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어느 세상의 구세주 (120/129)


120화. 어느 세상의 구세주
2023.07.24.



 


“원래 지금까지 세계를 반복한 건 그 여자인데, 지난 세계에선 시온 라우렐한테 살해당했거든요.”

엔테의 목소리는 무자비한 말을 하는 주제에 나긋했다.

덕분에 이비는 꿈결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자, 잠깐만! 다시 말해 봐, 라우렐 백작이 탑주를 죽였어? 근데 그게 나 때문이야?”

“네. 로히카 세드로가 멸망의 원인이 당신인 걸 알았고, 세계를 다시 시작해서 당신부터 죽이기로 했어요. 시온 라우렐이 거기 반대하면서 충돌한 거예요.”

이어진 말도 야속할 만큼 태연해서, 이비는 둔탁한 충격에 잠긴 채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세상은 몇 년 후, 점성술사나 엔테의 나이로 보아 대략 4, 5년 후에 종말을 맞이한다.

표면적으로는 경계에서 풀려난 아마네세르에 의해서.

하지만 그 내막엔 왜인지 이비 아리아테가 있는 모양이라, 이 사실을 알게 된 로히카는 시간을 거스르기로 했다.

멸망을 막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이비는 멍한 얼굴로 로히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안녕, 아가야?

그날, 그 화려한 여자는 이비를 만나기 위해 밑 대륙까지 몸소 찾아왔다.


―신기하네, 이 불쌍한 아이의 마음을 누가 벌써 훔쳤지?

그러곤 누굴 찾고 싶다는 이비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땐 그냥 대귀족의 유별난 거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엔테의 말이 사실이면, 이 말은 이전과 다른 상황에 대한 의문이 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이비는 반신반의하며 엔테에게 되물었다.


“그 시간은 얼마나 거스를 수 있어?”

“자격이 있으면 몇 번이든 가능해요.”

“아니, 횟수 말고 기간. 시간을 거슬러서 다시 시작하는 시점이 언제야?”

“최후의 날로부터 13년이요.”

알아들을 수 없는 표현에 이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엔테가 간단히 덧붙였다.


“티엔다비스가 멸망한 건 315년이에요.”

그럼 세계가 다시 시작되는 기점은 302년.

310년인 지금으로부터는 8년 전, 이비가 점성술사를 만난 해다.

그리고 탑주가 이비를 찾아온 건 5년 전이다.


‘맙소사…….’

이비의 예상대로 그 로히카는 이미 세상을 반복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비가 첫 만남이라고 생각한 것도 로히카에게는 수십 번 반복한 재회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아무것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아는 이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 로히카는 이비를 죽이기로 결심했었다.

이비가 아직 살아 있는 건 로히카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 로히카가 기억을 되찾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가설을 세우기 무섭게 막막하고 아득한 공포가 밀려왔다.

이비는 지금까지 탑주라면 질색하면서도 그의 편애를 실컷 이용해 왔다.

성녀 자리를 두고 하는 이 내기조차도 로히카의 관용으로 성립된 것이었다.

그런데 로히카가 이비를 버리기로 작정했다면, 나아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비에겐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지금은 물론, 또 다시 시작될지도 모르는 과거엔 더더욱.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비의 잔이 잘게 흔들렸다. 이비가 그걸 깨닫고 두 손으로 잔을 움켜쥐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이비는 어깨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맨몸으로 허허벌판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당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이비를 내리눌렀다.

이비가 그 사실에 질려 몸을 떨자, 이비를 바라보던 엔테가 고개를 갸웃댔다.


“추워요?”

“아니…….”

“아닌데 왜 그렇게 떨어요?”

“무서워서, 탑주 때문에 엄청 겁먹었으니까.”

엔테의 무신경한 물음에 이비는 속절없이 대답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반대로 엔테의 눈은 동그래졌다.


“정말 겁먹어서 떠는 거예요?”

“그래, 이 바보야!”

