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악독한 기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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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악독한 기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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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악독한 기집애
2023.08.14.
‘서녘의 황혼이 신들의 연회를 엿보는 것이라면, 상아 저택의 황혼은 신들의 연회에 초대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찬사의 주인공인 상아 저택은 티엔다 동쪽 호반에 자리한 몬트라 소유의 별장으로, 상앗빛 대리석을 안팎으로 펴 발라 평소엔 설산 같은 고고함을, 노을이 질 때면 호수의 낙조와 처절하게 어우러지는 강렬함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했다.
요컨대 외관도 전망도 엄청나게 비싼 저택이었고, 몬트라 후작이 상아 저택을 이비 아리아테에게 무상 제공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티엔다 사교계는 어김없이 들끓었다.
이 파격 대우는 카셀 몬트라의 사랑, 우정, 존경, 회심, 뒷거래, 큰 그림, 혹은 심신미약까지 대놓고 거론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카셀이 이비에게 삥을 뜯겼을 뿐이라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한 이는 어디에도 없어서, 카셀은 오늘도 신경성 위염에 시달리며 속앓이 중이었다.
“감사해요, 후작님. 새집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오래오래 잘 쓸게요.”
“마음에 든다니 거참 다행이네……. 너무 오래 쓰지는 말고…….”
이비가 선물 받은 아이처럼 해맑게 인사하자, 카셀은 멱살 잡힌 사람처럼 억지로 화답했다.
하지만 이비는 이 불손함과 띠꺼움을 너그러이 용서했다.
“저택은 이제 됐고, 다른 부탁이 있어요.”
왜냐면 시킬 일이 또 있으니까.
“탑에서 내 징계를 논의하고 있을 텐데 전처럼 무마 좀 해 주세요. 소명이 어렵진 않을 거예요. 사악한 밤의 일족에게 공격받아 어쩔 수 없이, 대충 알죠? 잘하시잖아요.”
이비의 뻔뻔한 요구에 이미 억지인 카셀의 미소가 더 경직되었다. 턱 근육이 도드라진 걸 보아 이를 악문 꼬라지였다.
“우리 이비가 나한테 많이 의지하는 건 아는데, 이번에 내가 나서는 건 살짝 그렇지 않나……? 이 일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잖니?”
“상관이 없기는요, 제 일이 곧 후작님 일이잖아요.”
카셀이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이비는 포악한 말을 갸륵하게 하며 호호 웃었다.
그래서 카셀은 이를 박박 갈다가 종국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부쩍 헐거워진 인장 반지를 만지작댔다.
사실 카셀은 이비와 실랑이할 기운도 없었다.
투기장에서 통렬히 굴복한 후, 카셀은 이비와 적대할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미친 애를 잘못 건드리면 패가망신까지 한 걸음이라는 교훈은 둘째치고, 아직 그날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카셀은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쏟아지던 그 밤으로 끌려갔다.
그날 하늘에서 내리는 건 비, 하지만 땅에 흐르는 건 피.
살갗에 달라붙는 습기, 거기 뒤섞인 온갖 비린내.
온전한 사람일 때는 안중에도 없던 자들이 흙바닥을 뒹굴 땐 차마 잊을 수 없는 형상이었다.
그곳에 가득했던 건 죽음, 악마, 저주, 종말, 심판, 끝.
그리고 나.
아무것도 아닌, 단지 나.
그날의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카셀을 찾아왔고, 카셀은 그때마다 무력하게 끌려가 시달렸다.
카셀은 이게 참극을 경험한 후유증인 걸 상식선에서 이해했다. 치료가 필요한 것도 인정했으나, 주치의는커녕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시종에게도 자신의 상태를 밝히지 못했다.
안 그래도 가문의 원로들이 이쪽을 살벌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카셀이 소금 유통의 잘못을 시인하고 비스의 투기장 문제까지 미련하게 뒤집어쓴 걸 두고 가문에서는 말이 많았다.
