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다른 세상의 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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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다른 세상의 이비
2023.07.27.
모두를 위한 세상은 없다.
왜냐하면 모두는 자신을 우선하고, 세상은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만큼 벅차니까.
“나도 여기엔 불만 없어요. 본인 인생은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거잖아요.”
이비가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래시계를 보며 투덜댔다.
“근데, 책임을 지우려면 최소한의 기회는 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불평 중인 이비의 옆엔 점성술사가 있었다.
“나는 그게 화가 나는 거예요. 어떤 사람한텐 기회조차 없다는 게, 비천하게 태어났다고 그렇게까지 따돌림을 당해야 한다는 게요.”
시온이 아닌 점성술사와 엔테가 만든 모래시계가 공존하는 이곳은 술기운이 넉넉한 이비의 꿈속이다.
이비는 이게 꿈인 걸 알고 점성술사와 모래시계를 그럴싸하게 망상했다. 그러곤 내친김에 푸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누구나 한 번은, 적어도 딱 한 번은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구원자님은 나랑 생각이 다른가 봐요.”
이비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점성술사의 대꾸를 기다렸지만 망상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한층 뚱한 얼굴로 점성술사를 쳐다보다가 괜히 제 발 저리는 신세가 되었다.
왜인지 점성술사의 온화한 미소가 ‘내가 시온 라우렐이라서 실망했어?’라고 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평하다 괜히 얻어맞은 이비는 신경질을 내며 고백했다.
“네, 실망했어요.”
얼마나?
“꽤. 상당히? 좀 많이요.”
처음엔 좋아했잖아.
“좋은 건 지금도 좋아요. 내가 변덕에 매달린 게 아니고, 아저씨가 날 버리고 간 게 아닌 걸 이젠 믿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어디에 실망한 거야?
점성술사의 여상한 미소에 이비는 뾰로통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게 꿈인 걸 떠올리고 겸연쩍게 대답했다.
“딱히 그 백작님이라서 실망한 건 아니에요.”
더 솔직히 말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도 이런 말은 창피해서, 이비는 그 부분을 덮어 두고 말을 이었다.
“그냥, 나도 한 번쯤은 이유나 대가 없이 구해지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말하고 나니 이쪽이 더 수치스러웠다.
“나도 알아요. 내가 이상한 거. 까다롭고 못된 것도요.”
이비는 퉁명하게 말하며 점성술사를 곁눈질했다.
아저씨의 다정한 미소가 맞아, 너 이상해, 하고 긍정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비는 울컥해서 변명했다.
“그치만 나한텐 중요한 얘기예요. 나는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좋아하게 됐으니까요.”
이비는 말하다 말고 꾹 인상을 썼다.
투하의 별장에서 라우렐 백작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 아무도 없는 수국 정원에서 이비는 아직 데면데면하던 백작에게 원치 않게 속마음을 말해야 했다.
―온 세상이 나를 빼고 돌아갈 때 날 발견해 줬어요.
―필요도 쓸모도 없는 나를 이유 없이 아껴 줘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해 줬어요.
―이 세상이 항상 나쁘지 않다는 걸 가르쳐 줬어요.
―기적이 있고 구원이 있는 세상을 나한테 줬어요.
―만약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계속 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하필 그 인간한테 이런 말을 하다니.
이비는 짜증이 나서 엄지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저주에 걸렸으니까 함부로 묻지 말라고 분명 말했는데, 계속 캐물어서 기어이 저 얘길 끄집어냈다.
게다가 그게 끝도 아니었다. 이비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저 다음에 백작 놈이 한 짓을.
그때 백작은 어둠 속에서 이비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대뜸 거리를 좁혔다. 굳이 손으로 등받이를 짚으며 다가왔고, 순진무구한 이비에게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었다.
그래 놓고 이비가 놀라니까 어물쩍 팔을 뻗어 와인 병을 훔쳐 갔지.
그때는 민망하기도 하고 없던 일로 하고 싶기도 해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비는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그때 그놈이 멋대로 입을 맞추려고 했다는 걸.
그랬으면서…… 그런 주제에…… 네놈이 감히…….
