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개와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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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개와 주인
2023.07.03.
“네 목숨, 이제 내가 가져가도 되니?”
로히카가 부드럽게 물었다.
“감히 내 앞에 나타난 건 죽여도 좋다는 뜻이잖아. 안 그래?”
옛 주인이 내비치는 상냥한 독기에 디에스는 손 떨림을 멈추었다.
“대답이 없는 건 나 좋을 대로 하라는 건가?”
로히카가 키득대는 소리에는 기꺼이 긍정했다. 주인이 좋을 대로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2년. 디에스가 로히카에게 벗어난 시간이다.
그 짧지 않은 시간, 그는 무감하던 세상에 색채를 입히며 한 여자의 개가 아닌 한 아이의 보호자로 사는 법을 익혔다.
그래서 로히카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설령 두려워하더라도 예전처럼 복종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제 그에게 중요한 사람은 로히카가 아니라 이비니까.
그런데 로히카가 다정히 웃는 순간 그의 각오는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가 벗어났다고 생각한 시간은 사실 로히카가 놓아준 시간에 불과했고, 그의 주인이자 지배자는 여전히 로히카 세드로였다.
그 사실을 가장 강하게 인정하는 건 다름 아닌 디에스 자신이었다.
그에게 각인된 본능이 몰아치듯 요구해 왔다.
주인에게 굴종을, 충성을, 그리고 맹목을.
결국 디에스는 로히카의 개로 살던 시절로 되돌아간 착각에 빠졌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그건 아늑했다. 평화로웠고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새삼 깨달았다. 탑주라면 무조건 질색하는 이비와 달리, 디에스 본인은 단 한 번도 로히카를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랬다. 디에스는 자신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로히카를 증오하지 않았다. 여전히 주인으로 인정하는 까닭이었다.
결국 디에스는 로히카의 물음에 답할 필요를 못 느꼈다.
어떤 처분이든 주인의 뜻대로. 이게 그의 마음에 새겨진 대답이었다.
다 잘라 냈다고 생각한 과거가 늪처럼 디에스를 끌어당겼다. 그 관성 같은 비굴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지만 디에스는 굴복하기 직전에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렸다.
“……아니오.”
그래서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옛 주인의 위협을 거부했다.
“제 목숨은 이비의 소관입니다. 제가 임의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개에게 어울리는 대답이네.”
디에스의 대답에 로히카가 야멸찬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나긋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얘야, 주인을 물고 도망친 녀석이 그런 소릴 해 봤자 빈정대는 걸로밖에 안 들려요. 그리고 내가 묻는 건 네 주인이 누군지가 아니라 네 자격이란다. 너한테 숨 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 말에 로히카의 발끝을 쳐다보던 디에스가 주저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로히카는 아직 손아귀에 쥔 뱀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덕분에 디에스는 그 아름답고 두려운 여자를 감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만들고 기른 주인을 주시하며, 디에스는 나직이 대답했다.
“자격은 없지만 살고 싶습니다.”
“그럴 리가.”
하지만 로히카는 이마저도 가볍게 부정했다.
“살고 싶다니, 나는 너한테 그런 걸 가르쳐 준 적이 없어. 죽음을 거부하는 법도, 삶을 바라는 법도, 내게 거역하는 법도. 원래는 네가 몰라야 하는 것들이야. 안 그래?”
로히카가 웃는 눈으로 디에스를 바라보았다.
주인과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디에스는 다시 상기했다. 자신이 무엇인지, 로히카가 어떤 존재인지도.
로히카의 말이 맞다. 그는 자신의 개에게 쓸모없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 탄생부터 존재까지, 오직 자신을 위해 조율했을 뿐이다.
때문에 디에스는 모른다. 자신의 부모도 출신도. 이건 다른 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태어났다기보다는 준비된 쪽에 더 가까웠고 뚜렷한 목적을 위해 길러졌다. 이름도, 누군가에게 안겨 본 기억도 없이.
디에스의 첫 기억도 죽지 않으려고 움직이던 나날이었다.
그는 늘 도망쳐야 했고 때론 싸워야 했으며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리고 형제이자 경쟁자였던 이들의 죽음을 빈번히 지나쳐야 했다.
그 과정에 의문은 없었다. 엄중한 보상과 처벌만이 있을 뿐.
그렇게 살아남은 개가 주인을 만난 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직후였다.
태어난 지 14년째였을 것이다.
함께 길러지던 개의 수가 절반 이하로 줄었을 때, 개들은 아마네세르의 조각을 눈에 심었다.
용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건 잔뜩 무뎌진 개들에게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때도 개의 절반가량이 또 목숨을 잃었다.
디에스는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마지막에 깨어난 보결이었다.
그는 로히카의 열 마리의 사냥개 중 가장 늦게 완성된 개였고, 그래서 디에스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아마네세르의 눈을 얻은 사냥개들은 새로운 시야를 얻었다.
이제 그들은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대로 풀어 주었다면 자연스레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그래서 로히카는 그 사냥개들에게 가장 먼저 자신을 보게 했다.