대외적으로는 밑 대륙에 혼란을 야기한 가주의 판단이 뼈아프다며 침통해 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아둔한 가주가 다 덮어쓰는 바람에 막대한 손해가 생겼다며 숫자로 격분했다.
결국 카셀은 명예와 재산, 그 어느 쪽도 지키지 못한 가주로 낙인찍혀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견제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정신이 위태롭다는 소문까지 새어나가면 야심 찬 몬트라들이 그를 유리병 바닥에 들러붙은 사탕으로 보고 틈날 때마다 흔들어 댈 것이 뻔했다.
이래서 카셀은 정신없이 몸을 사리는 중이었고, 이비하고도 최대한 원만히 지낼 작정이었다.
다만 이비가 그를 예상보다 알차게 벗겨 먹는 바람에 이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적당히 해라, 이 악독한 기집애야…….’
카셀은 요즘도 이비를 가지고 놀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마냥 예쁘고 얌전해서 인형인 줄 알았는데 설마 거기 들러붙은 악마가 본체였을 줄이야.
이 와중에 자신이 이비에게 반해서 저택까지 바쳤다는 헛소리까지 들려오니, 이 심약한 후작님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래, 이비가 부탁하는데 어쩔 수 없지……. 근데 이번에도 출석조차 안 할 거니?”
“네, 알아서 조용히 덮어 주세요.”
“괜한 참견 같긴 한데, 벌써 그렇게 건방지게 굴면 좋을 게 없어.”
이비의 연이은 몰염치에 카셀이 모처럼 진솔하게 조언했다.
좋든 싫든 카셀은 이제 이비의 편이다. 티엔다의 모든 귀족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앞으로 이비가 잘되는 게 카셀도 잘되는 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징계 재판에 참석도 하지 않고 사람을 써서 회피하는 이비의 태도는 양쪽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성녀 발탁식을 닷새 앞둔 이틀 전,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비 성녀가 밤의 일족에게 습격당하는 초유의 사태에서 비롯되었다.
그 일은 마냐냐의 빛이 밤하늘을 밝히는 바람에 모두에게 알려졌고, 탑에서는 이비 아리아테가 그럼에도 무사하며 이를 위해 라우렐 백작이 활약해 주었다고 발표했다.
이 공식 입장에 바옌 공작의 못마땅한 침묵이 있었으나, 어쨌든 탑에서는 이렇게 사건을 설명했다.
이러니 이비가 해명만 잘하면 이 상습적인 규율 파괴자를 지옥에 처박자고 나설 귀족은 없었다.
규율과 밑 대륙의 작은 마을을 저울에 올릴 때와 달리, 규율과 이비의 목숨에 대해선 어느 쪽이 더 중한지 명백하니까.
그러니 약간의 성의만 보이면 다 좋게 해결될 일인데, 이비는 저번 투기장 사태 이후 그랬던 것처럼 카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래서 카셀이 탑에 들어가 이비의 징계를 무마한 게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런데 또 이렇게 되었으니, 이비 아리아테는 두 달 사이 무려 세 번이나 탑의 규율을 어겼고 그때마다 대귀족의 뒤에 숨어 단 한 번의 징계도 받지 않은 셈이었다.
물론 위와 뒤에서 일이 조율되는 건 티엔다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이비는 이런 건방이 허용되는 출신이 아니다.
그래서 카셀이 기껏 걱정해 줬거늘 이비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부터 이런 일 없게 조심할게요.”
“그래, 말을 말자…….”
역시 이비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카셀은 이 악랄한 걸 왜 걱정하나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또 탑에 들어갈 생각에 싸늘한 복통을 느꼈다.
지난주였다. 이비 대신 탑에 들어갔던 카셀은 돌아 나오는 길에 기둥 뒤에 선 미엘과 눈이 마주치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때 작은 탑주는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몸을 숨긴 채 카셀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카셀은 미엘이 제 무릎에 나붓이 앉아서 했던 말과 행동을 기억해 냈다.
