을 주목하는 상황.

그 속에서 그가 힘껏 공을 뿌렸다.

-따악!!

‘응?’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나도 깨끗한 타격음.

오직 백하민에게 주목하던 스카우트들이 뒤늦게 시선을 돌렸을 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최수원의 자연스러운 팔로스로우 뿐이었다.

가볍게 내던진 방망이가 타석 측면을 나뒹굴었다. 굳이 타구를 오래 살피지도 않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가벼운 뜀박질.

선두타자의 초구 홈런이었다.

“김 대리야, 방금 이거 뭐냐? 백하민이 실투였냐?”

“그게 약간 몰리기는 했는데 그래도······.”

“구속은?”

“146.7이었습니다.”

“백하민이가 지금까지 피홈런이 몇 개지?”

“1학년 때 2개 맞았고 2학년 이후로 지금까지는 피홈런 0개입니다.”

“그러면 최수원이는 지금까지 홈런 친 적 있었나?”

“그게 그러니까······. 아!! 작년에 한 개. 그리고 올해는 이게 처음입니다.”

스카우트들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기록을 살필수록 나오는 결론은 그저 백하민의 몸이 아직 덜 풀렸고, 몰린 공이 우연히 정타를 맞았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상위 타순인 1번에 위치한 것만 봐도 알다시피 최수원의 타격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야구는 본래 잘하는 놈이 잘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의 스타일은 장타자라기보다는 교타자다.

“그러면 잘됐네. 이걸로 의외의 상황에 처했을 때 대처도 살펴볼 수 있겠어.”

그렇기에 대부분 스카우트들은 그저 그 홈런을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한 사람. 김 대리라 불렸던 그 뚱뚱한 사내는 그라운드를 천천히 뛰고 있는 최수원의 모습에서 조금 전 그가 마운드에 섰을 때보다 더 커다란 괴리감을 느꼈다.

“아, 진짜 이상한데······.”

“김 대리!! 너 자꾸 딴 짓 할 거야?”

“아, 네넵!! 팀장님 죄송합니다.”

***

딱 좋은 공이었다.

원래 배팅볼도 어설프게 들어오는 배팅볼이 더 구린 법이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면 2035년인가 메이저리그 첫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당시 나는······(중략)······해서 결국 2036년에 홈런왕을 차지했는데 그때 배팅볼 투수로 나를 도와줬던 앤더슨 녀석의 배팅볼이 딱 지금 이 정도 공이었다.

가볍게 홈플레이트를 밟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와, 최수원 운빨 완전 미쳤네. 여기서 대뜸 하민 선배한테 홈런을 뽑아낸다고?”

조유진이 가장 먼저 달려와 소리쳤다. 이 녀석이 내가 알기론 중학교 때 백하민과 같은 중학교였다.

녀석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역시 한 마디씩 축하를 건넸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저기 불펜에서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안병영 녀석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여길 지켜보고 있는 까닭이었다.

뭐, 저 멍게 녀석은 분명 약속을 지켰다. 그날의 일을 시시콜콜하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녀석이 새사람이 됐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세상에나 사내 새끼가 뒷담을, 뒷담을 어찌나 까고 다니던지.

그런 와중에 조유진 이 녀석만 눈치 없게 나에게 와서 친한 척을 계속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 눈치 없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야, 하민 선배 재작년에 홈런 맞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맞았는데. 뽀록이라고 해도 하필 오늘 스카우트들 바글거릴 때 이런 꼴을 당하냐. 이러면 아무리 하민 선배라도 좀 흔들릴 수밖에 없겠는데?”

“글쎄다.”

녀석의 이야기에 내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부웅!!

“스트라잌!!”

그래 물론 멘탈이 좀 흔들리긴 할 거다. 평상시라고 해도 선두타자 초구 홈런을 처맞으면 멘탈이 흔들리는 게 정상이다. 게다가 벌써 1년이 넘도록 공식 경기에서 홈런 한 번 허용한 적 없고 심지어 스카우트들까지 잔뜩 모인 자리에서 홈런을 맞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면 그건 멘탈 만으로도 메이저리거 감이다.

-뻐엉!!

“스트라잌!!”

