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집사와 찻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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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집사와 찻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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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집사와 찻잔
2023.07.10.
그때 디에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여한이랄 것도 없어 기꺼이 눈을 감았다.
그래서 둔통 속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게 다소 의외였다.
“일어났네.”
그때 이비가 자길 멀쩡히 지켜보고 있던 것도 마찬가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널 키우기로 했어.”
심지어 이비는 시작부터 화끈하게 선언했다. 그러곤 이 너덜너덜한 남자가 사경을 헤매던 사이의 일을 설명했다.
“너와 내 자유를 걸고 성녀가 되기로 했어. 탑주도 동의했고.”
그 말에 디에스는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디에스는 낯선 기분을 뒤로한 채 판단했다.
“불가능해. 성녀는 티엔다에서도 격이 높은 귀족이 차지하는 자리니까.”
그러곤 어렵지 않게 더 나은 길을 제시했다.
“내기에 지기 전에 철회해. 그럼 탑주가 너는 용서할 거야.”
“그럼 너는?”
이비가 뾰족하게 되물었다. 디에스는 그 목소리에서 공격의 의사를 읽었지만 별다른 대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정해진 처분을 받고…….”
그때 묵직한 깃털 베개가 퍽 소리를 내며 그를 후려쳤다.
디에스는 이비가 베개를 휘두를 걸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 막지 않은 게 아니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만신창이라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색만 하지 않을 뿐 숨쉬기도 괴로운 중환자였는데, 이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를 실컷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 이 무책임한 놈아!”
이렇게 죽나 싶은 순간, 이비가 베개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네가 그렇게 죽으면 나더러 어쩌라고, 평생 죄책감이라도 느끼라고? 감당 못 할 짓을 한 건 넌데 내가 왜! 네 자살에 날 끌어들이지 마!”
이비의 거센 항의에 디에스는 왠지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잠시 굳어 있다가, 뚜렷한 계획도 목적도 없이 괜한 말을 읊조렸다.
“내 처분은 너와 관계없어. 그건 널 데리고 나가기 전에 이미 확정된 거고, 네가 하는 내기도 승산이 없어서 결국 시간 끌기밖엔…….”
베개가 다시 날아왔다.
“누구 맘대로 승산이 없대, 난 너처럼 포기하고 시작 안 해!”
누가 들어도 얼토당토않은 소리인데, 정작 이비는 진심인 듯 눈을 번뜩였다.
그때 이비의 눈에 담긴 건 단지 굳은 의지가 아니라 세계 정복도 해 낼 법한 무시무시한 집념이었다.
그 야망에 가까운 눈빛에 디에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너는 찾는 사람이 있잖아.”
순간 이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래서 디에스는 넌지시 덧붙였다.
“내기를 시작하면 그 사람을 찾을 기회는 오지 않을 거야.”
차기 성녀를 노린다는 건 앞으로 2년간 티엔다에 묶여 있겠다는 뜻이다.
나아가 실패하면 지하에 갇히고 운 좋게 성공하더라도 성녀 신분으로는 마음껏 다니지 못한다.
그러니 그 누군가를 정말 찾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탑주에게 비는 게 최선이다.
상황은 잴 것 없이 명백했고, 이비 역시 그걸 아는지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도로 씩씩하게 말했다.
“그건 이제 됐어.”
그때 이비의 목소리는 홀가분했다.
“이미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관두려고.”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디에스는 쉽게 눈치챘다.
이비가 포기한 게 아니라 선택했다는 것을.
무자비한 갈림길에서 누군가를 찾는 대신 내쳐진 개를 살리기로 한 것을, 그리고 그 결정에 아파하고 있다는 것도.
그걸 깨닫는 순간 디에스의 마음이 다시 술렁였다.
심장 근처에 웬 와인잔이 놓여, 어디선가 부주의하게 쏟아붓는 와인이 잔을 가득 채우다 못해 둥근 옆면을 타고 올라 요란하게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그 낯선 기분에 디에스가 이비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이비가 마지막으로 베개를 휘둘렀다.
“그러니까 토 달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이 똥개야!”
그 말에 가느다란 다리로 견디던 와인잔이 결국 넘어졌다. 심지어 파삭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럼에도 잔은 비지 않았다.
술인지 비인지 이비가 정화한 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그치지 않고 쏟아져, 잔뿐만이 아니라 그 텅 빈 곳까지 넘치게 채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에스는 상당히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어 그래, 라고.
.
.
.
