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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5화 (5/305)

5화. 내 인생의 흑역사(4)

“최수원. 이 또라이 같은 새끼. 얌전한 고양이가 담벼락도 먼저 오른다더니. 그렇게 1년 동안 얌전을 떨더니 3학년 선배들 졸업하자마자 바로 들이박아 버리네.”

“부뚜막.”

“응?”

“담벼락 아니고 부뚜막이라고. 얌전한 고양이가 담벼락은 먼저 왜 올라가냐.”

“아······. 아. 너희 동네에서는 부뚜막이라고 하나 보네. 우리 동네는 담벼락이야.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도 그 선배 그러는 거 좀 꼴 보기 싫어서 속은 시원했거든? 근데 얼른 가서 사과부터 쎄게 박자. 아무리 엿같이 굴어도 선배는 선배잖아. 너도 야구 계속 해야지. 정, 혼자 가기 좀 그러면 나도 같이 가줄게.”

조유진.

조금 멍청하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사람 하나는 좋은 녀석이다. 이러니까 주변에 친구가 끊이지 않지.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안 그래도 나도 찾아가서 따로 이야기할 생각이었어.”

“그래, 잘 생각 했어. 병영 선배도 일 크게 만들지는 못할 거야. 어차피 그 선배도 야구 계속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번에 대회 성적 잘 뽑아서 대학은 가야지. 근데 그거 너 없으면 힘든 거 병영 선배도 다 알거든. 그러니까 지금쯤 운동장 뺑이치면서 본인도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건데 네가 가서 먼저 말 걸어주면 좀 지랄은 하더라도 그냥 적당히 끝내 줄 거야.”

나이와 연륜의 한계가 있으니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황도 제법 잘 볼 줄 안다. 확실히 이런 멘탈리티적인 부분이 괜찮으니 꾸역꾸역 프로 생활을 해나간 것이겠지.

물론 멀리서 보면 이런 판단을 하는 게 뭐 대수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가 되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감정은 항상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랑 사귈 때 항상 이때다 싶은 순간을 꾹 잘 참고 이성적으로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놈의 멍게비빔밥만 아니었어도 진짜······. 아, 전처 생각했더니 또 한 번 우울해진다.

내 우울한 표정을 착각한 것일까? 조유진이 나의 등을 꾹 눌러주며 또 말을 보탰다.

“왜? 갑자기 찾아갈 생각 하니까 또 막막하냐? 인마, 그래도 잘 들이박았어. 솔직히 병영 선배도 너한테 좀 너무 엿같이 굴긴 했어. 두고 봐라? 이제 앞으로 너한테 그 정도로 지랄은 못한다.”

“그거 알았으면 진즉에 이야기 좀 해주지 그랬어.”

“에이, 그래도 참을 수 있으면 참는 게 낫지. 그 선배가 지랄지랄하기는 해도 손찌검까지 가지는 않았잖냐. 그리고 너도 솔직히 좀 찝찝해서든, 불쌍해서든 하여간 뭔가 이유가 있어서 지금까지 참고 잘해줬던 거잖아. 아니야?”

“내가 저 인간한테 잘해준 거 티 많이 났냐?”

“어, 엄청. 저게 바로 가스라이팅의 정석이구나. 내가 참 보고 많이 배웠지. 솔직히 그냥 실력으로 밀려난 건데 마치 빽 때문에 밀려난 것처럼 세뇌를 아주 잘 시킨 거잖아.”

이 새끼가?

“야!! 그것도 알았으면 진즉에 이야기 해줬어야지.”

“아서라. 아서. 물론 너랑 선배가 싸우면 난 네 편이야. 근데 굳이 한쪽이 참겠다는 데 싸움 만들 생각은 없었지. 괜히 분란 만들 필요도 없고, 그리고 팀 전체 전력을 생각하면 너도 선배도 모두 팀에 있는게 최고 아니냐.”

솔직히 서운한 말이었다. 아마 열일곱 살의 최수원이었다면 이 녀석의 말에 배신감을 느끼거나 화가 많이 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십 년이나 아득바득 프로판에 붙어 있었고, 은퇴하고는 막창집에서 술 마시면서 야구 하고 싶다고 엉엉 울던 녀석을 기억하는 서른넷의 최수원은 녀석의 그 냉정한 말에도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야구가 좋으냐?”