지난날 미엘 세드로는 카셀에게 이비의 동향을 알려 주며 바보처럼 굴면 죽여 버린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작 뭐가 바보 같은 짓인지는 제대로 명시하지 않아서 카셀은 미엘이 대체 어느 지점에 노여워하는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다가 미엘의 눈치를 보다가 시종들에게 등을 맡긴 채 부리나케 도망쳤었다.
그런데 거길 제 발로 또 가야 한다니.
‘조만간 보복당하는 건 아니겠지…….’
그때 미엘의 눈빛을 생각하면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눈앞의 이비 아리아테도 극악하긴 마찬가지라 도통 틈이 없다.
카셀은 우유 대신 독을 먹여 키운 것 같은 여자애들이 자신의 앞뒤를 막아 선 이 상황이 정말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이비가 그나마 상식적이지 않나 싶어, 카셀은 이비에게 미엘에 대한 것을 털어놓을지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그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이비가 냉큼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후작님만 믿고 있을게요. 이 저택도 예쁘게 쓸 테니까 염려 마시고, 이만 배웅해 드릴게요.”
“뭐야, 이제 가라고?”
“우리 후작님은 눈치가 참 빨라.”
“야, 너 진짜……!”
“저도 후작님이랑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곧 다음 손님이 오실 시간이어서요. 조만간 연락 드릴게요, 그땐 엔테도 같이 봐요.”
다음 손님이라니, 저택 넘겨준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아니, 그 전에 내가 약속을 겹쳐 잡아도 되는 사람이었어? 암만 그래도 이렇게 취급하는 게 맞냐고!
카셀은 울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화를 참는 목소리로 이비를 넌지시 타일렀다.
“이비야.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고 싶은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언제 어떻게 될 줄 알고 사람을 이렇게 막 대하니?”
“맞아요, 사람 일 모르는 거죠. 그래서 네가 지금 그 모양 그 꼴이고요.”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하지만 이비가 방긋 웃으며 돌려준 말에 카셀은 본전도 못 찾고 도로 우울해졌다.
이비도 말이 심했나 싶은지 잠깐 입을 막았다가 뒤늦게 예의를 차렸다.
“발탁식이 코앞이라 좀 바빠서요. 양해 부탁드릴게요. 정 아쉬우시면 제 손님을 같이 만나셔도 좋아요.”
“누군데?”
“라우렐 백작님이요.”
“갈게. 다음에 보자.”
카셀은 다음 손님의 정체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필이면 라우렐 백작이라니, 카셀은 숨 돌릴 틈없이 몰아치는 위기가 이젠 서글펐다.
카셀이 이비에게 목맨다는 소문이 퍼지며 카셀은 자연히 백작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카셀보다 한참 전에 등장한 이비의 남자니까.
카셀이 보기에 그 백작은 미엘 세드로처럼 사교성도 앞뒤도 없는 권력형 광인이라, 그런 남자에게 연적으로 대해지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뭐 그렇게 급히 가세요, 좀 기다렸다 인사도 하고 그러시지.”
“아니야, 무슨, 그러지 마.”
“역시 우리 후작님은 배려가 가득하세요.”
카셀이 상아 저택의 눈부신 복도를 바쁘게 가로지르자 이비가 총총걸음으로 쫓아오며 그를 약 올렸다.
그래서 카셀은 잔뜩 짜증을 내다가, 이비에게 확인차 물었다.
“근데 너 그 백작님하고는 무슨 사이냐?”
“아무 사이도 아닌데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 완벽히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이비는 두 번이나 분명히 답했고, 카셀은 신 걸 먹은 눈으로 옆에서 걷는 이비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왜인지 그 백작이 이비한테 눈도 못 떼던 등꽃제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번에 큰일 날 뻔한 걸 구해 준 것도 그 백작이라면서,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물론 받아 줄 게 아니면 단호한 편이 낫긴 하다만, 아무렴 이렇게까지 냉철할 일인가 싶었다.
카셀은 역시나 악독한 기집애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경악하며 숨을 멈췄다.
대체 언제 오신 건지, 이비와 아무 사이도 아닌 라우렐 백작님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