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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4화 (4/305)

4화. 내 인생의 흑역사(3)

티몬과 품바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유진이 녀석도 뜨악한 표정으로 ‘너 미쳤냐? 얼른 선배한테 사과해 인마.’라는 눈빛을 아주 강력하게 쏘아 보냈다.

하긴 돌이켜보면 십 대 때 한 살 차이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같은 느낌이 있긴 했다. 아, 아니다. 십 대뿐만 아니라 프로에 나가서도 일 년 선후배 차이라는 게 참 어지간히 대단하게 느껴졌었다.

뭐,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다. 어디 운동선수만 그렇던가. 학교에서의 학맥이 그대로 직업으로 이어지는 직군은 대부분 선후배라는 게 좀 빡빡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런 업계일수록 참 협소한 것이 보통이고 소문 한번 잘못 나면 아주 제대로 찍혀서 커리어 자체를 조지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그 덕분일까? 다들 저 여드름 빡빡 난 개자식이 인상 한 번 쓴 걸로 다들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와, 이 새끼. 내가 귀엽다 귀엽다 해줬더니. 아주 제대로 미쳤네.”

“에이,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셔야죠. 선배님이 언제 귀엽다 귀엽다 했습니까. 아주 추하게 질투하셨죠. 아닙니까?”

“너······, 너, 지금 미쳤냐?”

“에휴, 어휘력이 이렇게 빈약해서야. 미쳤냐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으십니까?”

안병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 얼굴에 난 우둘우둘한 여드름의 붉은 점들이 한층 더 도드라져 마치 멍게 같았다.

그러고 보면 전처랑 통영에서 먹었던 그 멍게비빔밥이 참 맛은 있었는데 말이지. 젠장, 그 멍게비빔밥만 아니었어도 내 인생의 그 거대한 흑역사는 생성되지 않았을 텐데. 하여간 언제 어디서나 멍게가 문제다.

“병영 선배님!! 참으십쇼!! 아무래도 이 또라이 새끼가 뭘 잘못 먹어도 단단히 잘못 먹은 것 같습니다.”

“야, 이거 놔. 안 놔? 너부터 뒤질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멍게와 품바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한바탕 촌극을 벌였다.

“품바, 아, 아니. 경석아. 그냥 놔 드려라.”

“이 미친놈아!! 놓긴 뭘 놔!! 빨리 잘못했다고 싹싹 빌기나 해.”

“빌기는 뭘 빌어. 나한테 동의를 구하길래 동의해드렸잖아.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편들어드린 거라고 볼 수 있지. 안 그렇습니까? 병영 선배님?”

“와, 이 미친놈이?”

“근데 선배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확실히 어휘력은 빈약한 거 맞네요.”

인맥, 학맥. 그래, 확실히 무섭다. 특히 이렇게 좁은 업계에서는 더더욱.

게다가 이 업계에 선후배 철저히 따지는 놈들은 자기한테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상대 팀에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선배한테 잘못했다는 소문만으로도 까칠하게 굴어댄다. 뭐 동업자 정신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자, 잘 생각해보자.

우리 중앙 고등학교가 야구 명문인가?

당연히 아니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최근에 프로에 선수를 보낸 것은 저기 칠 년 전에 졸업했던 선배가 대학을 졸업하고 7라운드 67번으로 광주 호크스에 간 게 가장 최근이다. 참고로 그 선배 프로에 입단하고 삼 년 동안 일군에서 뛴 경기가 아직 세 경기 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 이 멍게 놈이 프로에 갈만한 인재인가?

그래, 뭐 객관적으로 말해서 아주 나쁜 실력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 활약해서 우리 학교가 전국대회에 좀 높은 곳까지 진출해서 실적을 낸다면, 그래서 스카우터들 눈에 띈다면 대학 정도는 충분히 갈만하다.

하지만 프로? 웃기지도 않는다. 물론 일 년에 드래프트로 뽑혀서 프로에 가는 선수의 숫자는 백 명을 넘어간다. 신고선수까지 다하면 어쩌면 백오십 명도 거뜬하다. 하지만 매년 졸업하는 고교야구 선수의 숫자는 천 명에 가깝고 대학 야구도 삼백 명 정도 된다.

그 말인즉슨, 매년 졸업하는 선수 가운데 프로 문턱이라도 밟아보는 선수의 숫자는 열 명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뭐, 세상일이란 알 수 없으니 최고 구속 132km/h에 평속 120 후반대 투수라고 절대 프로에 못 간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 전처가 대오각성해서 명품백 쇼핑을 끊을 가능성이 더 높다.

허면 딱히 저 녀석 인맥도 학맥도 없고. 그렇다고 본인이 프로에 진출할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벌벌 떨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다.

