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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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여기 있어?
2023.08.03.
엔테는 멍하니 누워 상처가 회복되길 기다렸다.
사원의 잔해에 널브러진 그는 만신창이였다.
라우렐 백작의 뇌전, 스스로 휘두른 저주, 그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이 그를 형편없이 으깨 놓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파…….’
엔테는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된 팔을 들어 올렸다.
손등을 펼쳐 보니 손톱이 또 까맣게 죽어 있었다. 그래서 엔테는 그 꼴사나운 모습에 싫증을 내며 제 손을 던지듯 떨어트렸다.
‘완패야. 짜증 나는 시온 라우렐.’
이제 죽지 않으니까 승산이 있을 줄 알았는데, 턱도 없는 착각이었다.
‘너무 많이 죽었어.’
엔테는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한히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반복해서 파괴당하면 그는 긴 잠에 빠져야 했다.
‘지금 잠들면 안 되는데.’
엔테는 멍하니 푸념하다 이를 악물었다.
저주가 조각난 몸을 거칠게 짜 맞추기 시작했다. 죽음보다 더한 격통에 엔테는 식은땀을 흘리며 절규를 삼켰다.
그 끔찍한 일은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엔테가 고통에서 해방됐을 때, 하늘은 어느새 새벽을 불러오고 있었다.
‘아파요, 이비 님…….’
그 잔혹한 새벽 아래, 엔테는 맥없이 이비를 찾았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어 마음 놓고 기대지는 못했다.
‘역시 저는 벌을 받는 거죠? 시키신 대로 하지 않아서 혼나는 거죠?’
서글퍼하는 엔테의 뇌리에 이비의 목소리가 스쳤다.
―넌 이미 배신자야. 이비 아리아테는 너 절대 용서 안 해.
그 쨍한 목소리가 엔테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엔테가 그토록 기다려 만난 이비 님은 많은 면이 예상과 달랐다.
차가운 물처럼, 얼어붙기 직전의 호수처럼 투명하고 고요한 내 이비 님과 달리 이곳의 이비 님은 아주 소란스러웠다.
이상한 이비 님.
고고한 당신과 달리 허둥지둥 필사적인 이비 님.
하지만 그 이비 님도 당신처럼 뛰어났어요.
그러니 사실이겠죠. 당신이 저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도.
엔테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억지로 웃었다.
동시에 상처가 겨우 나은 그의 뺨이 도로 길게 긁혔다.
얼굴만이 아니라 팔과 몸에도 채찍으로 내리친 듯한 자국이 군데군데 피어났다.
엔테는 저주를 휘둘러 스스로 상처를 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완전히 버림받을 것 같아, 이걸로 조금이나마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며 스스로 할퀴었다.
그러자 그토록 질색하는 아픔 사이로 이비의 차가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지난 세상의 끝에서 엔테의 신은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되돌려진 세상에서 당신의 존재를 영영 지우고 추방하라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명령이었다.
그때 엔테는 처음으로 신께 되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쪽을 택했겠지.
네, 맞아요. 당신은 언제나 옳아요.
―가혹하다고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네, 그래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 내게 안식을 준다고 생각해. 모든 게 끝나면 너는 이마저도 잊게 될 거야.
네, 그래서 저도 따르려고 했어요.
말씀하신 대로. 죽음은 안식이고, 죽이는 건 옳은 일이니까.
생명을 꺼트리면 어긋난 섭리가 적게나마 맞춰져서 내 안의 조각이 기뻐하니까.
그래서 어렵지 않을 줄 알았어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준비만 끝나면, 죽이는 건 얼마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엔테의 채찍질이 더 거칠어졌다.
하지만 이미 뇌리에 박힌 모습은 좀처럼 흐려지지 않았다.
그의 신이 아닌 이비 아리아테가 계속 떠올랐다.
위엄도 품위도 없는, 입이 험하고 툭하면 겁을 내는, 무모하게 술병을 들이켜는, 정말이지 꼴사납고 이상한 당신은 그럼에도 당신이어서, 내게 눈부시고 버거워서, 또 아까워서.
“죽이고 싶지 않아요…….”
엔테는 울먹이듯 고백하고 더 매몰차게 자신을 때렸다.
그렇게 스스로 벌하기를 한참, 가까이서 느껴지는 향기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새벽 너머의 이비 아리아테와.
숲을 헤매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모양인지, 이비가 덜컥 놀라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찰나의 순간 엔테는 생각했다.
죽여야 해. 곧 잠들 거야. 그러니까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숨을 쉬듯, 저주를 가볍게 휘두르기만 하면 끝날 일.
하지만 엔테는 또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이비는 결국 도망쳤다.
‘놓쳤어.’
아니, 놓아줬다.
‘진짜 배신자가 되어 버렸어…….’
엔테는 침울한 눈으로 상처투성이인 제 팔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용서받긴 틀렸다. 이런 벌 같지도 않은 벌을 줘 봤자…….
엔테가 조용히 절망할 때였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엔테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 바람에 목이 꺾인 엔테는 상당한 통증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치에 묵직한 돌이 굴러 떨어진 게 보였다. 그리고 이 돌이 날아온 방향엔 이비가 있었다.
무려 돌을 투척한 이비 아리아테가 엔테를 향해 메롱 하고 혀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아까처럼 후다닥 도망쳐 버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엔테는 순식간에 고뇌를 잊고 상쾌한 살의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비가 던진 돌에 천이 감겨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그건 이비의 예복 밑자락이었다. 펼쳐 보니 거기엔 흙탕물 따위로 짧은 요구 사항이 적혀 있었다.
―방법! 찾을 테니까 죽이지 마!
뜻밖의 전언에 엔테의 눈이 동그래졌다.