“당연하지. 그럼 싫겠냐? 세상에 싫은 걸 누가 이렇게까지 하냐. 그러는 너도 야구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주제에.”

녀석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가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아는 무슨 아야. 본인 야구 좋아하는 줄 몰랐다는 것처럼.”

기억이 났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야구공은 여섯 살에 아빠와 캐치볼로 주고받았던 연식 야구공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야구는 나의 운명 그 자체였다.

무려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무려 십칠 년을 돈을 받고 야구를 해서일까?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말한다. 본래 내가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의무가 된다고. 그리고 나는 그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인가 야구를 의무로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의무 사이에서 가장 큰 행복과 즐거움을 느꼈었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거로 돌아온 것이 너무 혼란스러웠고 내가 또 그 짓을 해야 할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이제 알겠다.

나는 야구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 나는 한때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여자보다 그깟 공놀이를 더 사랑했던 남자다.

조유진 이 녀석 말이 맞다. 나는 야구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아니 나는 야구를 사랑한다.

게다가 나 야구 안 하면 군대도 가야······.

나의 그런 깨달음, 고마움과는 별개로 사내끼리 낯간지러운 말 나올 것 같으면 으레 그렇듯 입에서 튀어나간 말은 퉁명스러웠다.

“아니, 나야 대충 해도 잘하니까. 세상에 잘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냐.”

“와, 재수 없어. 지금 뭐 넌 야구도 못 하는데 왜 좋아하냐 뭐 이런 뜻이네? 근데 또 그게 부정이 안 되니까 짜증이 확 나네. 아무튼 어쩌다 보니 쓸데없이 솔직하게 속마음 다 말한 김에 진짜 잘 좀 부탁한다. 너야 어찌 되건 프로 가겠지만 난 아닌 거 너도 잘 알잖냐.”

“우는소리 하기는. 솔직히 이 팀에서 프로 갈만한 사람 둘 꼽으라면 나랑 너잖아.”

뭐, 실제로도 3라운드에 뽑히기도 했고.

사실 올해 1차 지명이 폐지되고 전면 드래프트가 실시된 상황에서 3라운드는 이전에 2차 2라운드와 같다. 팀에 따라서는 억대 계약금도 충분히 가능한 위치다.

하지만 녀석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거야 내가 수비하는 거 좀 큰 대회에서 제대로 어필 할 때 이야기지. 내가 포구도 되고 어깨도 좋은데 빠따가 좀 부족하잖냐.”

“그랬나? 너 지금 몇 할 치지?”

“2할 1푼.”

“아, 그래, 네 말이 맞네. 확실히 좀 부족하긴 하다.”

“와, 아까 선배가 왜 빡쳤는지 알겠다. 뭔가 내 말에 긍정한 거긴 한데. 되게 기분 나쁘네?”

물론 아주 나쁜 건 아니다.

애당초 포수가 원래 공격을 많이 안 보는 포지션이라 2할 1푼이면 딱 평균 정도는 된다. 다만 문제는 여기가 고교리그라는 점이다. 애당초 프로에 가는 애들은. 특히 상위에 드래프트 되는 애들은 리그를 폭격해야 한다. 평균 정도 해서는 절대 프로에 갈 수 없다.

뭐, 내가 야구 좋아하는 것도 깨닫게 해줬겠다 약간의 도움 정도는 베풀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하던 대로 놔둬도 프로에는 가겠지만 결국 십일 년 후에는 막창 굽다가 엉엉 울게 너무 뻔하다.

“유진이 너 이따 타격 연습하고 들어갈 거지?”

“왜? 빠따 제대로 못 돌리니까 연습이라도 많이 하라고?”

“아니, 괜찮으면 내가 좀 봐줄까 해서.”

“됐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야수인데 투수한테 타격 연습을 봐달라고 그러겠냐?”

“그래서 내 타율은?”

“······. 나쁜 새끼.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나중에 고맙다고 절 할 건데 여기서 미리 말해둔다. 큰절 말고 그랜절로 해라.”

“절 같은 소리 하네.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선배한테 다녀오기나 해.”

참고로 말해두자면 내 고교 통산 타율은 0.301이다.

***

녹초 상태로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헉헉거리며 운동장을 달리는 멍게 인간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참으로 흡족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이렇게 돌아온 것은 저 인간이 저렇게 괴로워하며 운동장을 도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아하아······. 뭐야. 하아하아······. 새끼야.”

