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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네가 정하는 대로 (129/129)


129화. 네가 정하는 대로
2023.08.24.



 


“나는 이미 한 것 같은데 실제론 전혀 아닌 것도.”

스치듯 지나간 말이 이비의 귀에 박혔다. 혼잣말 같은 어투였으나 코앞에서 한 이상 명백히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래서 이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이내 정색하며 되물었다.


“……뭘 했다는 말씀이시죠?”

이비는 이렇게 물으면서도 설마 싶었다.

이미 한 것 같다니. 이 표현이 정말 이비가 생각하는 그거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그 안에 담긴 부도덕한 내용은 둘째치고, 이비는 설마 저 백작이 여자랑 말 좀 텄다고 곧장 음담패설을 시전하는 섣부른 멍청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거라면 이것부터 정정해 주시겠어요? 제가 모욕감을 느끼기 전에요.”

이비가 웃음기 없이 말하며 백작을 쳐다봤다.

그러자 시온은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무고한 기색에 이비가 반신반의하는데, 뜻밖의 자백이 돌아왔다.


“말할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이비는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해명인가 싶어 백작을 노려보다가, 그 뜻을 이해하고 설핏 얼어붙었다.

말할 수 있을 줄 몰랐다. 왜냐하면 네가 이걸 알 리 없으니까.

백작이 생략한 뒷말이 머릿속에서 어렵지 않게 이어졌다.

요컨대 어차피 말 못할 줄 알고 혼자 뇌까렸는데 예기치 않게 말이 나왔다는 소리였다.

시온은 그 바람에 본인도 놀랐다는 듯, 오히려 영문을 묻는 눈으로 이비를 쳐다봤다.

너 어떻게 알았어, 라는 듯이.

빙글 돌아온 화살에 이비는 한층 더 당황했다.

하지만 변명을 생각할 틈도 없이, 은폐의 저주에 걸린 남자가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왜 말할 수 있죠?”

“백작님이 손을 그렇게 잡았으니까요!”

그래서 폭로의 저주에 걸린 여자는 하는 수 없이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이비의 대답에 시온은 그대로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답지 않은 눈초리가 귀여웠으나, 지금 이비에겐 그걸 따스하게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혼자 순진한 척하는 눈빛에 견딜 수 없는 수치를 느껴,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어깨 밑으로 깊이 떨어트렸다.

그 앞에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시온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차를 마셨다. 그러더니 이비가 말한 게 뭔지 깨달은 듯 더디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건…….”

“조용히 하세요.”

“네.”

시온이 무어라 설명하려 했지만 이비는 진저리를 내며 거부했다.

시온은 얌전히 수긍하며 다시 차를 홀짝거렸다.

왠지 울화를 돋구는 소리에 이비는 이를 악물고 제 앞의 찻잔만 노려봤다.

이비는 졸지에 저 백작과 자신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혼자 상상해서 믿는 사람이 되었다.

졸지에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실제로 그렇지만, 이비는 억울했다.

왜냐하면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니까.

쟤가 그랬다.

그 지긋지긋한 오두막에서, 쟤가 손을 막 그렇게 잡았다.

이비는 치사량에 가까운 수치를 눌러 삼키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 어두컴컴한 곳에서 시온 라우렐은 이비의 눈을 들여다보며 언제 잡았는지도 모르게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와 자리를 채웠고, 손끝을 세워 일말의 헤맴도 없이 이비의 손등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엄지로는 손바닥 안쪽의 손금을 은근히 덧그렸더랬다.

그렇게 달래듯 손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도망칠 틈이 없었고 그사이 얼굴을 가까이해서 피할 도리도 없었다. 그래서 속절없이 눈을 질끈 감았던 게 그날의 사악한 진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르겠냐고!’

이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날 처음 알았다. 단지 손을 잡는 행위가 이렇게나 불온할 수 있다는 걸.

어느 정도였냐면 이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용서를 구했다. 이 밤이 지나면 디에스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기로 결심했었다.

결과적으로 집사에게 떳떳한 이비로 남았지만, 그 일로 이비는 상당히 민망한 사실을 인지하고 말았다.

