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인생은 길다(1)
야구를 하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일단 내 몸의 정확한 사이즈를 재는 일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192cm에 87kg이었다. 근데 아무래도 그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사이즈인 것 같다.
“와, 미친······.”
키가 189.7인건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체중이었다.
“나 완전 멸치네······.”
아니, 사람이 키가 189.7인데 어떻게 몸무게가 82kg밖에 안 나갈 수가 있는 거지? 아무리 피칭 다음날 이라고 해도 이건 좀 심했다. 여기서 잠깐 첨언하자면 전성기의 나는 193.1cm에 몸무게가 120을 왔다 갔다 했다.
당시에 내가 몸을 맡겼던 존슨이 말하기를 사람의 몸무게는 키의 제곱과 세제곱 사이의 어느 숫자에 비례해야 한다고 했다.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한데 대충 키가 클수록 무게는 매우 많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 내 키에 82kg이라는 것은 170에 57, 58 정도 나가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내가 패션모델이라면 아주 훌륭한 몸매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난 야구 선수다. 그보다 매우, 그것도 매우 매우 체격이 좋아야 한다. 물론 프로 때처럼 미친 시즌을 보내야 하는 상태는 아니었으니 지방을 굳이 과다하게 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몸은 정말 아니다.
“이거 당장 식단부터 해야겠네.”
사실 그것 말고도 할 일은 정말 많았다. 근육에 뭉친 곳도 많았고, 뻣뻣하기는 또 어찌나 뻣뻣한지.
물론 그래서 이 젊고 쌩쌩한 몸뚱이가 나쁜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은 앞으로 채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절대 되돌릴 수 없던 것들이 쌩쌩하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축복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수술 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다. 물론 어제 105개나 던진 터라 아직 제대로 공 하나 던져보지 못했다. 하지만 던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아직 덜 찢어진 싱싱한 어깨라는 걸.
아마 내 어깨가 결정적으로 망가진 것은 3학년 초에 있었던 뉴월드 빅마트배 전국 토너먼트 4강 전에서였을 것이다.
진짜 내가 그것 때문에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진짜로 진지하게 야구 접고 아빠 사업이나 물려받을까 고민했었다. 물론 슬쩍 운 띄워봤다가 아빠한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긴 했었지만······.
아무튼 일 년 후가 아닌 지금으로 돌아온 덕분에 나에게는 선택지가 매우 많아졌다.
우선 가장 쉬운 선택지는 당장 투수 때려치우고 타자에 집중하는 선택지다. 사실 이게 제일 현실적이고 편한 선택지다. 애당초 내가 저평가됐던 이유가 무엇인가?
지명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난 왜 지명타자였나.
어깨가 망가졌으니 외야는 힘들고, 마찬가지로 유격수나 삼루수도 힘들다. 결국 남는 건 일루수와 이루수인데 내가 가진 장타 포텐을 다 뽑아내려면 그래도 열심히 뛰어다녀야 하는 이루수보다 몸을 키우기에도 부담이 없는 일루수가 적절하다.
어쨌든 그래서 난 KBO에서 일루수로 뛰었고, 메이저를 갔더니 그래도 KBO에서는 중간은 가던 내 일루 수비를 폐급이라며 그냥 방망이 들고 타석에만 서는 반쪽짜리 선수를 하라고 내몰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2022년 룰개정으로 NL도 전부 지명타자를 도입했다는 부분 정도였을까? 뭐, 덕분에 돈은 확실히 많이 땡겼다.
아무튼 지금이라면 적당히 코너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할 수 있다. 물론 이제 포지션 변환을 해서 내가 막 수비를 엄청 잘할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무려 150km/h를 던지는 어깨가 있다. 솔직히 코너 외야수가 낙구 예측에서 좀 실수를 해도 이만한 어깨면 어지간한 건 다 커버한다.
뭐, 그게 아니라면 그냥 투수로 밀고 나가는 길도 있다. 근데 솔직히 이건 좀 어려운 길이다. 타자는 이미 한 번 해봤기에 성공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투수? 글쎄······.
지금은 21세기.
시대는 바야흐로 대 구속 시대다. 물론 한국은 일본보다는 몇 년, 미국보다는 몇십 년 정도 뒤처진 탓에 150 던지는 고등학생이면 천연기념물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지만 미국만 하더라도 93마일을 던지는 고등학생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당장 옆에 섬나라만 해도 최고 150을 던지는 고등학생은 한 해에 스무 명을 넘어가고 평속이 150을 넘는 고등학생도 대여섯명은 된다. 물론 KBO에서만 뛸 거라면 이걸로 충분하겠지만 그 이상을 생각한다면? 아니,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너무 뻔하다.