엔테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 짧은 문장을 곱씹다가, 이비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
.
.
‘아, 깜짝이야.’
엔테와 덜컥 마주쳤던 이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 쫓아오는 거 맞지?’
너무 다쳐서일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어쨌든 엔테는 이비가 도망치는 걸 봤으면서도 당장 덤벼들지 않았다. 냅다 돌을 던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밤새 이어진 숨바꼭질에 지쳐 있던 이비는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디에스는 어디쯤 오고 있지?’
곧 동이 튼다.
이제 찾아와 줄 만도 한데, 어째 집사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설마 백작에게 다 맡긴 건가? 그럼 지금이라도 백작을 찾아야 하나?’
이비는 밤새 한 고민을 반복하며 입술을 물었다.
술래도 모른 채 숨바꼭질하는 기분이었다.
엔테에게 잡혀도 될지, 백작에겐 잡혀야 하는지, 어느 쪽도 확신이 없어 밤새 버텼다.
하지만 이것도 끝이다.
‘안개가 더 옅어졌어.’
밤새 이비를 숨겨 준 안개가 거의 다 사라졌다.
여기에 해까지 뜨면 꼼짝없이 잡힐 거다. 타르데스의 따님을 데리고 있는 백작에게.
‘역시 백작에게 가야 하나…….’
잡히기 전에 자수하면 좀 나은 대우가 있을지도.
게다가 이 상황이 아니라도 이비는 결국 백작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엔테의 말대로 로히카가 이비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지금은 기억 못해도 모종의 방법으로 기억을 찾거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걸 막아 줄 사람은 미래에도 지금도 시온 라우렐 뿐이다.
‘짜증 나…….’
이비는 엊그제 그 난리를 쳐 놓고 백작에게 보호받을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미웠다.
역시 세상은 능력이 다였다. 능력만 믿고 까부는 건 이비도 마찬가지지만, 아니. 어쩌면 세계 제일이지만 그럼에도 이비는 정말 불공평하다 싶었다.
그러나 어쩌리,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걸.
이비는 억울한 기분을 삼키며 백작에게 할 말을 고민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무서웠는데 살았어요. 저번엔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조심할 테니까 좀 살려 주세요. 우리 집사도 덤으로.
이비는 백작을 붙잡고 훌쩍이는 상상을 하다가 제 손목에 감긴 리본을 뚱하니 바라보았다.
그전에 이걸 태워야…….
이비가 저주의 매개를 끊어 보려고 헛된 힘을 쓸 때였다.
어디선가 저벅 하고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비는 흠칫 놀라 몸을 낮췄다. 그대로 신경을 곤두세워 소리가 난 방향을 살피자, 이윽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뿌연 새벽을 등진 시온 라우렐이었다.
그를 본 순간 이비는 또 한 번 얼어붙었다.
직전까지 그에게 매달릴 상상을 한 주제에, 막상 마주하니 온갖 감정이 복받쳤다.
‘……진짜 싫어.’
나쁜 자식. 그런 말을 해 놓고 여기까지 찾아왔어.
매몰차게 굴려면 끝까지 그럴 것이지, 이랬다저랬다 사람 헷갈리게 하고.
백작을 보자 억울한 마음이 밀려왔다. 지난날 그가 작정하고 내뱉은 말이 하나하나 다 떠올랐다.
그래서 이비는 입술을 더 꼭 깨물며 죽은 듯 몸을 숨겼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저 사람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백작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저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비야.”
부르는 소리에 이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굉장히 기가 막혔다.
‘저게 지금 누구 흉내를 내는 거야?’
어처구니없이 다정한 음성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하지만 정말 화를 낼 일은 따로 있었다.
“여기 있어?”
“네, 있어요.”
시온의 고요한 물음에 이비는 성실히 대답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몇 초 후, 이비는 온갖 짜증을 내며 백작의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기다려!”
등 뒤에서 백작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비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이비는 시온을 등지고 달리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대안이 저 인간 뿐이라고? 그래서 비위 맞추면서 살아남으라고?’
언제까지? 평생?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웃기지 마. 내가 지금까지 왜 발버둥 쳤는데, 겨우 이러려고 그런 줄 알아?
“위험해, 달리지 마!”
등 뒤에서 백작이 재차 소리쳤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이전보다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백작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비는 숨이 콱 막혔다.
멋대로 거리를 좁혀오는 저 정복자가 두렵고도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곧 잡힐 걸 알면서도 죽도록 내달렸다.
하지만 이 울창한 숲은 밤안개와 새벽이슬에 잔뜩 젖어 있었고, 정신없이 내달리던 이비는 가파른 내리막에서 필연적으로 미끄러졌다.
발을 헛디딘 걸 깨달은 순간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이비를 낚아챘다.
“이거 놔!”
단단한 손아귀 힘에 이비는 비명을 질렀다.
이비가 발버둥 치자 경사진 땅이 흘러내리고 이비의 발도 다시 미끄러졌다.
그러나 이비는 떨어지지도 넘어지지도 않았다. 붙잡다 못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시온 때문이었다.
이비는 그를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시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비명을 지르는 이비의 귓가에 간절히 속삭일 뿐이었다.
“놓을게, 놓을 테니까 제발 도망치지 마.”
제발이라니.
그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표현에 이비는 행동을 뚝 멈췄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시온은 어느새 제 어깨에 이마를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다급한 호흡이 등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비는 더 얼떨떨해졌다.
뭐야, 고작 그거 달렸다고 숨 차는 사람 아니잖아. 뭘 그렇게 절박한 척이야.
이비는 제 등을 덮친 남자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상황을 살피자, 시온이 벼랑까지 내몰린 목소리로 자복했다.
“내가 잘못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