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닌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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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아닌 적이 없다
2023.08.21.
“나와 당신은 아무 사이도 아닌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반대로 말해야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이비는 그 부조화에 속아 눈을 깜빡이다가, 한참 뒤에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하지만 소소한 이해 뒤로 더 큰 혼란이 찾아왔고, 시온도 설명이 필요한 것을 아는지 웬일로 친절히 부연했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그 밖의 여러 관점으로도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 밖의 여러 관점이 뭘까.
“그러니 정정이 필요합니다. 내 지난 발언도, 당신의 오늘 발언도.”
들었구나, 아까 복도에서.
하지만 듣거나 말거나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렇게 진지한 태도로 바로잡을 말도 아니고, 게다가 틀린 말조차 아니다.
이비는 내심 기가 막혀 되물었다.
“뭐가 안 맞는다는 건지 공감이 잘 안 되는데, 꼭 정정이 필요한가요?”
“네.”
“왜죠?”
“사실과 다르니까.”
시온의 굳은 주장에 이비는 그만 실소를 흘렸다.
대체 뭘 하자는 걸까? 남의 집에서 정색하고 말꼬리 잡기?
이비는 이 대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모처럼 신사적으로 행동하는 시온을 생각해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다만 시온이 자상한 신사가 아닌 것처럼 이비도 상냥한 숙녀는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정정할까요? 빚을 진 사이라고 하면 되나요?”
“아니요, 더 신중한 고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별로 곱지 않은 반문에도 시온의 태도는 여전했다.
덕분에 이비는 눈앞의 백작이 아까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처럼 비장한 분위기로 말 한마디나 물고 늘어지는 남자라니.
이게 지난 일을 수습하려고 시온 라우렐이 택한 방식이라면, 그 여전한 오만에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는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알기 위해 일단 되물었다.
“여전히 잘 모르겠는데, 어떤 고려가 필요한지 알려 주시겠어요?”
“우선 나는 박애주의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비는 그 첫마디부터 납득에 실패했다.
박애주의자라뇨, 누가 너를 보고 박애를 떠올린다고 그래요.
이비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사이 시온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니면 야외에서 잠들던 뛰쳐나가 비를 맞던 상관 하지 않습니다.”
“그걸 박애주의라고 하면 이 세상에 희망이 있을지…….”
이비의 시선이 한층 흐려졌으나, 시온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가족이나 부하로 명명하는 사이여도 침대는 절대 내주지 않습니다. 얼어 죽든 말든 옷을 벗어 줄 리도 만무하고 업어 달란다고 순순히 업지도 않습니다. 내 이복형은 매달 내게 연락하지만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날 만나지 못했고, 내 부관은 신년제 때만이라도 티엔다에 올라가 달라고 늦가을부터 간청하지만 역시 전반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두 달간 내가 티엔다에 네 차례 올라와 연회에 두 차례나 참석한 건 모두 한 사람 때문이었고, 다 떠나서 나한테 세 마디 이상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 티엔다와 비스와 어른과 아이를 통틀어 당신 외에 없습니다.”
……이 백작님은 본인이 얼마나 못되게 삐뚤어진 사람인지 성토하고 싶은 걸까?
시온의 반성 없는 자백에 이비는 기분이 묘해졌다.
맥락상 자기가 누구만 특별 취급했다고 생색내는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이 하나같이 좀스러워서 썩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어디 더 해 보라는 투로 팔짱을 꼈다.
“또한 도전받는 경우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습니다. 애당초 용납의 여지를 주지도 않지만 나이와 성별과 신분에 관계없이 나를 모욕하고 도발하고 폭행하고 나아가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고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도 당신뿐입니다.”
아, 그러세요?
시온의 또 다른 생색에 이비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자기가 많이 봐줬다는 얘길 하고 싶은가 본데, 유감스럽지만 그건 그리 좋은 전략이 아니다. 이래서 참고가 되겠어?
이비의 시선이 한층 삐딱해졌지만 그럼에도 시온은 묵묵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고 다음 말은 이비도 차마 비웃지 못했다.
“몇 년씩이나 찾아 헤매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무 사이도 아니어서 진즉에 포기할 수 있었다면.”
……지금 이 얘기는 반칙이야.
