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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방법을 찾을게 (119/129)


119화. 방법을 찾을게
2023.07.20.



“아뇨, 딱히요.”

엔테의 대답은 깔끔했다. 하지만 이건 이비의 예상엔 없던 말이었다.

그래서 나름 승부수를 띄웠던 이비는 눈을 깜빡이다가 저도 모르게 빽 소리쳤다.


“거, 거짓말하지 마!”

“왜 거짓말이라고 하세요?”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아, 또 거지 같은 말을 해 버렸다…….


“아, 네……. 정확히는 존경심이지만…… 저는 당신 편이에요.”

이비가 눈을 질끈 감자 엔테가 상냥하고도 냉철하게 선을 그었다.

그 은근한 머저리 취급이 이비의 눈을 다시 치켜뜨게 만들었다.

이비는 왠지 분해서 다시 소리쳤다.


“죽이러 와서 바로 안 죽였잖아! 같은 편 되면 살려 준다며! 날 죽이려니까 마음 아파서 그런 거잖아!”

“솔직히 말하면 살아 있는 편이 더 좋기는 해요.”

“거봐!”

“하지만 죽은 당신을 평생 지켜보는 것도 괜찮아요. 그리고 신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나무 조각 같은 걸 모셔 두는…….”

“그건 아니지, 이 자식아!”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버럭 따지던 이비는 밖에 있는 유리 관을 떠올리고 절규했다.

하지만 엔테는 개의치 않고 맑게 웃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당신께 안식을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인걸요.”

“알겠어, 안 할게. 근데 넌 내 걱정 좀 해 주면 안 되니? 나 죽고 싶지 않아…….”

“나중엔 아니던데요.”

“너 진짜 짜증 나…….”

이비는 의외로 말싸움에 강한 엔테 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건들면 아파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엔테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는 생각보다 확고하고 은은하게 미쳐 있었다.


‘하긴 어지간한 또라이가 아니고서야 멀쩡히 살아 있는 관에 넣을 생각은 안 하겠지!’

이비가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는데, 엔테가 다시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너무 겁내지 마세요. 아픈 건 저도 싫지만, 죽고 나면 아픈 일도 괴로운 일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슬슬 안식을 준비하라는 소리다.

이비는 저 말이 농담 같지 않아서 다시 소름이 끼쳤다.


‘이 자식 진심인가? 정말로 날 죽이는 게 별로 큰일이 아니야?’

이비는 밤의 일족은 자기 빼고 죄다 미쳤다는 유비아의 말과 엔테의 지난 만행을 함께 떠올렸다.

투기장에서, 놈은 정말 벌레 잡듯이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 죽은 사람으로 장난을 치며 이비를 놀리기까지 했었다.

게다가 그의 예쁜 얼굴은 피가 묻어 있을 때도 꼭 저런 모양이었다.

이비는 막다른 길까지 몰린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쉽게 흔들릴 녀석을 저쪽에서 보낼 리 없다. 어쨌든 그쪽도 나니까.

그럼 설득하는 건 틀렸나? 하지만…….

이비는 문득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다시 엔테를 쳐다봤을 때, 그는 여상히 웃고 있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주 고요한 눈빛으로.

그건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모든 것을 각오한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비는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하게 예민하고 또 예민해서 결국 또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설마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비가 엔테를 빤히 쳐다보며 운을 뗐다.


“신께서 믿고 맡긴 일인데 거부하면 안 된다고, 그건 배신이자 반역이라고. 맞아?”

이비의 물음에 엔테의 눈썹이 아까처럼 내려앉았다.

그 벌 받는 듯한 표정에 이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했다.


“근데 너 이미 배신했어. 그것도 되게 크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한테 걸린 저주, 네가 허락 없이 벌인 일이잖아. 안 그래?”

엔테의 힘없는 반문에 이비가 일부러 더 매몰차게 따졌다. 그러니까 투기장에서 하녀에게 하듯이.