다행히 디에스의 새 주인은 그를 시골 개로 전락시키는 대신 집사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 후 탑이 아니라 저택에서 지내며 낯선 생활을 시작했다.
이비는 티엔다 귀족계로 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학습했고 디에스도 시간을 쪼개며 이비를 수발했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그런데 디에스는 그 와중에도 이따금 걸음을 느리게 하는 기분에 휩싸였다.
사냥개였다면 조용히 무시했을 감각이지만, 집사가 된 디에스는 그것을 묻어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내 깨달았다.
이비의 집사는 로히카의 사냥개보다 어려운 역할이라는 것을.
사실 디에스는 새 주인을 만족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 희생과 돌봄에 보답할 능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처분은 예정에 없고, 그 미지근한 현실은 오히려 그를 어렵게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그 감정의 이름은 부채감이었다.
디에스는 은연중에 이비가 찾던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그의 대신이 될 수 있을지, 이비가 실망하고 후회하진 않을지를 저도 모르게 두려워했다.
그리고 감정을 모르는 자신에겐 승산도 가망도 없음을 잠자코 인정해 버렸다.
개가 아니라 인간이 될 것을 덜컥 요구받은 남자는 그렇게 자각도 못 한 채 스스로를 좀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비의 예절 공부를 위해 디에스는 도자기 부티크를 찾았다.
그리고 거기서 익숙한 막막함을 마주했다.
티엔다의 격조 높은 부티크답게 그곳은 호화롭고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있었다.
디에스에겐 그게 여러모로 과하게 다가왔다.
비슷한 듯 다른 것이 너무 많았다. 모두 최선을 다해 반짝이는데 형태도 색상도 모두 달랐다.
무감한 개는 이 거창한 세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둘러보는 대신 예산에 맞춰 추천받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디에스는 평소처럼 신속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대신,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찻잔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러곤 저 찻잔마다 사람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 찻잔들은 바람이 흩어놓은 구름처럼 우연히 펼쳐진 게 아니라 모든 부분에 사람의 의도와 손길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마련된 완성품은 일종의 자기주장이었다. 깊은 고민의 흔적이고, 감출 수 없는 자아의 조각이며, 최선을 다해 정제한 감정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 상황이 자신의 고장 난 상태를 고스란히 투영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채로운 감각으로 가득한 세상과 그걸 이해하지 못해 새 주인 앞에서 점점 비루해지는 개.
누군가 작정이라도 한 듯 그의 처지를 이 공간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 공교로운 일치는 묘한 끌림마저 일으켰고, 디에스는 어느새 찾기 시작했다.
왠지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것이 여기 어딘가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찾아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만져 보면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누구보다 공허하고 누구보다 다채로운 너를.
적어도 지금보다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디에스는 거의 헤매듯이 찻잔 사이를 옮겨 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눈에 박히듯 들어온 찻잔은 물빛을 띠고 있었다.
전체적인 선은 한 획으로 완만히 떨어졌지만 입술과 손길이 닿는 테두리와 손잡이는 금박이 얇게 덧그려 있었다.
화사한 문양 대신 오팔 같은 광택을 가졌고, 물결치는 곡선을 이루고 있어서 각도를 조금 돌리는 것만으로도 이전과 다른 빛깔을 드러냈다.
디에스는 그 찻잔을 보고 우두커니 멈춰 섰지만, 아름답다거나 편안하다는 등의 소감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다만 생각했다.
저 찻잔의 면면이 이비가 노래할 때 느껴지는 것과 똑같다고.
결국 디에스는 홀린 듯이 그 찻잔을 사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기회가 될 때마다 부티크를 방문해 새로운 찻잔을 하나둘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집된 찻잔엔 디에스만 아는 의미가 담겼다.
이비가 처음 산 찻잔을 홀랑 깨 먹었을 땐 채도가 낮고 선이 밑으로 둥근, 분위기도 무게 중심도 내려앉은 찻잔을 새로 구입했다.
이비가 드디어 귀족들 앞에 나섰을 때,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뛸 듯이 기뻐한 다음 날엔 연분홍색 장미가 새겨진 상앗빛 백자를 샀다.
처음으로 악몽을 꾸고 로히카의 잔상에 시달린 날엔 새카맣고 광택이 짙은 찻잔을, 미엘의 근황이 문득 궁금해진 날엔 투명한 보석이 테를 장식하는 초록빛 찻잔을 골라서 가져왔다.
그렇게 수집한 찻잔이 진열장 절반을 채웠을 때, 디에스는 그 찻잔에 어울리는 이름을 차츰 알 수 있었다.
