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무 사이도
(127/129)
127화. 아무 사이도
(127/129)
127화. 아무 사이도
2023.08.17.
따스한 봄볕이 사선을 그리며 공간을 채웠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있었다.
완벽한 각도로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시온 라우렐이었다.
이비는 그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햇빛과 뒤섞이는 광경을 익숙하게 바라보다가 감회 없이 깨달았다.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이른 봄, 그때도 그가 이렇게 찾아왔었다.
사교가 서툴다는 핑계로 오만하게 굴며 성녀가 되는 걸 포기하라던 당시의 그는 이비에게 아직 낯선 사람이었다.
어느덧 늦은 봄, 라우렐 백작은 이제 낯설지만 않을 뿐 여전히 이비의 무엇도 아닌 채 꼭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이비를 찾아왔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상아 저택의 응접실은 햇빛의 무게가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
길어지는 침묵을 끝내 견디지 못한 건 애석하게도 집주인 쪽이었다.
“저번 저택의 마지막 손님이 백작님이셨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 저택의 첫 손님도 백작님이시네요.”
“먼저 일어난 손님이 계신 것 같습니다만.”
“몬트라 후작님도 반가운 분이긴 하지만, 그분은 아까까지만 해도 이 저택의 열쇠를 가지고 계셨거든요. 그러니 분명 손님은 아닐 거예요.”
“그렇군요.”
시온은 담담히 수긍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이비도 찻잔을 따라 드는 척 그를 살폈다.
이틀 만에 다시 만난 시온은 거의 모든 면이 정돈되어 있었다.
이비는 이제 대충 털어 낸 머리와 안경, 가벼운 셔츠를 걸친 모습이 익숙한데 오늘의 시온은 귀족답게 격식을 갖췄다.
목소리와 말투는 사감 없이 정중했고 바라보는 시선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틀 전,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이른 봄의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이비는 그 모습이 내심 얼떨떨했고, 어쩌면 그가 시간을 되돌리려는 시도 중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비가 옅게 자조하는데 시온의 깍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의 징계는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직접 소명하는 건 아직 힘든 걸로 압니다.”
“그 건은 몬트라 후작님께 부탁드렸어요. 저번처럼 무마해 주실 거예요.”
몬트라가 재차 언급되자 찻잔을 내려놓던 시온의 손이 잠시 멈췄다.
“이번 일은 후작이 아니라 내가 변호하는 쪽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만.”
시온이 오류를 가볍게 짚어 냈다. 타당한 듯 부조리한 발언이었다.
말마따나 변호할 대리자가 필요하다면 이 일과 무관한 카셀이 아니라 이비를 직접 구한 영웅이 나서는 게 더 적절하다.
다만 피차 밑바닥을 내보이며 싸운 상대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비의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시온이 되물었다.
“당신은 몬트라 후작이 더 편합니까?”
“네.”
이비는 즉답 후 다시 고민했다.
마음에 드는 질문은 아니지만,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이비에게 몬트라 후작은 단지 더 편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한 사람이다.
웬만한 일은 다 할 줄 알고 아무리 착취해도 미안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부려 먹기 한정으로 디에스보다 편하고 끈 없는 잠옷보다도 편하다.
그런데 백작의 비교에 저렇게 대답하니 의미가 묘해졌다.
어김없이 오해한 시온이 나직이 중얼댔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뭐가요?”
“당신이 정한 내 위치가.”
시온의 읊조림에 이번엔 이비가 손을 멈췄다.
이비는 뭐 어쩌란 거지 하는 눈으로 시온을 쳐다봤다.
하지만 시온은 넓게 트인 창문 너머의 호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은 분명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제가 책망받을 일인가요?”
“아니요, 결코.”
이비가 장난스레 되묻자 시온도 가볍게 대답했다.
바람이 모두 쉬는 중인지 호수는 잠잠했고 물비늘조차 느리게 깜빡였다.
시온도 그런 목소리로 느른히 덧붙였다.
“책망을 받는다면 혼자 착각하고 폐를 끼친 쪽이 받아야겠죠.”
그의 겸허한 듯 무심한 자책에 잠시 멈췄던 이비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비는 따끈한 도자기에 차가워진 손끝을 댄 채 묵묵히 짐작했다.
이틀이면 저 도도한 백작이 이성을 찾고 후회할 때가 되었다고.
요컨대 만취해서 추태를 부린 사람이 다음 날 아침 이마를 치고 손수건을 무는 것처럼 말이다.
‘그날 일은 없던 셈 치려나 보네.’
백작의 정중함을 관찰하던 이비는 슬슬 결론을 내렸다.
오늘의 시온 라우렐은 그토록 담백했다.
사라지지 말라고 붙잡던 일을 지워 낸 것처럼, 아니. 그 순간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번갈아 질척댄 과거를 모두 잘라 낸 것처럼 그는 능숙하게 이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과거를 과오로 만들어 현재와 분리하려는 듯이 말이다.
‘하긴, 저 자존심에.’
놀라서 어린애처럼 매달렸던 걸 생각하면 치욕스럽겠지.
이해가 된다. 이해는 충분히 되기에, 이비는 먼저 밀어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징계가 걱정돼서 보자고 하신 건가요?”
“그것도 용건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 다른 용건도 있다는 소린데, 이비는 이 화법도 익숙해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이비가 실소를 삼키는 사이 시온이 운을 뗐다.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
“……설마 절 잡아 가둘 생각을 다시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정정이라는 소릴 듣자마자 이비가 눈썹 한쪽을 내리며 되물었다.
“아니요. 약속은 지킬 겁니다.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행히 시온은 그때의 약속까지 번복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비는 백작의 태도가 점점 더 못마땅했다. 왠지 까다로운 구태와 오점으로 다뤄지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정정이 필요한 이야기는 뭔가요?”
