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1)
유치원 때부터 고3까지 거의 14년 정도를 오직 수능만을 위해 달려온 사람 A가 있다. 공부에 재능도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해서 올 1등급 맞을 정도의 성적도 나왔다. 근데 그 사람이 수능 이후로 17년 정도 공부를 쉬었다.
자, 여기서 문제.
그러면 그 사람 A가 다시 수능을 본다면 성적은 얼마나 나올까?
-뻐엉!!
조유진이 화급히 미트를 움직였다.
조금 빠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제법 아슬아슬했는데 이 정도라면?
“스트라잌!!”
초구 스트라이크.
좋았어.
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몇 킬로야?”
“150킬로”
“초구부터 150킬로라고? 와, 확실히 성장기는 성장기네. 저 녀석 작년에 최고 구속이 150 아니었나?”
“그랬지. 저 녀석 잘하면 전체 1번도 가능하겠는데?”
“왜? 내년에 엘리츠에서 데려가게? 3년 후면 마린스에 일루수 빠질 텐데 거포 유망주 데려가야 하지 않나? 아, 혹시 올해 데려갈 생각인가?”
“무슨 헛소리야. 전체 1번인데 우리가 왜 데려가. 우리 지금 7위야. 7위. 그리고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저 멀리 스카우트들이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떠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웅성거림에 제법 큰 걸 보면 구속도 제법 나온 것 같다.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던 천남고의 1번 타자가 장갑을 다시 꽉 묶고 타석에 섰다.
배트를 짧게 쥔 것에서 어떻게든 쳐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확실히 배트를 짧게 쥐면 임팩트 지점이 빨리 오는 만큼 확실히 속구에 대처가 좋아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일종의 인정이다.
투수가 던진 공이 너무 엿 같아서 도저히 그냥은 못 치겠다는 타자의 고백인 셈이다.
저걸 보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내가 메이저에 막 갔던 당시 팀에 그렉 올슨이라는 노장이다. 나랑 삼 년을 같이 뛰었는데 아마 은퇴 할 당시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메이저에서는 서비스 타임 꽉 채우고 몇 년 더 선수 생활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선수라는 의미다. 실제로 그렉 올슨은 전성기에 20홈런 150안타 시즌도 두 번이나 있었던 내야수였다. 17년 커리어 통산이 201홈런에 1503안타였나? 아무튼 그 양반이 시즌 막판쯤 되면 100마일 이상 던지는 투수들 상대로는 항상 배트를 짧게 잡았었다. 아, 그러면 바깥쪽 공에 취약해지는 거 아니냐고?
“자, 스완. 생각해보라고. 애당초 백 마일이나 던지는데 커맨드까지 좋아서 바깥쪽 안쪽 자기 마음대로 던지는 투수가 얼마나 될까? 장담하건대 전 세계 통틀어서 다섯 명도 안 될 걸?”
그렉 올슨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백마일을 던지는데 존을 2분할쯤 해서 원하는 곳에 쏙쏙 집어넣을 수 있는 투수는 리그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는다. 설사 백 마일이 아니더라도 존을 4분할 해서 사용한다? 리그 평균 수준의 공만 던질 수 있어도 그게 바로 사이 영 컨텐더급 투수다.
그렇게 방망이를 짧게 잡고 타석에 바짝 붙어선 그렉 올슨은 존 바깥쪽으로 공을 붙이려 노력하는 투수들에게서 종종 볼넷을 얻어내곤 했다.
그리고 나는 똑똑하게 기억한다.
그 특별한 몇몇의 투수를 제외하고. 그렉 올슨이 더 힘들어 했던 투수는 어떤 유형이었는지를. 그건 바로 타자가 방망이를 짧게 잡고 타석에 바짝 붙어 섰음에도 쫄지 않고 백마일 짜리 공을 욱여넣던 투수다.
글러브에 공을 가볍게 매만졌다.
불펜에서 나를 지켜보는 멍게 녀석의 시선은 여전히 뜨겁다.
크게 와인드업했다. 움츠린 몸에 힘이 모인다. 한계를 넘어가는 관절의 운동. 둔근에서 시작하여 전신의 힘이 오른손 손가락 끝에 모이는 이 감각.
날카롭게 챈 공이 공기를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스트라이크 존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공.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배짱도 좋네. 몇 킬로나 나왔어?”
“149.”
프로와 아마를 가르는 기준은 간단하다. 돈을 받고 하느냐, 아니면 돈을 내고 하느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돈을 받는 선수가 될 수 있을까? KBO에서 뛸 때를 기준으로 우리는 이런 기준을 이야기 했었다.
‘한복판에 150 속구가 왔을 때 그걸 두들겨서 저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말은 그래도 프로라면 150 속구가 한복판에 오는 걸 알면 날려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프로가 아니라면 150짜리 속구가 한복판에 들어오는 걸 알아도 날려 보내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타자의 얼굴에 초조함이 엿보인다.
스카우트들이 부지런히 뭔가를 적어 내려가는 것이 압박으로 다가오겠지.
이해한다.
원래 아무리 대범한 인간도 면접관 앞에 서면 어버버하는 것이 사람이다. 아, 평생 면접도 한번 안 봤던 녀석이 그런 건 어떻게 아냐고? 물론 난 면접을 본 적이 없다. 이건 내가 생애 첫 기자회견 조지고 맥주 한 캔 깠을 때 당시 만나던 누나가 해준 이야기다.
아무튼 볼카운트 0-2
상대 타자는 머리도 멍하고, 이제 뭘 어째야 할지도 모르겠는 상황.