생각해 보니 엔테는 그때도 이렇게 혼났었다. 게다가 그때도 그는, 왜인지 혼내 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비 아리아테가 나한테 이런 저주를 걸 리 없거든. 자기 속내를 들키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런 짓을 마음대로 저질러 놓고 아직도 편드는 척을 해? 넌 이미 배신자야. 이비 아리아테는 너 절대 용서 안 해.”

이비의 단호한 선언에 엔테의 미소가 더 희미해졌다.

씁쓸하지만 위축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차라리 기다렸다는 듯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럼 저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그렇게 묻는 엔테의 얼굴에 아까 같은 광기는 없었다.


“되도록 천천히 죽이고 싶었어요. 당신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신다면, 꼭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타협도 했고요. 그런데 당신 옆에 생각보다 무서운 게 있어서 예정보다 서둘러야 했어요.”

그저 처연한 고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대로 당신을 죽이지도 망가트리지도 못하면 저는 당신을 배신하게 되는데, 그럴 순 없거든요.”

자신을 다 바쳐 따르는 존재를 배신하지 않으려고 그 존재를 죽여야 한다니. 이비는 정말 지독한 이율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지독한 건 이런 일을 시킨 한 여자겠지.


“가르쳐 주세요. 어제 그랬잖아요. 방법을 찾겠다고.”

하지만 가장 지독한 건 그럼에도 그 여자를 따르는 너.

다른 사람은 나뭇잎 찢듯이 찢어 버리면서 제 마음만 소중히 여기는 너일 것이다.

엔테를 향한 이비의 시선에 연민보다 짙은 거절이 차올랐다. 하지만 엔테는 눈치채지 못한 듯, 아니면 아무래도 좋은 듯 음전히 매달렸다.


“제가 당신을 죽이지 않고 배신하지 않을 방법을 알려 주세요.”

엔테의 요구에 이비는 지난 밤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죽이지 않아도 돼.

―내가 널 혼자 남기지 않을게.

―방법을 찾을게.

살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그에게 해야 할 것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이미 입 밖에 낸 이상 책임져야 할 말이기도 했다.

이비는 자신이 한 말을 곱씹으며 엔테에게 나직이 물었다.


“날 죽여도 괜찮아?”

“괜찮아요. 정말 괜찮지만, 다른 건 산 것보다 죽은 게 더 좋지만……. 역시 당신만은 살아 있는 편이 더 좋아요.”

괜찮다는 거짓말로 시작한 엔테의 말은 갈수록 작아져 끝에 가선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비는 그마저도 알아듣고 나직이 물었다.


“……너 스무 살이랬지.”

맥락을 벗어난 물음에 엔테가 작게 끄덕였다.

그래서 이비는 향이 반쯤 날아간 포도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서 되물었다.


“술은 얼마나 마셔?”

다소 술주정뱅이 같은 말을 해 버렸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이보다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
.

술기운을 빌리기로 한 이비의 앞에 커다랗고 투명한 모래시계가 놓였다.

아까 엔테가 떠다니는 노체의 저주를 긁어모아 요령 좋게 만든 물건이었다.


“깐깐하긴…….”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래시계를 보며 이비가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와인은 틈틈이 홀짝거렸다.


“저 모래가 다 떨어지면 당신을 평생 지켜볼 수 있겠네요…….”

그 옆에 앉은 엔테도 모래시계를 보며 기쁘게 중얼댔다. 역시 이비와 똑같은 와인을 마시면서.


 
반 시간 전, 엔테가 방법을 알려 달라며 항복 아닌 항복을 하자 이비는 일단 술상부터 차려 보라 말했다.

해야 할 이야기가 많고도 깊으니 아예 각을 잡고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신실한 엔테는 그런 방종한 방식이 썩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궁시렁대더니 저 모래시계를 만들어서 앞에 세워놨다.

이비에게 제한 시간을 주겠다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도와달라고 한 주제에 시간까지 재다니.”