이토록 능숙하게 갈망해 오는 걸 보면, 이제 없는 시간대에 우리는 아주 가깝게 많은 것을 공유했던 모양이라고.

시온이 단지 되바라졌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사교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저 백작님한테 다른 여자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래서 이비는 이 버거운 사실을 확신했으나, 딱 여기까지였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더 곱씹을 겨를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저놈의 고약한 성질머리 때문에.

그런데 이제 와서 그딴 저렴한 말로 이 미지의 영역을 확정 지어 버리다니.

아무리 이비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들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이비는 다른 것보다 나도 모르는 나를 저 남자가 기억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핑 돌 것 같았다.

이비의 숨이 거칠어지자 조용히 차를 마시던 시온이 다시 입을 뗐다.


“그렇게 수치스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하지만 그는 도중 생각이 바뀌었는지 말을 뚝 멈췄다.


“……말을 왜 하다 말아요?”

“들으면 더 화낼 것 같아서.”

“그럼 시작도 하지 말든가!”

참다못한 이비가 찻잔을 들어 휘둘렀다. 하지만 시온은 쏟아지는 찻물을 능히 피해 냈다.

울화가 치민 이비가 찻잔마저 집어던졌으나 시온은 그것도 가볍게 받아 이비의 재산을 지켜 주었다.

시온이 진정하라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텅 빈 잔도 도로 채워 주었다.

친절인지 우롱인지 알 수 없는 그 행동에 이비는 입술을 더 세게 물었다.


‘이건 능욕이야! 침해야! 저 인간 자체가 내 존엄에 대한 훼손이야!’

결국 이비는 자신의 인권을 위해 시온 라우렐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연약한 예비 성녀에게 용을 떨어트리는 자를 해칠 방법은 없으므로 영원히 실행되지 못할 살의였다.

여러 가지를 참지 못한 이비가 테이블 밑에서 발을 구르자 시온이 눈치를 보며 찻잔을 들었다. 그 뒤로 웃음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김없이 발각되었다.


“웃어?”

“실례했습니다. 주의할게요.”

“이 파렴치한 인간……!”

“그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한 건 아니니까. 굳이 변명하자면 나도 처음엔 심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시온의 뻔뻔한 대답에 험한 말이 목까지 치밀었다.

이 와중에도 놈은 자기 잘못이 아닌 건 뒤집어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비는 원망 어린 얼굴로 시온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저 남자의 앞선 폭로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는 이미 한 것 같다니. 망상 속에서야 누구와 어떤 연애를 하던 각자의 자유지만, 저 남자의 그것은 단지 망상이 아니라 사실을 기반한 기억이라는 점이 이비를 숨 막히게 했다.

그래서 대체 어디까지 한 거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 질문은 마음에 고이 묻었다.

이비는 이렇게 한 호흡마다 격동하듯 괴로워했다. 그러나 정작 시온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본인도 이비를 두고 시시각각 야한 망상을 하던 걸 들킨 셈일 텐데, 그는 창피한 기색도 반성의 기미도 없었다.

오히려 여태 혼자만 알던 걸 이비도 알게 된 것에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게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닌 적 없다고 했잖아, 라고 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너도 번뇌하며 고통받아라, 라는 눈빛 같기도 했다.

그 앞에서 이비가 점점 파리하게 질리자, 시온이 뒤늦게 신사의 가면을 쓰고 말했다.


“불쾌한 표현을 사용한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거기까지 추론했을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지금 제 탓하시는 거예요?”

“전혀요. 이걸 탓할 리가.”

시온의 대답은 가벼웠고, 이비는 저 백작님이 능글맞게 굴기도 한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전혀 유쾌하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이건, 합리적인 추론이에요. 그런 사이도 아닌데 아저씨가 어린 나를 찾아왔다고 생각해 봐요. 그건 그것대로 소름 끼치는 일이잖아요. 이건 인간의 최저선을 믿고 내린 판단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최저선을 지키는 인간으로 믿어 주셔서.”