하지만 문제는 그래서 그렇게 멘탈이 흔들렸다고 백하민이 우리 타자들이 공략을 할만한 투수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부우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으로 시작해서 마무리까지 시원하게 헛스윙으로 끝내버리는 깔끔한 삼구삼진.

마지막 슬라이더는 각이 꽤 날카로웠다.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꽤 쓸만했고 적당히 갈고 닦으면 프로에서도 충분히 먹힐만한 수준이다. 확실히 1라운드 상위픽으로 꼽히는 실력답다.

그리고 내가 이번 경기는 스카우트들 잔뜩 보는 앞에서 내가 밀어내기 볼넷으로 2점 내줬던 경기라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 백하민은 7이닝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다가 투구 수 채우는 바람에 내려갔고, 덕분에 우리가 8회랑 9회에서 점수를 좀 내서 역전승했었다.

이어지는 3번 타자 영진 선배. 그래도 클린업 트리오의 첫 번째인 만큼 팀에서 타격이 제일 괜찮은 타자 중 하나다.

-딱!!

봐라. 앞선 타자의 어림없는 헛스윙 삼구 삼진과는 다르다.

그래도 방망이가 공을 건드리긴 건드린다.

정확한 유격수 앞 땅볼.

영진 선배가 최선을 다해 달려보지만 어림없다. 아무리 고교야구의 내야 수비가 프로보다 엉망진창이라고 그래도 이 정도로 깔끔하게 들어갔으면 더 볼 것도 없다.

“아웃!!”

결과적으로는 더 안 좋았지만 그래도 공을 건드리긴 건드렸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이어지는 4번 타자.

규혁 선배다. 비록 야구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동네에 체육관 하나 크게 내는 선배다.

확실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지금도 키는 고작 179cm인데 몸무게가 101kg. 근데 체지방이 19%가 안 된다.

감각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저 막대한 근육에 담긴 어마어마한 힘은 일단 맞기만 하면 쭉쭉 뻗어나가는 배럴 타구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부웅!!

“스트라잌!!”

스카우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슬라이더가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확실히 선두타자 초구 홈런은 그냥 몸이 덜 풀려서 일어난 사고였던 것 같군.”

이 구째.

-부웅!!

“스트라잌!!!”

규혁 선배가 잠시 손을 들고 타석에서 물러나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살벌하다.

저 배트는 맞으면 그대로 담장을 넘겨 버릴 것 같은 파괴력이 담겨 있다.

“뉴월드 배 준결승에서 백하민이 마지막에 적시타 허용했던 공이 슬라이더였죠? 그때에 비하자면······. 확실히 발전이 빠른 선수네요.”

그리고 삼 구.

-뻐엉!!!

“스트라잌!!!”

놀랍지도 않았다.

규혁 선배는 그 대단한 파괴력을 발휘할 틈도 없이 깔끔하게 삼자범퇴.

그리하여 우리 중앙고의 공격 이닝이 내 홈런을 제외하면 정확하게 공 일곱 개만에 끝났다. 이것 참······. 도무지 어깨가 식을 틈도 없다. 입고 있던 투수용 점퍼를 그대로 벗고 다시 마운드로 걸어 나갔다.

“변화구 두 개 연속 던져서 0-2 만들고 곧바로 존 안에 149짜리 속구를 던지다니. 심리전도 제법이네요.”

“글쎄, 그보다는 자신감이겠지. 공격적으로 피칭해도 자기 공을 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 확실히 멘탈이 훌륭해. 스카우트들 이렇게 몰려 온 경기에서 기습 홈런을 맞고도 저렇게 금방 수습하다니 말이야.”

열 개 구단의 스카우트들이 바쁘게 뭔가를 적어나갔다.

두 번째 이닝.

그리고 세 번째 이닝.

드디어 스카우트들의 예상대로 경기가 명품 투수전으로 흘러갔다.

백하민은 단 하나의 타자도 일루를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 역시 단 하나의 타자도 삼루까지 밟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수능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어도 무려 17년을 손에서 놨으면 수능 올 1등급 만점자도 3등급 나오면 잘 나온 거다.

이거 변명이 아니라 진짜다.

아무튼 그리하여 3회 말.

또 한 번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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