“이것도 많이 봐준 거예요. 말했잖아요, 당신 옆에 무서운 게 있어서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고.”

“……유비아 얘기야?”

“그것도 아시네요. 역시.”

엔테가 웃으며 흘린 말에 이비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술의 힘을 빌려 다시 당차게 말했다.


“근데 진작 이렇게 얘기하지, 투기장에선 왜 대뜸 칼춤부터 췄냐?”

“하나도 기억 안 나시나 봐요…….”

“뭐가?”

“무슨 얘기할 틈도 없이 네가 먼저 두 번 정도 죽였잖아요. 화살 맞은 것까지 하면 세 번이네. 아픈 건 정말 싫은데.”

은근슬쩍 너라고 하는 것 봐.

이비는 아픈 건 싫다면서 생글대는 엔테에게서 묘한 살기를 느꼈다.

그래서 네가 먼저 우리 집사 건들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은 걸 곱게 참았다.


“근데, 너 혹시 라우렐 백작 알아?”

“……그 외람된 인간 얘기가 지금 왜 나올까요.”

이비가 돌린 화제에 엔테의 목소리가 살짝 언짢아졌다.

처음으로 듣는 솔직한 목소리에 이비가 갸웃대자, 엔테가 굳은 얼굴로 중얼댔다.


“불경하고 상스럽고 주제를 모르는……. 천박하고 염치도 없는 거머리 같은 인간이잖아요. ……근데 왜 웃으세요?”

“그 인간 욕먹으니까 기분 좋아서. ……근데 어떤 시온 라우렐?”

이비는 엔테가 욕한 시온 라우렐이 그 백작 놈인 줄 알고 실실 웃다가 자기 아저씨인 걸 뒤늦게 깨닫고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시온 라우렐에 대한 엔테의 반감도 견고해서 두 사람은 이걸로 꽤 오래 실랑이를 벌였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적당히 취했을 때였다.


“이제 얘기 좀 해 봐.”

이비가 작심한 듯 말했다.


“내가 날 죽이라고 널 보낼 때 말이야. 대체 어떤 상황이야? 뭐라도 알아야 방법을 찾지.”

“아마네세르가 깨어나서 대부분 죽고 티엔다비스는 바다로 추락해요.”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이비는 그대로 얼어붙어 눈을 깜빡이다가, 힘겹게 속삭였다.


“……대단히 큰일인 건 알겠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아니, 관심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큰일에 제가 감히 기여하는 바가 있나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미친 용이 세상을 부수는데 그 원인이 어느 한 명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그래서 아무도 몰랐어요. 같은 멸망을 수십 번이나 반복할 동안이요.”

이비는 한 명과 수십 번이라는 말 중 어디에 중점적으로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비는 숨을 멈춘 채 멍하니 있다가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쭉 들이켰다. 그러곤 아찔한 머리를 흔들며 중얼댔다.


“그 한 명이 설마 나야?”

“네.”

“정말? 확실해? 내가 무슨 짓을 하는데?”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그걸 왜 몰라!”

“누가 안 가르쳐 주셔서.”

이 자식, 술이 들어가니 점점 불손해지는 경향이…….

아니, 그전에 너, 아깐 다 괜찮은 척하더니 엄청나게 담아 두고 있었구나?

이비는 엔테를 약 올릴 기회를 잡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이비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헛숨만 삼키자 엔테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문제였던 건 확실해요. 그것 때문에 그 둘이 죽자고 싸웠으니까요.”

“그 둘이 누군데……?”

“시온 라우렐과 로히카 세드로요. 그래서 로히카 세드로는 지금 기억 못할 거예요.”

“뭘요……?”

“이 직전의 세계요.”

참 무시무시한 녀석인 건 진즉에 알았지만, 엔테는 말조차도 무자비하고 파격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지금까지 세계를 반복한 건 그 여자인데, 지난 세계에선 시온 라우렐한테 살해당했거든요.”

그래서 이비는 이 얘길 왜 듣자고 했는지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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