고개를 기울인 채 웃던 이비는 결국 조소를 지우고 바로 앉았다.
그 모든 과정에도 시온은 그저 침착했다.
적어도 일주일 치의 말을 한 번에 다 한 것 같은데, 그는 초상화의 완성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정갈해서 이비는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시온은 눈싸움을 피하려는 듯 호수 쪽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며 턱선이 드러났고 그 아래의 단단한 목울대가 한차례 일렁였다.
소리나 다른 흔들림은 없었다. 그러니 고개만 돌리지 않았다면, 아마 이비도 그가 마른침을 삼킨 걸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미동에 이비의 눈이 한층 가늘어졌다.
‘흠…….’
시온의 긴장을 가까스로 눈치챈 이비는 이틀 전 그랬던 것처럼 그 남자의 면면을 조용히 관찰했다.
너무 깔끔하게 굴어서 정리를 끝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선을 긋는 게 아니라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길 죄다 구겨 넣은 안쪽에는 병아리처럼 풀 죽은 남자도 아직 있는 것 같았다.
백작의 허세를 확인한 이비는 발끝을 가볍게 까딱였다.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도톰한 카펫 덕분에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단히 너그럽게 대해 주신 건 알겠는데, 그래서요?”
이비의 태연한 반문에 시온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빈틈없는 모습이었으나, 알고 보니 보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 침잠한 많은 것들이.
하지만 그걸 아는 체해 줄 마음은 아직 없어서 이비는 순진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래서 어떤 걸 고려하라는 말씀이신지 잘 와 닿지 않네요. 백작님이 저한테 굳이 그러신 이유도 전혀 모르겠고요.”
이때만 해도 이비는 느긋이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와서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는 주마, 딱 이 정도.
하지만 이 백작님 역시 마냥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모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비의 비아냥에도 시온은 단호히 말하며 이비와 눈을 맞췄다.
“모르지 않으니까 묻지도 않은 거겠죠. 내게 다가올 때도, 서로에게 특별해질 가능성을 논하면서도 당신은 묻지 않았습니다. 나와는 달리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시온의 건조한 목소리를 감상하던 이비는 그가 무슨 소릴 하는지 중간쯤에 깨달았다.
하지만 시온은 이비가 당황할 틈도 없이 밀어붙이듯 읊조렸다.
“내가 어떤지, 당신은 이미 아니까.”
순간 이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무 세게 떨어지는 바람에 숨이 잠시 멎을 정도였다.
시온 라우렐은 정말 덜된 인간인지 말도 드문드문 제멋대로 빼먹었다.
그럼에도 이비는 그의 말을 빠짐없이 알아들었고, 남들은 문책으로 오해할 저 말도 이비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떨어졌다.
말마따나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지.
언제부터인지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저 사람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저쪽에선 우연이라고 주장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지만, 이비는 알고 있었다. 얼마 못 가 또다시 눈이 마주칠 것을.
어지간히도 비협조적인 주제에 필요한 순간엔 꼭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다지 필요 없는 순간에도 굳이 근처에 있었다.
부르면 올 것 같았고 불러 주길 바라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안중에도 없는 척하면 저쪽의 눈초리가 고약해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따금 몰래 웃었다.
시온의 말처럼 이비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새침하게 딴청을 피운 건 저 사람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있는 대로 티를 내면서도 고집스럽게 버티니까.
그래서 그건 피차 모를 리 없으면서도 아무 사이 아니라는 말조차 부정 못 할 만큼 모호하게, 그저 암묵적으로만 존재해 왔다.
저 남자가 불친절한 고백을 터트리기 전까지는.
내가 어떤지 너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오만한 선언이 그들이 알고도 모른체하던 것에 기어이 실체를 부여했다.
통상의 구애와는 전혀 다른, 기가 막힐 정도로 시온 라우렐다운 인정이자 고백이었다.
그걸 쓸데없이 알아들은 이비는 덜컥 놀라 숨을 삼켰다. 카펫 위에서 까딱이던 구두도 어느새 벌을 서듯 앞굽을 든 채 멈췄다.
저 사람은 정말 괘씸한 게 고백을 하려면 자기 고백이나 할 것이지 너도 알지 않냐며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인다.