진열장 하나를 다 채웠을 때는 더 이상 이비의 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다.
나아가 진열장을 추가로 제작하게 됐을 땐 다소 수치스러워하며 받아들였다.
자신이 평균 이상의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고, 그게 남자답지 않다는 걸 내심 신경 쓰는 전통적 편견마저 보유한 인간인 것을 말이다.
***
승강기는 아직도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로히카의 물음을 곱씹다 힘없이 웃었다.
옛 주인은 믿기 힘든 눈치지만, 디에스는 의외로 멀쩡한 인간이었다.
그의 진열장을 가득 채운 찻잔의 각기 다른 형태와 이름이 그 증거였다.
비록 지금은 불길에 휩싸여 모두 부서졌지만, 그 역시 지극히 건전한 디에스에겐 크게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찻잔을 보며 곱씹던 감정은 이미 다 그의 것이고, 애당초 가장 특별한 찻잔은 이비가 진즉에 깨 먹었다.
그래서 그간 모은 것이 단숨에 사라진 게 허망하면서도 오히려 보낼 때가 되었다는 심정이었다.
게다가 로히카에게 찻잔에 대해 실토한 이상, 그게 불길 속으로 사라진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아직 남아 있다면 탑주가 이비에게, 이비가 하녀들에게 말을 전해 디에스를 궁지로 몰아넣을 게 뻔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높은 확률로 집사를 포박해 찻잔의 의미를 추궁할 테고, 그러다 보면 기어이 특정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시달릴 때마다 독버섯같이 새빨간 찻잔과 보색 꾸밈이 정신 사나운 찻잔 따위를 사들였다는 걸. 어쩌면 그 찻잔에 ‘일상의 공포’, ‘원한’ 같은 이름이 붙었다는 것까지도.
디에스는 재차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겨우 머금었던 웃음을 도로 지웠다.
디에스는 이비의 집사로 지내며 그간 몰랐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감정을 유예한 기간이 긴 만큼 아직 모르는 것도 가득했다. 그리고 그 중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있었다.
예컨대 상실, 결별, 사무치는 그리움 같은 것은 그의 생에 아직 없었다. 그리고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어왔다.
왜냐하면 잘못될 확률은 이비보다 본인이 지극히 높아서, 이비를 두고 갈 걱정은 했어도 그 반대 경우는 상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그랬는데 상황이 변했다.
디에스는 이대로 이비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디에스의 진열장엔 찻잔이 가득한데, 그 대부분은 이비를 통해 의미를 얻었다. 그 찻잔의 수많은 이름도 이비가 준 것들이었다.
그런 이비가 사라졌을 때 디에스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게 될지 두려웠다.
그래서 한없이 밑으로 향하며 이 낯설고 버거운 감정을 견딜 때였다.
밤에 잠겨 어둡던 하늘이 돌연 새파랗게 밝아졌다.
‘뭐지?’
그 이질적인 빛에 디에스는 놀라서 승강기의 틈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낮이 됐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저 환한 빛은 호수 밑바닥에서 마냐냐가 퍼붓는 빛이었다.
‘이비, 너…….’
디에스는 그 빛을 보고 곧장 이비를 떠올렸다. 마냐냐와 저렇게 공명할 수 있는 건 이비뿐이니까.
생존 신고인지 위급신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직 살아 있는 건 확실했다.
디에스는 그 빛을 보고 숨을 멈췄다가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역시 이비는 아직 발버둥 치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그러니 이렇게 가라앉을 때가 아니었다. 통찰 운운하며 암울한 미래를 점칠 때도 아니었다.
이비가 터트린 빛이 검게 잠기던 디에스의 멱살을 잡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로써 디에스는 여실히 깨달았다.
역시 그는 이비가 자신을 구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길 염려도 보낼 걱정도 필요 없이, 지금처럼 함께 있고 싶었다.
그걸 다시 인정한 순간 승강기가 탑의 지하에 도착했다.
그곳엔 로히카의 사냥개들이 배신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디에스는 그 앞에서 묵묵히 사냥개의 옷을 다시 입었다. 그리고 수 년 만에 형제들과 달리며 마음먹었다.
이비를 되찾고 이 지긋지긋한 성녀 발탁식 마저 끝나면, 새로운 찻잔을 사러 가기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만.
어떤 걸 고를진 봐야 알겠지만 어쩐지 처음 산 찻잔과 비슷한 걸 찾을 것 같다.
그 후엔 아무도 깨트리지 못하게 철저히 관리할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지금으로선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그 찻잔의 이름은 완벽한 구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