이비는 제 손톱을 시온 라우렐을 향한 원한 대신 꼭꼭 깨물다가, 변명을 더 해야 하는 걸 깨닫고 손톱 조각을 퉤 뱉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시간을 거슬러 온 걸 알고 실망했어요. 이마저도 내가 발버둥 쳐서 얻은 거구나 싶어서요.”
역시 세상은 나한테 인색하구나, 대가 없는 온정은 절대 베풀지 않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타협도 했어요. 발버둥 쳐서라도 얻었으니 다행이구나, 하고요.”
그렇게라도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고맙다고도 생각했다.
늦게라도 나를 찾아와 준 시온 라우렐에게.
“하!”
이비는 멋지게 오해한 백작을 힘껏 비웃었다.
어떠냐, 이 자식아. 네가 틀렸어. 알아? 네 자격지심이었다고.
근데 난 너한테 해명도 변명도 안 할 거야. 평생 오해하든지 말든지, 저열한 여자라고 욕하고 싶으면 실컷 하라지!
……그 욕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니까.
의기양양하게 백작을 욕하던 이비는 도로 시무룩해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날아다녔다.
“아저씨는 왜 그런 짓까지 했어요?”
이비는 한숨을 내쉬며 점성술사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었어요? 아니면 그 백작처럼 빚지고 못 사는 성격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기뻐요. 어느 쪽이든 정말 기쁜데…….”
이비는 기쁘다면서 웃지 않았다. 대신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댔다.
“아무래도 우리가 악당 같아요.”
나는 멸망의 원인, 아저씨는 구세주 시해자. 정말 전형적인 악당들이다.
이비는 조용히 자조하는가 싶더니, 다시 버럭 소리쳤다.
“근데 이거 생각할수록 억울해! 나 진짜 열심히 산 것 말곤 죄가 없단 말이야, 이런 벌은 카셀 쓰레기한테 더 어울리잖아!”
그래 놓고 어릴 때처럼 점성술사의 무릎에 냅다 누워 버렸다.
기억을 더듬어 만든 허상인데도 그 사람 곁은 역시 아늑했다.
이비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이 존재가 그리워서, 슬퍼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속삭였다.
“아저씨, 나 혹시 나쁜 사람이에요?”
원래 이비는 엔테의 말에 이렇게 연연할 생각이 없었다.
실은 정보를 얻는 것보다 시간을 끄는 게 우선이어서, 그냥 적당히 어울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엔테가 집어던진 폭로가 상상 이상으로 극악해 이비도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리고 말았다.
“내가 정말 세상을 끝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두를 위해 사라져야 하는 사람이에요?”
이비는 서러워서 점성술사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그러곤 매달리듯, 혹은 변명하듯 속삭였다.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때만 해도 이비의 기분은 세상 처량했다. 비련의 주인공이 된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얼대고 나서 몇 초 후, 이비는 잠시 굳어 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잠깐만. 설마, 아니지?’
신세 한탄에 몰두했던 이비는 가장 중요한 확인이 안 된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엔테의 말대로 나 때문에 세상이 수십 번이나 멸망하고 다시 시작했다고 치자.
그럼 내가 일으킨 멸망은 사고였을까, 의도였을까?
이비는 한참 늦게 떠올린 근원적 물음에 마른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사고겠지, 내가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닐 거야. 응, 그럼.’
하지만 그 낙관도 잠시, 이비는 마른 웃음 대신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중얼댔다.
‘……과연 정말 아닐까?’
슬프게도 이비는 자기 자신을 완전무결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비 아리아테의 유구한 입버릇부터가 싹 다 망해 버려라, 즉 강력한 멸망의 기원이었다.
아앗, 그치만, 나 저 때는 꽤 잘 먹고 잘사는 시절 아닌가? ……그런다고 환멸이 사라지겠나, 이 더러운 세상.
아냐, 아냐. 어쨌든 멸망을 막으려고 엔테를 보낸 거잖아? ……승산이 없어서 신자에게 최후를 맡긴 걸 수도, 로히카에게 당할 바에야.
아무리 생각해도 안심할 근거가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엔테에게 시간을 넘어가라고 명령한 시점에서 그 이비 아리아테는 이미 혹독한 인간 확정이다.
“와…… 아…….”
이비는 병나발을 불 때보다 더 어질어질해졌다.