치부를 들킨 이비가 바락 성을 내자 엔테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복사꽃처럼 하얗게 웃으며 중얼댔다.


“당신한테 이렇게 꼴사나운 면이 있는 줄 몰랐어요. 되게 한심하고 처량해 보여요.”

엔테의 잔인한 평가에 이비는 울컥하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정작 엔테는 악의 없이 더 예쁘게 웃었다.


“그런데 겁 안 내도 돼요. 그 여자는 지난 세계를 기억 못해요. 당신을 죽이기로 한 것도, 그래야 하는 이유도요. 그게 아니면 당신은 진즉에 죽었겠죠. 그러니 안심하세요.”

이 녀석은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비는 말끝마다 죽는다는 말을 반복하는 엔테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자 엔테도 농담처럼 뒤틀린 눈으로 이비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무섭나 봐요. 정말 몰랐어요. 이렇게 겁많은 사람일 줄은.”

왜인지 엔테는 즐거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이비는 여전히 떨면서 엔테를 째려보다가, 들고 있던 잔을 냅다 들이켰다.

이비가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마시자 엔테가 다시 놀랐다.

그리고 이비는 하늘이 핑글 도는 기분과 함께 테이블에 엎어졌다. 이마를 찧는 바람에 쿵 소리까지 내면서.

이비는 그대로 쓰러져 침묵했고, 엔테가 한참 뒤에 물었다.


“죽었어요?”

“살았거든……. 넌 말끝마다 죽는다는 소리 좀 작작해…….”

이비가 머리카락을 뒤집어쓴 채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훗, 후후후…….”

그러더니 밑도 끝도 없이 혼자 웃기 시작했다.

그 낯설고 기이한 모습에 엔테가 다시 고개를 기울이는데, 이비가 웃음을 뚝 멈추며 말했다.


“대체 누가 겁이 많다는 거야. 아니거든? 나 겁 없거든? 하나도 안 무섭거든?”

“지금은 겁이 아니라 이성이 없는 것 같은데요.”

“용기는 원래 그런 거야!”

이비가 버럭 우기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곤 인간 주제에 대리석을 공격한 대가를 치렀다.

이비가 아픈 주먹을 감싸 쥐고 낑낑대자 엔테의 표정이 한층 더 묘해졌다.


“당신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이상한 사람 같아요.”

엔테가 아무렇게나 흩어진 이비의 머리카락을 걷어 내며 말했다.


“겉으로는 우아한척하면서 속으로는 상상도 못 할 욕을 하고, 엄청난 겁쟁이 주제에 툭하면 허세나 부리고.”

엔테는 악의 없이 말하며 이비의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 주었다. 그러더니 이비를 따라 하듯 테이블에 뺨을 기댔다.


“게다가 술주정뱅이…….”

엔테가 그렇게 이비와 눈을 맞춘 채 키득대며 웃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무너진 천장 사이로 내리는 햇살 때문인지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엔테가 사랑스러웠다.

티엔다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청년은 이비의 단짝인 아르코 영식인데, 이비가 보기엔 엔테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속으로 고개를 힘껏 저었다.

이 학살자를 예쁘다고 느끼다니, 아무리 취했다지만 미친 생각이었다.

이비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엔테를 쳐다봤다.

그러다 그를 보낸 게 훗날의 자신인 걸 떠올리고 조금 더 괴로워했다.

유비아는 시간을 거슬러 오는 게 무척 가혹한 일이라고 했다.

그럼 나는, 나를 따르는 아이에게 그런 짓을 시키는 사람이 되는 걸까?

이비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엔테는 이비를 보고 있었다.

그게 마치 사랑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이비는 답답한 마음에 말을 돌렸다.


“……왜 하필 13년이야?”

이비가 웅얼대자 엔테가 관심을 반기듯 눈을 빛냈다. 그래서 이비는 아예 몸을 일으켰다.


“최후의 날로부터 13년이라며. 그건 정해진 거야? 그 이상이나 이하는 안 돼?”

