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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고장 난 남자 (115/129)


115화. 고장 난 남자
2023.07.06.


탑주의 방에서 나온 디에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무언가가 등 뒤를 낚아챌 것 같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평정을 가장하며 그 긴긴 복도와 장식품처럼 늘어선 시종들을 지나쳤다.

승강기에 올라타자 사슬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와 함께 로히카가 도사리는 공간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제야 디에스는 여태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 번 다신 안 할 거야…….’

저 로히카 세드로를 제 발로 찾아가는 짓은, 정말 두 번 다신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한 만큼 수확도 있었다.


‘탑에서 나서면 금방 찾을 수 있겠지.’

탑주의 사냥개들은 추적에도 뛰어나니까 이비를 찾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하지만 디에스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비가 그때까지 무사하다는 보장이 없는 데다가 이비를 찾고 난 후엔 각자 다시 대립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비도, 로히카도, 라우렐 백작도.

디에스는 착잡한 기분으로 몇 시간 전에 헤어진 백작의 낯짝을 떠올렸다.

그 얼빠진 백작은 지금 유비아와 함께 엔테를 쫓고 있다. 이비의 안전이 최우선이기에 디에스가 마지못해 한 양보였다.

엔테라는 밤의 일족은 강하다. 그리고 유비아가 엔테를 감지하는 것처럼 그쪽에서도 유비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엔테를 따라잡고 제압하려면 라우렐 백작이 유비아와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비가 엔테와 꼭 같이 있을 거란 보장은 없기에 탑의 도움도 필요했고, 결국 상황은 한층 복잡해졌다.

디에스는 이비를 찾기 위해 이 둘을 끌어들인 게 과연 잘한 짓인지 의문이었다.


‘우선 이비를 찾으면 퇴로를 마련하고…… 타르데스의 딸을 가진 백작을 따돌릴 방법이…… 바옌 공작의 시선도 별로 개의치 않는 분위기. 게다가 탑의 개들이 어떻게 나올지…….’

디에스는 뒷일을 생각하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승강기의 벽에 등을 기대며 암담함을 견뎠다.

이비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어 그저 막막했다. 답답하고 두렵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슬펐다.

마치 안개에 파묻힌 밤,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버려져 혼자 축축한 흙먼지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 버거운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몸을 기댄 채 잠시 견뎠다.

그 와중에도 승강기는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승강기가 층을 내려갈 때마다 캄캄한 하늘이 파라락 넘기는 책장처럼 나타나고 사라졌다.

자정을 넘긴 하늘은 야속할 정도로 어두웠고, 왜인지 로히카의 마지막 물음을 떠올리게 했다.


―왜 찻잔이니?

―찻잔을 잔뜩 모아서 애지중지한다며. 어쩌다 그런 취미가 생긴 거야?

상상도 못 했다. 설마 그 탑주에게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그리고 자신이 그 답을 하게 될 줄도.

사실 지금까지 그에게 찻잔에 대해 묻는 사람은 많았다.

그가 찻잔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할 때부터 이비도 여러 번 영문을 물었다. 저택의 하녀들은 끈질기게 심문해 왔고, 도자기 부티크의 주인도 찻잔을 자주 사러 온다며 그에게 관심을 보였었다.

하지만 디에스는 그때마다 적당히 얼버무렸다. 찻잔을 사랑한다고 매도당하게 된 것도 그 탓이지만, 디에스는 찻잔 수집의 이유를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로히카의 추궁은 역시 피하지 못했다. 단지 두려워서가 아니라 옛 주인은 이미 알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인간의 됨됨이를 조각조각 잘라 낸 개에게 무언가를 아름답게 여길 재주는 없다는 걸.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라는 걸.

어쩌면 탑주의 사냥개는 라우렐 백작과도 비슷하다.

해야 할 일을 위해 철저히 도구화되었다는 점은 정확히 같고, 이는 성녀나 지하의 목소리 노예들도 마찬가지다.

근본이 같은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들은 동일한 맥락을 지녔다. 차이라고 할 것은 각자의 역할과 필요에 따라 부여된 배경뿐이다.

그래서 티엔다에 영광을 가져오거나 비스에 희망을 전해야 하는 백작과 성녀는 고귀하게 나고 자라 인형이 된다.

지하에 가둘 목소리 노예들은 자질만 있으면 닥치는 대로 수집되고, 암약하며 온갖 더러운 일을 해야 하는 개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길든다.

특히 탑주의 수족이 되어야 하는 개들은 철저히 억압되고 조율된다. 소위 감정이나 자아라고 불리는 것까지도.

그래서 로히카도 간과했다.

감시자가 피감자를 아끼게 되는 싸구려 신파 따위, 적어도 자신이 기른 개에게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짓밟아 놨어도 살아 있는 한 가능성은 있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것조차도 새롭게 이어지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었다.

그 이어짐은 기적이라 불러도 좋았고, 디에스의 기적은 물론 이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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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완벽한 사냥개였던 디에스는 한 여자애를 지켜보라는 주인의 명령이 특별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임무의 난이도와 방향이 평소와 다르다거나, 자신이 투입될 정도로 저 여자애가 특별한 존재인가 하는 추론도 감히 하지 않았다.

명령하고 결정하는 건 주인의 권한이기에, 개가 통찰하고 판단할 것은 맡은 임무를 수행할 방법뿐이기에 다른 허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디에스는 아무 관심 없이 다만 신중하게 이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마네세르의 눈을 가진 그는 이비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곧장 알아챘다.

