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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사라지지 말아 줘 (124/129)


124화. 사라지지 말아 줘
2023.08.07.



“내가 잘못했어.”

시온은 어렵게 말해 놓고 자신이 과연 제대로 말했는지 의심했다.

난생처음 하는 말이라 발음이 틀리진 않았는지, 정말 입 밖에 내긴 했는지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저번 일은 내가 잘못했어.”

그래서 다시 한 글자씩 털어놓았다. 그날을 적게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돌이키길 바라면서.

아직 품에 갇혀 있는 이비가 숨을 깊게 마시는 게 느껴졌다.

화를 삼키는 것도 같고, 무언가 복받치는 것도 같은 호흡이었다.

그 미약한 숨소리에 시온은 다시 두려워졌다.

이비가 지난 새벽에 그런 것처럼 진저리를 낼 것 같았다. 그러고 또 어디론가 도망칠 것 같았다.

그래서 시온은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네가 싫다는 건 안 할게. 절대 안 그럴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시 기회를 줘. 미워하지 말아 줘. 옆에 있어 줘.

날것의 말들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는 잘나고 오만한 만큼 염치도 제법 있어서 바짝 엎드려 비는 법을 몰랐다. 수치를 알아서 여전히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렸다.

그래서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겨우 이 한마디를 속삭였다.


“사라지지 말아 줘.”

결국 그가 고른 말은 자신의 가장 오랜 두려움이었다.

시온은 이 말을 뱉어 낸 후에야 제가 붙잡은 이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밤새 숲을 헤맸는지 이비의 몸은 또 차가웠다. 미약하게 전해지는 떨림이 추위 때문인지 자신 때문인지 알 수 없어 숨 막혔다.

이비를 하염없이 찾아 헤매던 날들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겨우 만난 후 도통 다정하지 못했던 날들도 그를 숨 막히게 조여 왔다.

그래서 이비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선명히 느껴지는 간극에 절망했다.

이 심정을 다 고백하면 네가 조금은 너그러이 봐줄까.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비 아리아테라면 곧장 알아챌 테니까.

제 분을 못 이겨 성을 낼 땐 언제고 이제야 아차 싶은 거냐고, 미워하고는 싶은데 미움받긴 싫은 거냐고.

그가 고집 센 척하며 숨긴 밑바닥을 다 알아챌 테니까.

그게 이비의 경멸을 부추길 테지만, 그럼에도 시온은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해묵은 아집은 지난밤 이미 갈가리 찢겼다. 그 찢긴 조각마저도 안개를 헤치는 동안 다시 짓밟혔다.

시온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고, 이 혼란하고 치졸한 마음을 뱉어 내기로 했다. 전부 자백하고 너의 심판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시온이 입을 떼려는 찰나, 사로잡힌 새처럼 숨을 죽이던 이비가 제 허리에 감긴 팔에 손을 얹었다.

가벼운 손길에 시온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비가 이대로 손을 잡아 준다면 그는 영혼까지 바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비는 시온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개는 대신, 그의 팔을 제게서 밀어냈다.

힘이 거의 담기지 않은 손짓이었다. 모르는 척 무시해도 그러려니 넘어갈 만큼 사소했다.

그래서 이대로 외면하고 싶었지만, 시온은 앞서 한 말을 지키기 위해 미련을 잔뜩 묻힌 채 물러났다.

이비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시온은 이비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었던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비가 화를 낼 것 같았다.

사람을 그렇게 휘저어 놓고 이제 와서 뭐 하는 거냐고 따질 것 같았다.

모두 그가 들어 마땅한 비난이었다.

그래서 벌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 있는데, 뜻밖에도 상냥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진정하세요, 백작님.”

예상치 못한 온화함에 시온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비는 말씨뿐만이 아니라 표정도 평온했고, 그래서 시온은 이게 혹시 꿈인가 싶어졌다.


“그렇게 절박하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어진 말도 너그러워 시온의 구멍 난 마음에 미약한 기대가 차올랐다.

혹시 용서해 주려는 걸까?

시온은 저도 모르게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이비에게 곧장 박살 났다.


“그건 백작님의 감정이 아니잖아요.”

이비의 사려 깊은 목소리가 중요한 무언가를 뚝 하고 끊어 냈다.


 


“또 헷갈리신 것 같아요. 하지만 이해할게요, 이젠 백작님의 상황을 아니까요.”

이비의 말에 시온은 머리가 멍해졌다.

여러 반응을 예상했지만 이번에도 이비는 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방향이 특별히 잔인했다.


“그러니까 진정하고 정신 차려 주세요. 제가 또 착각하지 않게요.”

“아니야.”

이비의 연이은 단정에 시온은 목 졸린 사람처럼 신음했다.


“헷갈리지 않았어, 나는…….”

“백작님.”

시온이 해명하려 하자 이비가 여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렇게 말을 끊어 내고 곤란하다는 듯 덧붙였다.


“본인이 한 말에 책임져 주세요. 그래야 저도 더 실망하지 않죠.”

실망이라는 말이 얼음물처럼 아찔하게 정수리를 내리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동시에 눈앞이 캄캄하게 멀어졌다.

시온은 그 생경한 충격에 경악하다가, 눈치 보던 것도 잊고 두서없이 변명했다.


“책임질게. 책임질 테니까 해명은 들어 줘. 그때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 그런데 그건…….”

“아뇨, 나중에요.”

나중?


“그건 나중에 시간 될 때 얘기해요.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비는 시온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냥 나중도 아니고 시간이 될 때라니, 시온에겐 이 말이 더 듣고 싶지 않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무어라 다시 항변하려 하자, 이비가 말을 가로챘다.


“싫다는 건 안 한다고 하셨잖아요.”