성공이 보장된 타자와 어떻게 될지 모르는 투수.
선수들에게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백이면 백 전자를 고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 번째 옵션이 존재한다.
투 웨이.
우리나라 말로는 투타 겸업. 혹은 이도류.
사실 이건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웬 미친놈이 되지도 않는 망상 하고 있네. 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던 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기 물 건너 메이저리그에 그 되지도 않는 망상을 현실에서 펼쳐낸 괴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타니 쇼헤이.
사람들은 그가 NPB에서 그 짓을 할 때만 하더라도 그냥 NPB니까 생각했다. 뭐 NPB가 KBO보다 수준 높다고 해도 기껏해야 NPB니까.
그리고 MLB에서 그 짓 하겠다고 말할 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조만간 포기하고 투수만 하든지, 타자만 하든지 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전문가일수록 더 강력했다. 솔직히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야구는 잘하는 놈이 잘한다지만 애당초 프로는 그 잘하는 놈만 모인 곳이다. 학창 시절에 에이스 겸 4번 타자를 하던 선배들이 프로에 가서는 하나만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근데 이 양반은 바로 재작년에 전문가의 예측이고 뭐고 다 때려 부수고 그걸 성공했다.
타격으로는 리그 전체를 통틀어 1, 2위를 다퉜고 투수로는 이닝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비율만 따지자면 어지간한 팀의 에이스 뺨 때리는 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내내 거의 야구 그 자체나 다름없는 베이브 루스를 끊임없이 소환했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는 만장일치 MVP.
결국 메이저리그는 그 양반을 위해서 룰까지 바꿨다. 그리고 각 팀에서 제 2의 오타니를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던 것과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하는 마음으로 시도하는 것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꼭 MVP급 타격에 선발 투수가 아니어도 좋았다.
대 구속 시대를 맞이하여 선수들의 몸이 유리몸이 돼버린 이 시점에서 적당한 유틸리티급 선수가 적당한 불펜 투수급으로 공까지 던질 수 있다? 그건 로스터 자리를 정말 알차게 써먹을 수 있는 선수라는 의미다.
물론 KBO는 그런 것 없었다.
내가 돌아오던 시점까지도 투타 겸업의 선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KBO를 탓할 건 못 된다. 애당초 투타 겸업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NPB에서도 오타니 쇼헤이 이후 그런 선수는 하나도 나오지 못했다.
저것은 그저 미국이라는 스포츠에 미친 나라가 한 백 명 시도해서 한 명 성공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선수들을 갈아 넣었기에 가능한 위업이다.
문제는 그러다가 성공한 애들이 하나씩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내 MVP를 낚아채 갔다는 점이었지만.
아무튼 잘 생각해보면 나라고 투 웨이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차라리 이게 제일 안전한 길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몇 가지 어려움을 돌파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겠는가. 내가 살아본 세상에서 항상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어려운 것을 돌파했을 때만 그 빛을 발했다.
마치 이혼의 소중함은 결혼한 후에만 알수 있는 것처럼.
아, 이건 좀 아닌가?
아무튼 결정했다.
나의 야구 인생에 번번이 엿을 먹였던 투타 겸업.
이번엔 내가 그 길을 걸어보겠다.
그러면 일단 시작은······.
꾀병?
***
-뻐엉!!
190에 달하는 큰 키에서 내려치는 속구는 언제봐도 참 시원하다.
박감독은 자신의 지도자 인생을 통틀어 최수원 저 녀석이야말로 최고의 작품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순히 체격적인 조건만이 아니다.
물론 150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신의 축복을 받은 저 몸뚱이 덕분이지만, 그보다 프로에서의 성공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은 저 멘탈리티다.
그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팀 내에 녀석의 아버지와 자신에 관한 소문이 나도는 것을.
하지만 녀석은 그것을 믿고 방자하게 굴거나 자만하는 대신 실력으로 그 소문을 잠재우겠다는 태도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좋아. 굿 볼.”
게다가 투지도 넘쳐난다.
마운드 위에서 105구를 던졌음에도 항상 눈에는 불꽃이 이글거린다. 저놈은 토너먼트에서 45개씩 사흘 연투. 그리고 마지막 날에 105개를 던지게 시켜도 아무런 변명이나 핑계 없이 거뜬히 던질 놈이다.
암, 그렇고말고.
“저기, 감독님.”
“어? 왜? 무슨 일이야.”
“저 어깨가 좀 이상한데요.”
얼라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