이비는 확실히 특이한 존재였다.

무난한 색채를 가진 대개의 사람과 달리, 그 애는 별 하나를 간직한 밤하늘 같았다.

그래서 디에스는 저 애가 오래 못 버틸 거라고 확신했다.

그 애는 밤하늘을 밝히는 별이 아니라 가진 걸 다 끌어모아 별 하나만 간신히 켜 둔 광활한 밤이었다.

티끌 같은 빛으로 연명하는 하루살이였고, 가련할 정도로 짙은 어둠이었다.


 
그러니 가망은 희박했다. 겉으로 아무리 씩씩하게 굴어 봤자, 그 역시 꺼지기 직전의 촛불 같은 몸부림에 불과했다. 저토록 침잠한 인간의 말로는 망가지거나 스스로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비가 스스로 해칠 가능성도 고려하며 주인의 명령대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가 통찰하고 예견한 것과 달리 이비는 분명 버거울 하루를 악착같이 살아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발악하고 또 그다음 날을 마지막 날 삼아 발악했다. 그러기 위해 밤중에 몰래 울더라도 날이 밝으면 다시 이를 악물었다.

결국 통찰이 빗나갔지만, 디에스는 놀라지도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았다.

디에스에게 그것은 예측의 실패이자 새로 수집할 필요가 있는 현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더 깊이 알고자 시도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애가 가진 복잡하게 뒤엉킨 것들을 보며, 동질감과 이질감이라는 전혀 상반된 감정을 깨달았다.

이비의 밑바탕은 다른 목소리 노예나 지하의 시종들보다는 차라리 디에스를 비롯한 사냥개들과 더 비슷했다.

그나마 제대로 된 인간들은 로히카의 위압에 억눌린 채 아련히 그리워한다. 요컨대 그들이 사랑했던 것, 사람, 장소, 사물이나 시절 같은 것에 마음을 의존한다.

하지만 이비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누굴 찾아야 한다며 악을 쓰지만, 그 갈망도 어딘가에 뿌리를 둔 보통 사람과는 여실히 달랐다.

그건 차라리 신념에 가까웠다. 어쩌면 종교라 해도 좋았다.

그건 자신이 겨우 밝혀 둔 초라한 빛을 꺼트리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고, 간절하다 못해 처절한 생을 향한 의지였다.

그래서 디에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텅 빈 실체에는 동질감을, 그럼에도 발버둥 치는 선택에는 이질감을 느꼈다.

딛고 설 근본이 없음에도 허우적대며 중심을 찾는 그 애가 익숙하고도 이상했다.

어쩌면 신기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들여다보았고, 차츰 동화되었다.

그 애가 날뛰고 덤비고 재잘대며 웃을 때마다 무언가를 배웠다. 그 애가 느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함께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철저히 갈아 둔 마음에 미약한 감정이 번져 봤자 낯설기만 할 뿐, 심지어 디에스는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용의 통찰을 흉내 내는 주제에 정작 제 마음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워낙에 희미한 데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그리고 이게 주인을 향한 반역이라는 걸 은연중 알아서 굳이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냥개는 여전히 사냥개인 채 미세한 결함을 감추고 주인을 섬겼다.

그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게 로히카의 패착이었고, 그래서 로히카는 항상 성공해 온 일을 처음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사냥하는 것에.

디에스는 이처럼 예정도 계획도 없이 주인을 덜컥 배신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감정을 잘 알 수 없었다.

그에게 감정이란 정해진 일을 태연히 망쳐 버리는 일종의 고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고장 난 김에 고장 난대로 행동했다.

로히카에게 곧 죽게 될 걸 뻔히 알면서 굳이 제 남은 시간을 이비에게 쓰기로 한 것이다.

주인은 지극히 두렵지만 죽는 것엔 거부감도 두려움도 없었다.

달리 말하면 생에 특별한 미련도 없는 셈이라, 최후의 시간은 미련이 가득한 그 애한테 할애했다.

결국 탑에서 도망친 두 사람은 티엔다에 숨어서 닷새, 티엔다로 물자를 조달하는 상단에 숨어 또 나흘. 그렇게 꼭 열흘 만에 비스의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이비는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 대륙의 밑면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 가야 할 곳이 있어.”

거기가 어디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때 이비는 들뜬 건지 벅찬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울먹임을 참고 있었다.

디에스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도 이 감정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고장 난 채 되는대로 지껄였다.


“바로 움직이면 더 일찍 잡힐 거야. 조금이라도 버티려면 우선 숨어야 해.”

결함과 별개로 디에스의 통찰은 여전히 우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들이 로히카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음을, 결국 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을 처음부터 단정 지었다.


“만약 잡히면 내가 널 끌고 나왔다고 해.”

“뭐야, 그게…….”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지 않은 건 이비였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그 소리야? 어차피 잡힐 생각이면 대체 뭐 하러 도망친 건데.”

그러게.

이비의 물음에 디에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그러곤 아마 고장 난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이 불굴의 여자애가 기어이 탑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걸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게 왜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러니 이건 고장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생각을 할 리 없다.

결국 형제들에게 붙잡히고, 다시 탑으로 끌려가고, 난생처음 주인의 격분을 마주했을 때 그는 생각했다.

로히카의 진노에 온몸이 찢기면서도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생각했다.

고장 나길 잘했다고.

그는 이제 정말 죽어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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