진짜 어느 쪽이지? 나 어떡하지?
……시온 라우렐이 날 경멸하는 게 설마 이것 때문인가?
이비가 멍하니 충격에 잠겨 있을 때였다.
―모두를 위한 세상은 없어?
“엄마야!”
―응, 네 엄마는 확실히 없어.
뒤에서 대뜸 들려온 목소리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 바람에 본 적 없는 엄마까지 찾자, 새하얀 무언가가 패륜적 발언을 일삼으며 포르르 날아왔다.
토끼였다. 아니, 비둘기였다. 아니, 유비아다.
“뭐, 뭐야, 너?”
이비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갑자기 난입한 유비아를 쳐다봤다.
뭐지? 나 이런 망상을 한 적은 없는데?
―그럼 여긴 누굴 위한 세상이야?
“나 빼고 디에스 빼고 언니들 빼고 그 밖의 여럿을 뺀 누군가.”
이비는 의아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곤 미심쩍은 기분으로 유비아의 작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이비가 통제 중인 꿈에 불청객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지?
복기를 위한 자문자답형 망상? 근데 왜 갑자기 튀어나와? 게다가 왜 하필 유비아야?
이비가 아직 생각 중인데 유비아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는 모두를 위해 사라질 거야?
“아니, 나 사라질 생각 없는데?”
―네가 멸망을 의도했어도?
“그게 내 의도로 되는 일이면 이제 안 그러면 되잖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면?
“내 잘못도 아닌데 다 뒤집어쓸 수는 없지.”
이비는 그때마다 즉답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아까 점성술사를 붙잡고 궁상을 떨었던 일이 민망해져, 친애하는 아저씨를 조용히 퇴장시켰다.
그로써 이 공간에 모래시계와 유비아만 남자 그 출처 모를 유비아가 다시금 속삭였다.
―여긴 쓸모없는 너를 아껴 주는 세상이 아니야. 앞으로도 네겐 거래되는 온정만 있을 거야.
가슴을 파고드는 말에 이비는 짐짓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도 발버둥 칠 거야?
“……응.”
―왜?
“디에스를 마저 키워야 돼.”
―그럼 디에스의 세상엔 대가 없는 온정이 생기겠지만, 그런다고 네 세상이 변하지는 않아. 그걸로 괜찮아?
“안 괜찮아.”
이비는 이 유비아가 아픈 구석만 건드린다 싶어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곤 다시 씩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괜찮진 않지만 별로 상관 안 해. 대신 나는 엄청나게 똑똑하고 유능하고 대단하니까.”
그 말에 유비아가 이비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토끼처럼 자그마한 앞발로 이비의 이마를 꾹 눌렀다.
의미 불명의 행동에 이비가 눈을 깜빡이자, 유비아가 그 상태로 말했다.
―저 모래가 다 떨어지면 뱀이 널 죽일 거야.
“알아.”
―계획은 있어?
“모래가 다 떨어지기 직전에 일어날 거야. 시간을 끌었으니까 디에스가 조만간 올 거고, 그때까지 버틸 거야. 다행히 저쪽에선 나를 곱게 죽이고 싶어 해서 틈이 있어. 문제는 쟤가 내 마차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아직 모른다는 거야.”
이비는 말하면서도 고개를 재차 갸웃댔다.
내가 이걸 왜 설명하고 있지? 이 유비아는 정말 내 생각이 맞나?
―디에스는 허접해서 안 돼. 뱀한테 못 이겨.
음, 나랑 인식이 같은 걸 보면 내 망상이 맞는 것도 같고.
―그래서 시온이 대신 갈 거야. 이미 도착했을걸?
“뭐? 누구? 아니 그 전에, 너 진짜 유비아야?”
전혀 생각한 적 없는 전개에 이비는 깜짝 놀라 유비아를 붙잡았다.
하지만 유비아는 참 유비아답게도 제 할 말만 중얼댔다.
―도망칠 필요는 없어. 대신 조심해.
“어? 뭐, 뭘?”
―몸…….
몸조심하라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섬광과 굉음이 이비를 깨웠다.
그래서 이비는 혼비백산 일어나며 소리쳤다.
경고를 하려면 똑바로 해라, 이 토끼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