거기 대뜸 휘말린 이비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이 겁쟁이인 걸 필사적으로 숨기는 이비는 특히 자기 마음을 드러낼 때 세상에서 가장 작아진다.
그래서 그냥 모른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증거가 너무 많았다. 애당초 이 겁쟁이가 겁 없이 먼저 다가간 것부터가 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쥐어짠 용기는, 이미 짓밟혀 아직 피멍이 든 채다.
생각이 그날에 닿자 버겁게 뜬 가슴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착각 안 하기로 했잖아요.”
종국에 그것은 납처럼 식었고, 이비는 카펫 위에 두 발을 가지런히 둔 채 말했다.
“본인 감정도 아니라면서요.”
“그것도 정정하겠습니다.”
“정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편리하게 쓰이는 줄 몰랐네요.”
이비는 태연히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 끝이 떨렸고, 이 상황이 못내 지긋지긋해졌다.
말마따나 알았다. 알아서 아는 체한 대가로 저열한 기회주의자 취급을 당한 게 지난 결말이다.
도로 속이 상한 이비는 호수로 시선을 던졌다.
그대로 침묵이 내렸고 그것은 무겁고 길게 이어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응접실을 채우고 넘치자 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내가 비겁했습니다.”
고요함을 깨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그토록 신중한 목소리로 자신을 외면한 여자에게 말했다.
“착각은 오히려 내가 일방적으로 한 말들입니다. 심한 말로 모함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백작이 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비는 여전히 그를 보지 않았다. 다만 듣고는 있었고, 시온은 기회를 붙잡았다.
“나야말로 당신에게 덧씌웠습니다. 중첩된 기억 때문이라면 핑계겠지만, 현재와 다른 기억이 많아 혼자 착각하고 단정 지었습니다. 편협하고 무도했습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 내치듯 부정했지만, 이제라도 정정하고 싶습니다.”
먼 호수를 향해 뻗은 이비의 속눈썹이 조금 내려앉았다.
돌아볼지 말지 고민하는 숙녀에게 시온이 다시 고백했다.
“설령 원치 않게 넘겨받았어도 내가 느끼는 건 분명 내 감정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당신에 대한 것도 전부 다.”
그가 무겁게 뱉어 낸 단어 중 하나쯤은 마음에 들었는지, 이비가 힐끗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 안엔 여전히 냉기가 남아 있어서, 시온은 착실히 근거를 덧붙였다.
“확실합니다. 만약 그 남자의 감정까지 이어받았다면 샌드위치 같은 걸 들고 다니면서 당신이 보일 때마다 먹였겠죠.”
너무 맞는 말이라 이비는 결국 냉랭한 가면을 떨어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샌드위치라니. 다 아는 거 얄밉네, 진짜.
얄밉다고 하면서도 이비의 발끝은 다시 움직일지 말지 흔들렸다.
그러자 시온도 나아갈 길을 아는 듯 새로 운을 뗐다.
“더 변명하자면 이 혼선 때문에 당신이 나를 백작님이라고 부르는 게 지금도 낯섭니다. 다르게 불린 기억이 훨씬 더 많아서.”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이비는 어쩔 수 없이 흥미를 느꼈다.
“왠지 당신이 내 제자들과 또래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얼토당토않은 착란에는 기가 막혀서 눈썹을 구겼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문득 놀이처럼 느껴진다거나, 굴러들어온 와인을 챙겼는데 막상 보내려니 이상하다거나, 당신이 목걸이를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선물한 적도 없다거나.”
전혀 몰랐던 고충이 쏟아지자, 이비는 별로 관심 없는 척 듣다가 간간이 실소 비슷한 걸 지었다.
맨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기분도 차근차근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백작이 낮게 중얼댄 건 이비의 예쁜 구두가 다시 까딱이려던 찰나였다.
“나는 이미 한 것 같은데 실제론 전혀 아닌 것도.”
그 순간 조금씩 뜨던 마음이 뚝 멈췄다.
이비는 그 상태로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대체 뭘 했고 뭐가 전혀 아니라는 걸까.
묘한 은유가 해석을 방해했으나 앞서 한 말의 흐름을 고려하면 맥락을 파악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비는 한참 간 귀를 의심했고, 종국엔 성난 곰처럼 눈썹을 곤두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