이비의 변명에 시온이 가볍게 화답했다. 정중한 척하지만 그 안에는 장난을 주고받는 사람의 친근함이 녹아 있었다.

그래서 이비는 다시 이마를 찡그렸다.

그때, 시온의 갈망을 느낀 후에 이비는 타는 벽난로를 보며 내리 생각했다.

아저씨도 미래의 나와 이렇게 손을 잡았던 걸까, 하고.

이미 사라진 시간 속에서 내가 아닌 나와 이렇게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함께했던 걸까, 그토록 사랑해서 시간까지 건너 나를 찾아낸 걸까.

이런 생각에 기뻤다.

그래서 시온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때의 나는 그토록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나요, 그럼 나도 이제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너무 작은 마음을 드러내지 못해 다만 그렇게 물었었다.

그리고 미움받았다.


―당신, 사람을 좋아하는 법을 알기는 해?

이비의 뇌리엔 시온이 이렇게 묻던 순간의 눈빛과 목소리가 여전히 선명했다.

시온은 그날의 모진 말이 중첩된 기억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기억하는 나는 역시 나쁜 사람이었던 걸까. 그토록 깊게 맞닿았던 연인이었음에도 더는 엮이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긋지긋한 인간이었던 걸까.

이비는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그날과 비할 바 없이 솔직하고 너그러워진 시온을 다시 바라보았다.

시온의 성의는 이비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진지하게 고백했고 그러기 위해 여실히 긴장했다.

격식을 갖춰 여느 때보다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가 며칠 전, 그를 위해 앞치마를 둘렀던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이비는 인정했다.

그럼에도 이비는 그날 감춘 마음을 다시 내줄 수가 없었다.


“일단.”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우며 이비가 운을 뗐다.


“사과는 받을게요. 저를 특별히 생각해 주신 건 호의로 여기고, 백작님이 생각보다 음험한 사람인 건 혼자만 알고 있을게요.”

이비의 뒷말에 시온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게 맺혔다.

그가 더는 숨기지 않는 호감이 두려워 이비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다만 이미 확인하셨다시피 저는 백작님께 마음이 없어요.”

시온이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냐고 물었을 때, 이비의 정확한 대답은 ‘모르겠어요’였다. 하지만 이비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정정할 것도 없어요, 죄송하지만.”

“그렇다면 안 해도 됩니다.”

마음먹고 밀어내는 이비와 달리 시온의 대답은 쉬웠다.


“당신이 아무 사이도 아니길 원한다면 동의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눈빛이 흔들린 건 오히려 이비였다.

이비는 조금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이기 위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그전에 시온이 덧붙였다.


“지금은.”

“……지금은?”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나중에 변덕을 부리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앞으로도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고, 나와의 관계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될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형태로.”

이비는 뜻밖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내 기가 찬 듯 웃었다.


“부담스러운데요.”

“이 정도 부담은 견뎌야죠.”

시온이 되받아친 말에는 더 큰 코웃음이 터졌다.

이 남자는 거절당한 주제에 몹시 당당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가 왠지 얄미워 이비는 뾰족하게 중얼댔다.


“시간만 허비하실 거예요.”

이비의 연이은 저항에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비는 시온이 결국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의 눈에 걸린 건 꽤 여유롭고 거만한 눈웃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온이 타격 따윈 없다는 목소리로 느긋이 되물었다.


“당신이 원래 어떤 인물인지 압니까?”

“탑의 성녀인 상당한 권력자요.”

“그런 여자에게 티엔다 귀족들은 매달 몇 장의 구혼장을 보냈을까요?”

“뭉쳐서 태우기 좋을 만큼 보냈겠죠.”

“그런 겁니다.”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건지, 시온이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미심쩍게 쳐다보는 이비를 향해 다정히 덧붙였다.


“매달 구혼장을 불사르던 여자가 결국 누굴 선택했는지 모쪼록 헤아려 주었으면 합니다.”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여태 보여 준 적 없는 상쾌한 미소를 내보였다.

선전포고와 개전의 의미가 꾹꾹 눌러 담긴, 달콤하고도 살벌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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