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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그 끈 (122/129)


122화. 그 끈
2023.07.31.


몰아치는 굉음이 단잠으로 도피했던 이비를 거칠게 깨웠다.

그 바람에 이비는 안팎으로 기겁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눈을 뜨고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온 세상이 검고 희게 번쩍거렸다. 그물 같은 벼락이 주위를 덤덤히 헤집었고 연이어 울리는 낙뢰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그래서 이비는 구멍 난 통에 갇힌 채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두리번대던 이비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벼락이 칠 때마다 잔상을 남기며 가까워지는 엔테였다.

그 엔테는 이비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무어라 외치는 듯도 했지만 그 목소리는 굉음에 파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엔테를 봤지만 이비는 차마 도망치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사방을 긁어 대는 번개에 몸이 데일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는데, 엔테가 이비를 붙잡을 듯 손을 뻗었다.

동시에 백작의 낙뢰가 경고를 무시한 자의 팔을 까맣게 태워 버렸다.

그 끔찍한 광경에 이비는 비명을 질렀다. 물론 그 소리도 깨끗이 파묻혔다.

그래서 오히려 두 사람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어쩐지 고요하게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엔테가 이비를 향해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직후 이비는 엔테의 모습을 놓쳤다.

엔테는 순식간에 이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비가 엔테를 찾아 두리번대는데, 그물처럼 퍼져 있던 낙뢰가 촛불처럼 훅 꺼졌다.

뒤이어 암전이 찾아왔고, 대신 하늘 높은 곳에서 새로운 소음이 시작됐다.


‘둘이 싸우는 건가?’

이비는 멍하니 허공을 더듬다가 곧장 일어나 내달렸다.

낙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던 그 공간은 이비가 처음 깨어났던 사원의 안쪽이었다.

이비는 당장 밖으로 나가 하늘부터 살폈다.

백작과 엔테가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모양인지 하늘 한쪽은 여전히 어지럽게 번뜩였다.

그래서 이비는 눈부심을 견디며 달을 찾았다.

간신히 발견한 달은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위치로 보아 이제 자정쯤 된 것 같았다.


‘왜 디에스가 아니라 백작이지?’

디에스가 백작에게 협조를 요청한 건가? 왜? 날 살리는 게 우선이라서?

이비는 혼란스러워하며 다시 내달렸다.

라우렐 백작과 엔테가 싸우기 시작했다. 저렇게 정면으로 붙으면 아마 엔테에겐 승산이 없겠다.

하지만 이비는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날 죽이려는 자와 가두려는 자. 위험성만 다를 뿐 걸림돌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비는 저들이 싸우는 사이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얼마 못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우뚝 멈춰 섰다.


―봐요, 날 갉아 먹으려고 몰려와서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이비는 낮에 본 엔테의 모습을 멍하니 떠올렸다.

그러더니 돌연 사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섭리의 공격을 받는다고 했어.’

감히 시간을 건너온 자들은.


‘시간을 되돌리는 건 노체의 능력.’

그럼 이 섭리를 관장하는 것도 높은 확률로 노체.


‘그렇다면 엔테를 공격한 저주들은?’

아마 섭리를 바로잡으려 한 것.


‘물건도 마찬가지일 거야.’

사람이든 물건이든, 반칙을 써서 시간을 넘어왔다면 그 역시 섭리를 거스른 거니까.


‘그럼 분명 여기 있을 거야.’

여긴 달이 묻힌 곳, 노체의 힘이 약해지는 노체의 무덤.

섭리의 공격을 피하려면 반드시 여기에 숨겨놔야 한다.


‘나한테 저주를 건 매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이비는 사원으로 돌아와 그 주변을 정신없이 뒤졌다.

하늘이 우르릉하고 울릴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이비는 이를 악물고 돌아다녔다.


‘어디 있지? 대체 어디에…….’

설마 어디 묻어 둔 건 아니겠지. 제발, 제발…….

그때였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이비의 눈에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들어왔다.

밤이 되어 낮보다 더 선명히 보이는 그것은 노체의 저주였다.

저주를 발견한 이비는 눈을 크게 떴다. 자세히 보니 노체의 저주가 점점이 모여 있었다.

엔테에게 그런 것처럼 잔뜩 떼 지어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너덧 개의 저주가 어느 한 곳을 맴돌고 있었다.

그건 엔테가 만든 유리 관이었다.

이비는 당장 달려가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그 안을 장식한 꽃을 헤집었다.

가시에 찔리는 것도 모르고 꽃송이 사이를 헤매길 얼마.


“아…….”

이비는 손에 걸리는 부드러운 천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허공을 배회하던 노체의 저주들이 그 천에 들러붙었다.


‘찾았다…….’

이비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제 손에 들린 길고 흰 천을 바라보았다.


 
그건 천이 아니라 끈이었고, 이비의 눈엔 이미 익숙한 물건이었다.

역시나, 그건 지하의 소녀들을 묶는 리본이었다.

하필이면 이게 내 저주의 매개였다니.

이비는 정말 지독하다고 생각하며 그 리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구속을 위해 만들어진 단단한 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맨손으로 끊는 건 무리였다. 그럼 태워야 하나? 이걸 태우면, 저주가 풀릴까?

이비가 적당한 도구를 찾아 두리번댈 때였다.

콰앙! 하늘 저편에서 또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비는 놀라서 귀를 막고 몸을 낮췄다.

잠시 후, 하늘을 어지럽히던 빛과 소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싸움이 끝났어……?’

왜 벌써.

이비는 하늘 저편과 손 안의 리본을 초조하게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눈을 감았다.