이비는 비꼬는 기색 없이 되짚었고 시온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그때 이비는 여전히 온화했다.

그래서 시온은 원치 않게 깨달았다. 이비가 벌써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그게 자신에겐 최악의 방향이라는 것도.

역시 이비는 그와 달리 계산이 빠르고 단호했다. 그래서 자신이 상정한 기간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고, 그럼에도 거절당하자 일말의 미련도 없이 받아들였다.

시온이 자신을 밀어내며 한 말을 불변의 명제로 인정해 이 관계를 정립했다.

그래서 시온은 자신이 한 말에 고스란히 갇혀 버렸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닙니다, 라던 그의 말대로 이제 어떤 고백을 하던 착란으로 치부 당하게 되었다.

이비가 요구한 것처럼 본인의 말에 철저히 책임을 지게 되었다.

시온은 자신이 황당한 함정에 빠진걸 비로소 깨달았지만, 이비는 그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수렁 속에서 허우적대는 걸 방치한 채 혼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저를 가두실 건가요?”

이비가 가볍게 물었다.

시온이 차마 답하지 못하자, 이비는 조급함 없이 되물었다.


“저 때문에 세상이 잘못되는 걸 막으려고요?”

이비가 심연에 파묻혀 있던 비밀을 폭로했지만 시온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놀랄 정신도 없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이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어요, 혼자서.”

이비의 이해가 그의 오랜 고독을 또 한 겹 깨트렸다. 그런데 왜인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게 불편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이비의 이어진 말에 실체를 드러냈다.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건 제 문제니까요.”

이비의 선언은 덤덤한 동시에 지극히 이비다웠다.

그래서 시온은 혼자 덩그러니 버려지고 말았다.

그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이비의 앞길에 난입한 걸림돌이며, 이비는 언제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는 걸.

그러다 모종의 이유로 이 걸림돌을 친구 내지는 연인으로 삼아 보려 마음먹었으나 그마저도 내친 건 본인이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이비의 앞길을 강압적으로 막고 버티는 역할 뿐인데, 이비는 그마저도 녹록히 허용하지 않았다.

당하고 당한 끝에 스스로 진실을 찾아 시온 라우렐이라는 훼방꾼이 제게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명분도 이유도 하나하나 박살 냈다.

나아가 이를 강행할 빌미마저 완전히 빼앗았다.


“혹시 저를 못 믿어서 꼭 가둬야겠다면 차라리 여기 두고 가 주세요. 빚은 그걸로 갚은 셈 칠게요.”

그건 너에게 붙잡힐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는 선언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시온의 심장이 또 한층 굴러떨어졌다.

혼자 진창을 구르게 된 시온은 이비의 말짱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비와 처음 만난 날, 이비가 왜 그렇게 얄미웠는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시온은 이비가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는 게 못 견디게 서운했다.

그런데 이비는 지금도 꼭 그렇게 굴고 있었다.

길고도 짧게 새로 쌓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로써 곱지만은 않게 생긴 친밀감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정말이지 교양 있게 웃으며 시온에게 제 앞에서 영영 꺼질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차라리 무섭게 화내며 욕하던 이비가 그리워졌다.

적어도 그때의 이비는 시온의 모난 면면을 찌르며 원망했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를 아는 사람으로 대했었다.


“나는…….”

변명이 입에 감겼다.

목이 잠긴 시온은 자신이 한때 되뇌던 말을 떠올렸다.

단지 빚일 뿐인 이비 아리아테. 나는 네가 특별해지는 걸 원치 않아.

시온은 이렇게 중얼대던 주제에 시간이 갈수록 이비에게 속절없이 끌렸다.

시선 끝에 항상 네가 있는 걸 느끼면서도 아닌 척 모르는 척 틈을 방치했다.

그런 시온을 위해 이비가 완벽히 선을 그어 주었다. 그가 원하던 대로.

그래, 내가 원했던 일이다. 그렇지만 그게 이렇게 고스란히 쏟아져 스스로를 짓뭉갤 줄은 몰랐다.

시온은 숨이 막혔지만 기다리는 이비를 위해 어렵사리 대답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네가 조금은 기특하게 여겨 줄까, 어쩌면 자비를 베풀어 줄까 하며.


“이제 안 해, 네가 싫다는 건.”

시온의 대답에 이비가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 새겨진 거리감은 여전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간 실례 많았습니다.”

심지어 이비는 영영 작별하는 사람처럼 인사했다. 더는 볼일 없다는 듯이.

상냥하게 내쫓겨지는 기분에 시온은 이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 끝은 아니겠지.

이제 만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빗속에서 단둘이었던 그때로부터 고작 사십 시간 남짓 지났다.

그런데 시온은 그 모든 게 이토록 빨리 정리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뼈아프게 인정했다. 이게 이비 아리아테에겐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비는 의지와 결단으로 제 세상을 바꿔 준 남자마저 능히 밀어냈다. 그런데 하물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시온은 다시 절박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얄팍하게나마 맺은 관계가 전부 끊어질 것 같았다.

이비가 무사하면 된다던 갸륵한 마음은 어디 가고, 조금만 옆을 내달라고 구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를 붙잡을 말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입을 떼려는 찰나, 두 사람의 시야에 낯선 그림자가 걸렸다.

소리 없이 나타난 음영에 이비와 시온은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고, 두 사람의 표정이 대척을 이루며 변했다.

이미 창백하던 시온은 안색이 더 차게 굳었다. 반면 이비의 온순하던 얼굴은 거짓말처럼 밝아졌다.


“디에스!”

이비는 새카만 옷을 입은 제 집사를 알아보고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그때 이비는 시온을 스치지도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시온은 더없이 잔혹하게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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