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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불편한 취향과 뒤끝 (125/129)


125화. 불편한 취향과 뒤끝
2023.08.10.



“디에스!”

이비가 디에스를 보자마자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때 이비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을 뿐,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와 백작의 대치를 보고 달려왔던 디에스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디에스는 몇 년은 족히 늙은 기분으로 막 달려온 이비에게 물었다.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안 다쳤지만 괜찮지도 않아!”

그러자 원망 가득한 타박이 곧장 되돌아왔다.


“왜 이제 왔어? 그 옷은 또 뭐야, 야 씨, 옷만 그렇게 입으면 뭐 하냐고!”

이비가 잔뜩 억울해하며 디에스의 어깨를 내리쳤다.

디에스는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맞아 주는 편을 택했다. 그러곤 이비의 정수리 너머를 슬쩍 쳐다봤다.


‘저쪽은 상태가 왜 저러지?’

디에스가 눈길을 던진 곳엔 라우렐 백작이 있었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애매한 각도로 서 있었는데, 왜인지 어제 헤어질 때보다 표정이 더 썩어 있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 이비의 주먹질을 막으며 속삭였다.


“저쪽은 지금 무슨 상황이야?”

“내가 기선제압에 성공한 상황이야.”

기선제압?

이비가 똑같이 속삭이며 돌려준 대답에 디에스는 더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뭐라 되물을 겨를도 없이 이비도 할 말이 생각난 듯 그를 윽박질렀다.


“너야말로 이거 무슨 상황이야? 저 사람 네가 보냈어? 내가 누구 때문에 길을 돌아왔는데.”

이비의 물음에 디에스는 침착하게 숨을 들이켰다.

할 말은 많은데 다 하자니 너무 길었다.


‘네가 미끼로 쓴 나를 저 백작이 포획했고 백작은 군대까지 끌고 와서 바람길을 봉쇄했는데 나는 거기 포로로 잡혀 있다가 어제 황혼에야 네가 사라진 걸 알아서 내가 몇 대 때렸더니 백작이 부랴부랴 너 찾는다고 나서더라. 말 나온 김에 나는 너 찾으려고 탑주도 만나고 여기까지 밤새 추적해 왔는데 옷으로 구박하는 건 둘째치고 너는 왜 자꾸 저 백작이랑 엮여서…….’

할 말이 정말 많지만, 디에스는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 긴 설명은 아련히 미루며 이비의 머리 너머로 말했다.


“약속 지켜.”

그가 백작을 향해 말하자 이비가 깜짝 놀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야, 쟤가 너는 안 봐주는 거 몰라?

이비가 밑에서 입을 뻐끔댔다. 하지만 디에스는 개의치 않고 백작에게 다시 말했다.


“찾기만 한다고 했으니까 이제 물러나.”

디에스는 아직 백작을 등진 이비의 뒤에 섰다. 그렇게 이비와 백작 사이를 가로막으며 저쪽의 분위기를 다시 살폈다.

다행히 백작은 물러나라는 말에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반감을 내비칠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대체 왜인지 그는 단단히 털린 표정이었다.


“……데려다줄게.”

디에스가 미심쩍게 쳐다보자 백작이 비로소 입을 뗐다.


“여기까지 온 데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네 책임도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네 책임이야.’

디에스는 백작의 발언을 진지하게 정정했다. 그러면서 그의 제안도 진지하게 고려했다.

지금 이 주변엔 로히카의 사냥개들도 여럿 돌아다니고 있다.

로히카는 이비를 먼저 찾으면 곱게 데려다주지 않을 거라고 으름을 놓았다.

그게 진심인지 심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진짜라면 디에스 혼자 형제들을 따돌리고 이비를 사수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난관인데 이비의 체력도 분명 한계였다.

그러니 타르데스의 따님께 신세를 질 수 있다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백작이 딴마음을 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디에스는 백작을 경계하듯 쳐다봤고, 그러다 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저긴 진짜 왜 저러지?’