그리고 이럴 때는 당연히
-뻐엉!!!
“스트라잌!! 아웃!!”
한복판 속구다.
“151킬로. 이번엔 코스도 좋았어.”
“뭐? 151? 와, 구속도 그렇고 제구도 그렇고. 저 녀석 오늘 컨디션이 좋은가? 저 녀석 원래는 공이 좀 날리지 않았어?”
“한창 클 때니까. 그나저나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야?”
“응? 뭐가?”
“아까 전만 하더라도 엘리츠에 데려가라느니 뭐라느니 하더니. 이제는 진짜 진지하게 욕심이 좀 나나 봐? 결점부터 늘어놓고.”
“크흠, 티 났어?”
“어. 언제나 그렇듯이 티 많이 났지.”
삼구삼진에 놀란 것일까? 스카우트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뭐, 확실히 이번 공은 놀랄 만하다. 던진 나도 놀랐으니까.
조금 높게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그냥 쎄게 던졌는데 의외로 낮게 제구돼서 무척 절묘한 코스로 들어갔다. 결과는 타자가 방망이도 제대로 못 내밀어본 채 루킹 삼진.
타석을 내려가는 타자의 안색이 영 좋지 않다.
단순히 스카우트들 보는 앞에서 루킹삼진을 당한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경기 내내 이런 공을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하나 눈앞이 캄캄해졌겠지.
그리고 그것은 뒤이어 올라오는 2번 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뻐엉!!
하지만 어림없이 빠지는 공을 조유진이 팔을 높이 들어 받아냈다.
크흠. 뭐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평생 수능을 공부했던 사람이라고 해도 한 17년 공부 안 하고 다시 수능 보면 성적이 잘 나오겠는가?
물론 그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무려 17년이나 마운드에 서지 않았다. 게다가 애당초 고등학교 때 한참 공 잘 던지던 시절에도 내 제구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초반에 공 세 개나 연속으로 정확하게 존 안에 들어간 것 자체가 놀랄 일이다.
피칭이 이어졌다.
선두타자와 마찬가지로 2번 타자 역시 내 공에 방망이를 스치지도 못했다. 다만 스치지 못한 것은 같았지만 그 결과는 조금 달랐다.
“제구가 잡힌 건 아닌가 본데?”
“언뜻 보기에도 릴리즈 포인트가 흔들리는 경향이 있구만. 뭐 코치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아무래도 데리고 가면 투구 폼을 고쳐야할 것 같아.?”
“내가 보기엔 살 좀 찌우고 몸만 조금 더 만들면 해결될 것 같은데?”
이번에도 역시 스카우트들이 웅성거렸다.
확실한 건 그 웅성거림의 대상이 볼넷으로 1루에 걸어나간 천남고의 2번 타자가 아닌 나라는 점이다.
그리고 타석에 3번 타자가 올라왔다.
백하민.
오늘 천남고의 마운드를 책임 질 에이스로 당장 넉 달 뒤에 있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로 뽑힐 확률이 매우 농후한 전국구다.
프로에서 이도류로 성공한 것은 오타니 쇼헤이가 유일하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 선수간의 실력차가 큰 고교야구를 살펴 보면 이도류는 매우 많았다. 그리고 백하민은 그 이도류 중에 하나로 오늘 천남고의 타자 가운데서 두 번째로 위협적인 타자다.
-부웅!!
“스트라잌!!”
백하민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공중을 갈랐다.
녀석이 혀를 내둘렀다.
“와, 150은 언제 봐도 무섭네. 근데 그러면 내 공도 이렇다는 건데 이거 치는 놈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물론 위협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레벨에서 이야기다.
솔직히 말해 앞선 타자들과 백하민. 나에게는 딱히 다를 것도 없다. 지금 마운드에 선 내가 싸우는 상대는 타자들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 멋있으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지금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있다.
스트라이크냐 볼이냐.
저 바다 건너 일본 만화를 보면 막 9분할씩 해대던데 나는 딱 2분할이다. 물론 스트라이크존을 2분할 한다는 게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을 노리고 공을 던져도 존에 공이 들어갈 확률이 절반이라서 2분할이다.
1회 초.
타자 다섯을 상대로 범타 없이 깔끔하게 3삼진 2볼넷.
17년 만의 피칭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
스카우트들이 모인 자리. 수십 개의 카메라가 마운드를 찍어대는 공간 뒤편에서 뚱뚱한 사내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이상한데······.”
“김 대리.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준비 안 해? 백하민 올라오잖아.”
“아니, 팀장님. 최수원 말입니다. 원래 저랬었나 싶어서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저랬냐니? 구속이야 아직 성장기니까 조금 더 빨라졌고 영점 덜 잡힌 것도 작년 그대로 잖아.”
“아니, 조금 묘해서요.”
“묘하다니? 뭐가?”
“그냥······. 느낌이 이전에는 공을 구석구석에 넣으려다가 볼넷을 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좀 욱여넣으려고 한다는 느낌이 드네요.”
김 대리라는 부하 직원의 말에 그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 말은 최수원 제구가 더 쓰레기가 됐다는 소린가?”
“네? 그게 무슨?”
“이전에는 그래도 제구 하려다가 볼넷이 나온 건데, 지금은 그냥 존에 넣으려고만 하는데도 볼넷이 나온다는 거니까. 아니야?”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뻐엉!!
“김 대리 뭐해!! 백하민이 공 던지는데 얼른 체크 안 하고.”
“아, 아. 넵!! 지금 합니다!!”
타석에 중앙고의 1번 타자 최수원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