게다가 혹시라도 뭐 있어도 상관없다. 프로 그까짓꺼 안가면 그만이다. 고생 좀 하겠지만 메이저에 직행해 버리면 된다.

즉, 지금 나는 저기서 얼굴 시뻘게져서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처럼 구는 정수리가 내 눈높이보다 아래 있는 멍게 인간에게 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다.

달려들겠다는 멍게놈과 그걸 말리려는 품바 녀석이 한참 옥신각신 목소리를 높이던 중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얏!!”

“가······, 감독님.”

현역 시절 포수 생활을 할 때 절대 옆으로는 공을 흘리지 않았다는 말이 정말 사실로밖에 보이지 않는 듬직한 체구. 가로 세로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우리 감독님이 나타났다.

회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뵀을 때는 배에 살이 너무 붙으셔서 참 큰일이다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까 배도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참 젊다. 아직 지방보다는 근육이 더 많아 보인다.

“수업 끝났으면 얼른얼른 연습이나 하러 튀어 올 것이지. 거기 안병영, 박경석. 오늘 아침 훈련이 너무 쉬워서 체력이 남아도나 봐? 선후배끼리 그렇게 부둥켜안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엉?”

“아, 아니 감독님 사실 그게 아니라······.”

멍게가 화급히 뭐라 변명을 하려했다.

쯧, 멍청하기는.

이런 순간에는 아니 말고 다른 말로 대화를 시작했어야지.

“감독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게 아니라 말렸어야 했는데. 경석이도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감독님께서 평소에 아무리 억울해도 사내가 변명은 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병영 선배 꾸지람이 아무리 억울해도 절대 변명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옆에서 말리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던 저희 잘못입니다.”

내가 그 말들을 내뱉는 순간 조유진과 티몬 그리고 품바와 멍게까지. 모두 다 지금 이 새끼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물론 그 벙찐 표정과 반대로 감독님은 그래도 역시 너밖에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쯧. 그래도 변명 대신 사과하는 남자 새끼는 우리 수원이밖에 없네.”

“아······, 아니. 감독님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자꾸 그게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어? 사내새끼가 돼서 변명이나 줄줄 늘어놓고 말이야.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대체 그게 아니면 대체 뭐냐.”

장담한다. 멍게는 절대 여기서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 없다.

애당초 이 다툼이 벌어진 것은 멍게 놈이 괜히 나한테 시비 걸다 벌어진 일인데, 감독에게 그걸 솔직하게 말한다? 난 현재 우리 팀에서 가장 높은 확률로 프로가 될 인재고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아버지와 감독님은 오고 가는 봉투로 돈독한 사이다. 그런데 여기서 멍게 놈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건 제대로 미친 거다.

뭐, 그렇다고 만약 순간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다? 그러면 멍게 얘는 야구 선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어디 작가로 들어가야 할 인재다. 물론 당연하게도 멍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을리 만무했다.

“죄······, 죄송합니다.”

결국 멍게가 벌게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였다.

감독님이 어휴 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병영아. 안병영아. 이 감독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닌 거 알잖아. 그리고 네가 어? 열심히 하는 거 다 알고 있어. 운동이라는 게 어? 인마. 그런 것도 있고 그렇지. 근데 그런 건 원래 어? 저기 저런 데서 인마. 어? 아니면 기숙사도 있고. 어? 지금 감독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네, 죄송합니다.”

그래도 멍게 놈 눈치는 있는지 그냥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고개를 숙인다.

“됐다. 박경석이. 넌 오늘 남아서 장 코치한테 펑고 받고 가고. 안병영이. 너는 어제 뽈 던졌으니까 오늘은 입에서 단내 날때까지 런닝만 뛰는 걸로 하자. 어휴, 진짜 세상에 이런 감독이 어딨냐. 어? 이 감독이 선수 생활 할 때는 말이야 빠따가 어? 공만 치는 용도가 아니었어요. 그땐 감독님이 빠따 들고 펑고만 쳐주면 그건 진짜 땡큐인 거야. 알아들어?”

그렇게 감독님이 라떼를 시전 하는 사이 멍게 놈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아, 뭐였더라. 이런 순간에 상대방의 기분을 풀어주는 말이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상대방 기분을 풀어주는 말이 기억이 안나면 내 기분이라도 풀리는 말을 하는 수밖에.

‘뭘 그렇게 꼬라보냐. 그러다 이 잘생긴 얼굴 닳겠다. 닳겠어. 하여간 꼴에 또 보는 눈은 있어서.’

그렇게 그날 나는 사람 얼굴이 진짜 멍게보다 붉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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