“당신의 성녀 발탁에 반대했던 이유를 정정하려고 합니다.”
아, 그거.
이비는 재차 인정했다. 그것도 중요한 이야기이긴 하다고.
이비가 나중에 듣겠다며 막아 버린 해명보다야, 이쪽이 당연히 먼저였다.
“여러모로 성가시고 안 어울리니까, 라고 하셨죠.”
“반은 둘러댄 말이었습니다.”
그럼 나머지 반은?
이비가 강한 의문을 느꼈지만, 시온은 따질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성녀가 되는 걸 반대한 진짜 이유는 당신을 로히카 세드로 옆에 두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람이 날 죽일지도 모르니까요?”
“그 결심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시온의 한참 늦은 정정에 이비는 말을 잃었다.
그러자 시온이 이비의 동요를 이해한 듯 홀로 읊조렸다.
“원래는 로히카가 당신을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게 그 남자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보같이 늑장을 부린 시온 라우렐 때문에 시작부터 어긋났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놓쳤고, 이미 당신을 얻은 로히카가 당신을 놓아줄 가망은 없습니다. 기억을 찾기 전인 로히카에게 당신은 가장 유용한 패고, 기억을 찾고 난 후의 로히카에겐 반드시 제거할 대상이니까.”
결국 성녀가 되어 목줄을 끊어 봤자 이비가 풀려날 곳은 안뜰인 셈이다.
자신을 계속 기를지 그만 잡을지 언제든 결정할 수 있는, 화사한 주인이 내려다보는 안뜰.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닌데 이비는 왠지 아득해졌다.
그런 이비를 앞두고 시온은 마지막 설득을 시작했다.
“당신이 성녀가 된다고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앞으로 몇 년은 별일 없이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끝은 정해져 있고 그 전에 로히카가 무언가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그때 당신이 탑의 성녀여서 로히카가 당신을 찾는 수고를 던다면, 종말보다 당신의 결말이 더 빠를 겁니다.”
종말보다 빠른 당신의 결말이라니, 이비는 그가 이런 표현도 쓸 줄 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게 못내 우스운 와중에 시온이 끝으로 제안했다.
“그러니 성녀가 되는 걸 포기하고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 후엔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침묵을 강요받지 않는 시온의 논리는 지극히 신사적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그 제안보다 여태 짐작만 했던 시온의 일면에 더 관심이 생겼다.
역시 그는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엔 휘둘리는 사람이었다.
라우렐 백작은 이비만큼이나 솔직하지 못하지만, 이비와 달리 없는 말을 꾸며 내진 않는다.
그러니 그 암담한 오두막에서 한 말에도 그의 진심이 한 자락씩은 담겨 있을 것이다.
원치 않게 넘겨받은 기억이라는 말도, 거기 휘둘리기 싫다는 말도.
이비는 그가 화를 내며 했던 말과 이 제안을 곱씹으며 그가 왜 이렇게 일관적이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그는 이비를 절대 외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긋지긋하게 여긴다.
어쩌면 내가 자기 인생을 어그러트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온이 이따금 보이던 차가운 눈빛이 떠올랐지만, 이비는 아무 내색 없이 생긋 웃었다.
“엔테의 말이 다 사실이었네요.”
“네, 고맙게도.”
“하지만 그쪽도 내막은 모르는 것 같았어요. 제가 어쩌다 문제의 중심에 서는지는 말이에요. 혹시 백작님은 알고 계세요?”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익숙한 침묵에 이비는 더 하얗게 웃었다.
“저를 위한 제안은 감사드려요. 하지만 역시 백작님의 뜻을 따르긴 어렵겠어요.”
“왜죠?”
“제 판단을 더 신뢰해요.”
“더.”
시온이 곱씹을 필요 없는 표현을 굳이 따라 했다. 불쾌함이 담긴 건 아니지만 이비는 나서서 해명했다.
“엔테를 보낸 게 저였어요. 아무래도 그때의 저는 백작님과 견해가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로히카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겁니까?”
“아니요.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이라는 말에 시온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감정이 절제된 남자의 시선 앞에서 이비도 찬찬히 고했다.
“판단하기엔 아직 모르는 게 많아요. 그래서 충분히 알고 난 다음에 직접 선택하고 싶어요. 가장 나은 방법을요.”
온건하지만 분명한 거절이었다.
그럼에도 시온은 여상히 고요했고, 이비는 그의 안색을 살피다가 장난스레 덧붙였다.
“별로 실망 안 하시네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으니까요.”
분위기만이 아니라 목소리도 쉬웠다.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결정이 바뀌거나,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태도 역시 지나치게 정중해서 이비는 한층 어색해졌다.
이게 새로운 전략인지 포기와 단념인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어느 쪽이든 마음 쓸 것 없다고 되뇌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진심으로. ……용무는 이제 다 마치셨나요?”
“아니요. 정정할 내용이 더 있습니다.”
“오해가 많아서 큰일이네요. 또 뭘 바로잡으면 될까요?”
이비는 이참에 잔업을 정리하려는 시온에게 선선히 웃어 주었다. 그가 신사처럼 군다면 이비도 숙녀처럼 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체면치레나 하는 게 지난 전쟁의 결말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이비는 호의적인 얼굴로 시온의 다음 정정을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시온이 다시 호수를 돌아보았다. 할 말을 고를 시간이 필요한 듯했으나 그 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이비와 눈을 맞춘 시온이 앞서 그랬던 것처럼 고저 없이 말했다.
“나와 당신은 아무 사이도 아닌 적이 없습니다.”
미처 짐작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래서 이비는 시온이 할 말을 고르던 꼭 그 시간만큼 얼떨떨해하다가, 뒤늦게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