이비는 그 상태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마냐냐 님, 마냐냐 님. 매번 이렇게 써먹어서 죄송해요. 그런데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이비는 몰래 흥얼대는 게 아니라 호수를 정화할 때처럼 있는 힘껏 마냐냐를 불렀다.

그러자 이비의 머리카락이 밝게 변하며 마냐냐의 가호가 사원 주변의 밀림으로 퍼져 나갔다.

마냐냐는 더러운 것을 정화한다. 하지만 더러움도 정화도 다소 주관적인 개념이다.

인간은 자신이 활용할 수 없는 혼합물이면 일단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 해수를 걸러 내는 마냐냐의 힘도 정화라고 칭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좀 다르다.

마냐냐의 가호는 사실 정화가 아니라 분리, 혹은 분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했다.

이비는 이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후, 무성한 숲을 이루는 나무 위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식물들이 이비와 마냐냐의 요구로 내뱉은 미세한 물방울이었다.

그렇게 달이 묻힌 사원은 차츰 안개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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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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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시온은 씁쓸한 눈으로 제 손아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새하얗고 가녀린 청년이 엉망이 되어 들려 있었다.

높은 창공, 시온에게 팔목을 붙잡힌 채 늘어진 엔테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처가 깊었다.

그런데 죽기는커녕 어째서인지 그의 몸은 시간을 되돌리듯 상처를 회복했다.

다만 회복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엔테는 그걸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뭐야, 그 몸.”

그 모습을 보던 시온이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시온의 얼굴엔 불편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엔테는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친한 척하지 마세요, 기분 나쁘니까. 너 나 모르잖아?”

엔테의 비아냥에 시온의 미간이 더 깊게 패였다.

말마따나 시온은 엔테를 모른다. 오늘 처음 만났다.

다만 시온은 엔테를 기억한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그러나 너무 어그러져서 다시는 도래하지 않을 미래에 시온은 엔테를 만났었다.

그는 열아홉 소년이었다.

그는 이비 아리아테가 시온을 만나기 훨씬 전에 찾아낸 어린 양이었고, 라우렐 백작 못지 않게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위대한 성녀 외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던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성녀를 어머니처럼, 주인처럼, 혹은 신처럼 따르며 시온보다 먼저 그 옆을 충성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안 친한 거 아니까 입 다물어.”

시온은 차갑게 대꾸하며 엔테를 타르데스의 따님 위로 끌어당겼다.


“이비는 어디 있지?”

엔테는 고통스러워하며 억지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도 굳이 추궁하지 않고 이비의 집사가 챙겨 준 정화의 소금을 꺼냈다.

시온은 이 엔테의 존재를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매우 기괴하게 느껴졌다.

설마 그 남자처럼 섭리를 거슬러 온 인간이 또 있을 줄이야.

물론 엔테도 이비를 위해서라면 시간을 건너고도 남을 광신도가 맞다.

다만 이비에게 전해 들은 그의 행보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 8년간 조용히 지내다가 이제 와서 존재를 드러낸 것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시간을 건너온 주제에 모습을 숨기지 않는 것도, 다친 몸을 지독하게 회복하는 꼴도 하나같이 기이했다.

이토록 의문이 가득하지만, 어쨌든 그는 시온에게 마침 반가운 존재였다. 엔테가 옆에 있으면 그는 여태 말하지 못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와 함께 엔테도 데려갈 생각인데, 쓸데없는 문제가 생겼다.

엔테가 좀처럼 의식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충격을 받아도 그는 악착같이 회복하며 정신을 붙들었다.

그래서 시온은 엔테를 진즉에 제압하고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해 곤란한 상태였다.


‘성가시게…….’

시온은 이비를 찾으러 가기 전에 엔테를 완벽히 구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 녀석을 타르데스의 딸에게 묶어 멀찍이 떨어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이비를 찾기 위해 저 숲속을 혼자 뒤져야겠지만, 계속 회복하는 엔테에게 방해를 받을 바엔 그편이 더 나았다.

그렇게 마음먹은 시온이 밧줄과 소금으로 엔테를 포박하려 할 때였다.

어둠에 잠긴 숲이 돌연 하얗게 물들었다. 무슨 일인가 내려다보니 빽빽한 나무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못 떨어진 낙뢰가 불이라도 낸 건가? 하지만 특별한 화재의 기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저 낯선 현상의 원인을 찾아 두리번대는데, 하늘 저편이 새파랗게 밝아졌다.

티엔다가 있는 쪽이었다.

그 청아한 빛에 시온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직감이 이성보다 빠르게 이비를 떠올렸다.

그러자 너덜너덜한 엔테도 킥킥대며 웃었다.


“나 아까부터 느낀 건데, 저기 계신 이비 님은 네가 정말 싫은가 봐요.”

그 말이 비수처럼 박혔다.

시온의 얼굴이 더 차가워지자 반대로 엔테는 환하게 웃었다.


“꼴 좋네요, 이 재수 없는 새X야.”

엔테는 그렇게 중얼대며 칼날 같은 저주를 휘둘렀다.

시온이 아니라 그가 붙잡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피가 솟구치며 시온의 손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반쯤 묶인 엔테가 안장 밖으로 떨어졌다.

시온은 엔테가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려는 걸 알고 따님의 고삐를 휘어잡았다.

그러자 엔테가 또 한 번 저주를 내리꽂았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친 저주는 이번에도 엔테에게 박혔다.

그래서 엔테는 쏟아지는 화살보다 빠르게 추락해, 기어이 안개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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