평소 오만하고 건방지던 백작은 대체 왜인지 애써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얗게 타고 재만 남은 상태인 게 오히려 두드러졌다.


‘대체 무슨 기선제압을 한 거야, 너…….’

디에스가 이비를 힐끗댔다. 그런데 정작 이비는 저 대놓고 너덜너덜한 백작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 둘을 번갈아 보던 디에스는 마지못해 결정을 내렸다.


“백작하고 같이 가. 뒤따라갈게.”

“뭐? 싫어, 왜?”

“나 혼자 온 거 아니야.”

이비는 즉시 거부하더니 디에스의 부연에 억지로 납득한 듯 아, 하고 탄식했다.

그 소리에 안 그래도 음울하던 시온 라우렐은 얼굴도 분위기도 한층 더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의 연동을 확인한 디에스는 왠지 피곤해졌다.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이비와 라우렐 백작, 이 둘을 싸잡아 느끼는 피로였다.


 

.
.
.

디에스의 실낱같은 신뢰에 힘입어 이비는 시온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게 되었다.

그 전에 이비는 수십 분 전 엔테와 마주쳤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엔테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또 엔테를 놓쳤지만 이비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여기서 얻은 게 훨씬 커서 굳이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꽤 홀가분히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다만 타르데스의 따님께 신세를 지기 위해선 언젠가 그랬듯 시온에게 파묻히듯 안겨야 했다.

직전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그것을 얌전히 감내했고, 시온은 그런 이비를 보며 생소한 멀미를 느꼈다.

아까, 이비가 예의를 차리며 선을 그을 땐 애써 붙잡은 게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비의 집사가 등장하고 이비의 표정이 바뀔 때는 내리쬐던 햇볕이 그에게만 등을 돌리는 느낌이었다.

이비의 태도는 시온을 대할 때와 그 집사를 대할 때 여실히 달랐다.

저지른 일이 있으니 다른 게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시온은 속이 타들어 갔다.

불과 지난 그믐, 이비가 그를 어떻게 반겼는지 아직 고스란히 기억하는 탓이었다.

시온은 못 걷겠다며 조르던 이비를 떠올리고 숨을 멈췄다.

어떻게든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비 아리아테의 장벽은 견고해서 절대 외부로부터 함락당하지 않는다. 이비가 아주 드물게 직접 열어 주지 않으면 그 안으로는 발도 들일 수 없다.

시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또다시 괴로워졌다.


‘흠…….’

그리고 그때 이비는 시온이 모르게 그의 손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힘줄이 툭툭 불거진 게 보였다.

뿐만 아니라 경직된 어깨나 불안정한 호흡으로도 그의 동요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이비는 전혀 아닌 척, 이젠 아무 관심 없는 척하며 그의 기분을 헤아렸다.

그러곤 계속해서 일관된 결론을 내렸다.


‘풀 죽었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시온 라우렐이 풀이 죽었다. 심지어 엄청나게.

흔치 않은 현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비의 소감은 꽤 복잡했다.

사실 이비는 아까 시온에게 붙잡혔을 때 욕부터 왕창 먹을 줄 알았다.

나한테 도망치더니 고작 이 꼴이냐, 네가 정말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냐, 사람 번거롭게 만들지 마라, 등등.

시온 라우렐이 시온 라우렐스러운 말로 잔뜩 괴롭힐 거라고 생각해서 지레 겁을 먹었었다.

그런데 웬걸,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엄청 절절하게 이비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래서 이비는 이게 꿈인가 싶었고, 한참 동안 얼떨떨해하다가 뒤늦게 엄청 놀랐다. 그다음엔 몰래 안심했고, 마음이 놓이고 나니 어째 어이가 없어졌다.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해서, 왜 자꾸 사람을 헷갈리게 하냐고 따질 뻔도 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전에 잔머리가 먼저 돌아갔고, 이비는 그렇게 먼저 따져서 어물쩍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이 자식이 툭툭 내뱉었던 못된 말을 깔끔하게 돌려주었다.