“세상은 열둘을 채우고 제자리로 돌아가잖아요. 그래서 섭리를 거스를 때는 한발 더 나아가 열셋에 닿아야 해요. 그게 노체의 규칙이에요.”

“노체의 규칙…….”

그의 마지막 말이 안 그래도 혼미한 이비의 머릿속을 다시 헤집었다.

이비는 등꽃제에 다녀와서 유비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노체는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어?

―불가능해. 그 대신 그렇게 보일 수는 있어. 시간을 되돌리는 건 가능하거든.

이비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억의 조각들이 기다렸다는 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각각 떨어져 있을 땐 아무것도 아닌 단편들이 조각을 맞추며 하나의 그림을 만들었고, 이비는 순식간에 완성된 그림 앞에서 얕게 탄식했다.


“지금까지 세계를 반복한 게 로히카였다면 이번엔?”

이비가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댔다.


“이번 세계를 다시 시작한 건 누구야?”

“제가 도왔어요.”

“밤의 일족이어서 가능했던 거야?”

“일단은, 네.”

“그럼 로히카도 밤의 일족이니?”

이비는 제 입으로 말하고도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마냐냐의 고결한 탑주가 밤의 일족이라니. 이비는 차라리 술김에 한 착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엔테의 대답은 이번에도 무자비했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밤의 일족은 노체의 조각에 사로잡힌 인간인데 로히카 세드로는 그 반대거든요.”

“반대라면…….”

“로히카 세드로는 노체의 힘을 빼앗은 인간이에요.”

엔테의 대답에 애써 채운 술기운이 다 달아났다.

정말이지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렇게까지 거대한 존재일 줄은 몰랐다.

이비는 무섭다 못해 어이가 없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

“구세주요.”

엔테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침묵하는 용들을 대신해서 세상을 이끌고, 멸망을 막으려고 시간을 되돌린 이 세상의 구원자예요.”

 

 
엔테의 말은 이미 검증된 진리를 전하듯 담담했다.

실제로 그 말에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있는 힘껏 실소를 터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엔테가 또 다시 이비를 살폈다.


“표정이 이상해요.”

이상한 걸 알면 눈치나 좀 볼 것이지.

하지만 엔테에게 그런 상식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까처럼 이비의 속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반대로 이비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용감하게 저질렀다.


“에잇!”

이비가 와인을 병째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엎드려 있던 엔테가 깜짝 놀라 병을 빼앗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보잘것없는 주량을 가진 이비는 그대로 장렬히 쓰러졌다.

엔테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왔다.

대충 이게 무슨 짓이냐, 괜찮냐, 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묻는 말이긴 해서 이비는 억지로 대답했다.

속상해서, 하나도 안 괜찮아, 싹 다 망해 버려라, 라고.

발음이 잔뜩 꼬인 탓에 엔테는 이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비는 헤실헤실 웃으며 안심했다.

그러곤 홀로 심연까지 가라앉아 자조했다.

이비는 미처 몰랐다.

이 세상에 구세주가 있다는 걸, 그게 우리 탑주님이라는 것도.

이비는 그 사실이 놀랍기보다는 분했다. 구세주의 존재가 안심되기는커녕 억울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그 구세주에겐 세상이 둘이라서, 구해야 하는 세상과 그러기 위해 이용하는 세상을 철저히 구분하니까.

끈에 묶인 소녀들이 지하에서 노래하고 자신을 빼앗긴 백작이 영원히 싸우는 것처럼.

평범한 남자는 짖지 않는 개가 되고 저주마저 달이 되어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처럼.

물론 새삼스러울 건 없다. 이 세상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모든 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

나를 제외한 어떤 세상을 위해 힘껏 벌어지는 일.

모두 당연하고 당연하니 굳이 서러워할 것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비는 속상했고, 그 이유는 하나였다.

모든 걸 뒤로한 채 내 편이던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게, 이비는 정말이지 못 견디게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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