“자, 습습후후. 일단 숨 좀 쉬고, 이것도 좀 쭉 들이켜요. 코치님이랑 감독님 지금 저기 애들 피칭 봐주러 가셨으니까.”

입에서 멀건 침을 뚝뚝 흘리는 멍게 녀석에게 시원한 생수 한 병을 건넸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생수는 아니고 내가 다 마신 병에 수돗물 받은 거지만.

-벌컥벌컥

시원하게 반쯤 물을 들이켠 녀석이 자기 머리에 물을 냅다 들이붓는다. 진짜 이렇게 보니까 수산물 시장에 상인이 멍게에 바가지로 물 부어주는 것과 꼭 닮았다.

한바탕 수분을 보급한 그 녀석이 기세등등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왜? 이제 좀 정신이 드니까 네가 얼마나 엿 됐는지 체감이 되냐? 이제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기라도 하려고? 꺼져 새끼야. 최수원. 야구 쫌 할 줄 알면 뭐 하냐. 사람이 인성이 돼야지. 경고하는데 너 진짜 어디 가서 야구 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아주 동기부터 선후배 할 것 없이 죄다 소문 쫙 내버릴 테니까.”

유진이는 말했다.

이 인간이 운동장 뺑이를 치면서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고.

물론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지만.

뭐, 아무리 어른인 척해도 열일곱 애송이의 식견이니 어쩔 수 없다.

아마도 그 녀석은 모를 것이다. 놀랍게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상식과 합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정말 한 줌도 안 된다는 것을.

안병영 저 개자식도 자기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와 원만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 정도는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또 사람 마음 아니던가. 심지어 저 녀석은 사람도 아닌 한낱 멍게에 불과했다.

“해 봐.”

“뭐라고?”

“해보라고. 에휴, 내가 진짜 유진이가 하도 간곡하게 부탁해서 큰 맘 먹고 기회를 주려고 해도 애가 개과천선의 여지가 없네. 야 너 어깨 위에 그건 뭐 균형 맞추려고 달고 다니는 거냐?”

“뭐라는 거야 이 미친 놈이!!”

멍게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처음 나에게 다가올 때의 그 기세등등함은 어느새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멍게야. 잘 들어봐. 네가 그런 소문을 냈다고 치자. 그리고 백 번 양보해서 사람들이 전부 네 말을 들었다고 치자고. 거기서 또 천 번 더 양보해서 감독이, 그러니까 우리 아빠한테 봉투 받던 감독이 네 말 믿고 나를 홀대했다고 치자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냐?”

“어······, 어떻게 되기는 뭘 어떻게 돼!! 너 새끼 야구 인생 엿 되는 거지.”

이런 멍청한 놈.

“그래서 너는?”

“뭐?”

“멍게야, 나야 야구 그만둬도 아빠 사업 물려받으면 그만이야. 솔직히 아쉽기는 하지. 너랑 다르게 난 진짜배기니까. 근데 그깟 공놀이 해봤자 얼마나 벌겠냐. 안 그래? 난 미련 없어. 근데 너는 어떨까?”

아, 물론 허세다. 난 야구 해야 된다.

하지만 이제 고작 십팔 년밖에 살지 못한. 평생 야구밖에 안 해본. 그리고 앞으로도 야구 하는 미래밖에 꿈꾸지 못하는 이 애송이에게 이게 과연 허세로 들릴까?

그럴리가.

“······.”

“야, 꿇어. 그리고 얼른 고전 만화에 나오는 불꽃 남자처럼 최 선생님, 야구가,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요. 하면서 울어봐. 그러면 내가 특별히 봐준다.”

“······.”

녀석의 얼굴에 갈등이 가득하다.

아니, 저건 갈등이 아니라 정말 울 것 같은 얼굴인데? 어? 어? 인마. 잠깐만. 아무리 멘탈이 바사삭했어도 그렇지 농담이랑 진담을 그렇게 구분 못 하면 어떻게 하냐.

내가 서둘러 무릎 꿇으려는 녀석의 팔목을 덥썩 쥐었다.

“아이, 참. 선배님. 농담입니다. 농담.”

그리고 울먹이는 녀석의 멍청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약간의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유진이가 원하던 원만한 화해 엔딩에 가장 가까운 것 아닐까?

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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