그건 백작님의 감정이 아니잖아요, 라고.

나름의 복수였고 뜨끔 하라고 한 말이긴 했다.

그런데 시온은 이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경악하며 창백해졌고 덕분에 이비도 덩달아 당황해 버렸다.

뭐야, 뭘 그렇게 동요하는 거야?

이비는 시온의 저 반응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아주 심한 말을 했냐고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네가 계속 아니라고 하니까 그래 너 아니야, 하고 거들어 준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하늘이 무너진 얼굴을 한다고?


‘이래서 도련님들이란…….’

이비는 속으로 혀를 차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말도 안 되게 퀭해졌던 백작님이 생각나서 웃지 않으려고 소소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여튼 시온 라우렐에겐 얄밉고 야속하고 싫은 면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고마워할 구석이 있고, 알면 알수록 짠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어제 엔테가 해 준 무지막지한 이야기 때문에 이비는 그에 대한 인식을 몇 번이나 더 재고해야 했다.


―로히카 세드로가 멸망의 원인이 당신인 걸 알았고, 세계를 다시 시작해서 당신부터 죽이기로 했어요. 시온 라우렐이 거기 반대하면서 충돌한 거예요.

이비는 엔테의 말을 떠올리며 이전과 다른 의미로 입술을 꾹 닫았다.

엔테가 말한 시온 라우렐은 아저씨다.

날 살리려고 구세주에게 반기를 든 세상의 반역자.

그리고 라우렐 백작은 그 기억을 이어받은 사람. 그러면서 자신은 그와 전혀 다르다고 부단히 주장하는 사람.

나도 이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주장한 것처럼, 그리고 거부한 것처럼.

그럼에도 너를 완벽한 타인으로 밀어낼 수 없는 건, 네가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나를 허용하는 현재 때문이다.

이어받은 기억, 거부하고 싶은 감정, 그래서 덮어쓰지 않겠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런 주제에 혼자 방법을 찾아 뚝딱거리고 있다는 게 정말 짜증 나면서도 애잔하다.

가장 쉽고 편한 길이 뭔지 알면서, 미래의 나조차도 현재의 나를 버렸는데 네가 대체 뭐라고.

심지어 그는 결국 물러났다. 어디에 가둬서라도 성녀는 못 되게 할 거라더니, 차라리 죽이라는 말에 자기가 더 상처받은 양 물러났다.

금지옥엽들이 자기 부모한테나 쓰는 협박이 설마 통할 줄이야.

이러니 이비는 시온을 마냥 싫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것 말고도 묘하게 신경 쓰이기 시작한 부분이 있었다.


‘흠…….’

이비는 살짝 눈을 들어 시온의 얼굴을 쳐다봤다. 밑에서 올려다본 탓에 그의 목과 턱이 먼저 보였다. 그는 이 명백한 급소마저도 강인해 보였다.

이런 남자가 절박하게 매달려 헐떡이던 걸 떠올리니 기분이 왠지 이상했다.


‘좀 불쌍……했나?’

그걸 곱씹던 이비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취향에 강한 의문을 느꼈다.


‘가여움과 귀여움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몰라.’

 

 
이비는 무심코 중얼대다가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뭐라는 거야, 미쳤나 봐.

이비는 연거푸 고개를 흔들며 이 삿된 생각을 몰아냈다.

어쨌든 최악을 상정하며 파리하게 질린 시온과 달리, 이비는 지난 격전에도 불구하고 시온을 그럭저럭 허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비는 이 사실을 시온에게 알려 줄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괘씸하니까.

고마운 것과 짠한 것, 병아리 발톱만큼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이비에겐 뒤끝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평균 이상으로 길고 집요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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