그리고 개들은 이해했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직 그것만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인 것도.
이미 십 년도 더 된 일인데, 디에스에겐 로히카를 처음 본 순간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절대자의 존재감은 지금도 여전했다.
로히카 세드로의 은근한 미소에 담긴 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욕망, 오랜 시간 지켜 온 반역의 의지, 무한히 거대한 사랑, 그리고 달이 사라진 밤의 서늘함.
그건 마치 노체의 저주처럼, 또는 유비아처럼 두렵고도 위태롭게 뒤틀려 있다.
그러니 로히카가 자신의 개를 완벽히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이 아니라 사실이다.
“쓸데없는 생각 못 하게 조각조각 잘라 놨는데, 너는 어쩌다 그 모양으로 망가진 걸까?”
이어진 물음 역시 비하가 아닌 지극히 타당한 의문일 뿐이었다.
“너 정말 살고 싶어진 거니?”
로히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물었고, 디에스는 그 질문의 의미를 깊이 숙고했다. 그러곤 앞서 그런 것처럼 낮고 희미하게 대답했다.
“네.”
“왜?”
“이비가 저를 구하게 하고 싶습니다.”
디에스의 대답에 로히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독 사과 같은 탑주가 이제껏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로히카는 보기 드물게 놀란 얼굴을 하더니, 한참 후에야 탄식하듯 웃었다. 그러곤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정말이지 주제넘긴.”
로히카는 허를 찔린 듯 홀가분히 속삭이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하게 웃었다.
“눈치챘구나, 그 애의 취미. 아니, 버릇이라고 해야 하나? 뭐든지 구해서 증명하고 싶어 하지. 아주 귀엽고 성가시게 말이야.”
이번엔 디에스가 내색 없이 놀랐다. 디에스 역시 로히카가 이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애야 늘 그래왔으니 그렇다 쳐도, 너는 참 의외야. 설마 그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로히카가 헛웃음을 섞어 중얼댔다. 그래서 디에스는 또 한 번 당황했다.
로히카는 마치 이채를 느낀 듯 말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이비가 아니라 디에스였다.
자신이 직접 길러서 철저히 도구로 취급하던 개에게 이채라니. 그건 전혀 탑주답지 않은 태도였다.
덕분에 디에스도 기분이 묘해졌지만, 지금은 이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이비가 실종된 지 최소 하루가 지났습니다.”
주저하며 눈치를 보던 디에스는 결국 로히카를 채근했다.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추적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급한척하지 마, 믿는 구석이 또 있잖아.”
하지만 로히카는 그 역시 비웃음으로 무시했다. 그러곤 이미 다 안다는 듯 은근히 덧붙였다.
“최근에 만났더라? 내 친구.”
그 말에 디에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자 로히카가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주제에 날 찾아오다니, 정말 괘씸하다니까.”
유비아의 이야기였다.
로히카는 이미 디에스가 유비아를 만난 걸 알고 있었다.
디에스가 로히카의 격분을 예상하고 얼어붙자, 로히카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뭐야, 새삼. 긴장하지 마, 네 목숨은 이비의 소관이라며. 아직은 내기 중이니 나도 어울려 줘야지. 아무리 괘씸해도 말이야.”
다행히 로히카는 예전에 그런 것처럼 날 것의 진노를 쏟아 붓지 않았다. 도리어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좋아. 이비는 찾아 줄게. 그 애가 귀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 이대로 잘못되면 아주 곤란하니까요.”
하지만 이 와중에도 로히카는 지독했다.
“근데 찾는다고 곱게 모셔 줄 생각까진 없으니까 너도 열심히 애써 보렴. 내 친구랑 같이, 발탁식에 늦지 않게 말이야.”
로히카가 잔인하게 웃었지만, 디에스는 그런 주인조차도 증오할 수 없었다.
다만 조력을 얻어 낸 것에 만족하며 인사할 따름이었다.
“참, 그리고 하나 더.”
그런데 디에스가 돌아서자 로히카가 그를 불러세웠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왜 찻잔이니?”
디에스가 그 맥락 없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자, 로히카는 친히 부연했다.
“찻잔을 잔뜩 모아서 애지중지한다며. 어쩌다 그런 취미가 생긴 거야?”
디에스는 그 질문이 로히카의 모든 심술보다 당황스러웠다.
질문의 결 자체가 이상했다. 이 물음은 마치 로히카가 디에스에게 인간적인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성의껏 대답하렴, 그래야 나도 성의껏 도와주지.”
이 와중에도 로히카의 무도함은 건재했고, 머뭇대던 디에스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뭘?”
“새로 알게 된 감정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디에스는 그렇게 답한 후 이어질 질문을 기다렸다.
그런데 로히카는 더 이상 묻지도 디에스를 붙잡지도 않았다. 혼자 묘하게 웃으며 손안의 뱀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기하던 디에스는 로히카의 용무가 끝난 걸 알고 다시 묵례했다.
한때 개였던 남자가 떠나자, 혼자 남은 로히카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푸념했다.
“아, 이번 세상은 대체 왜 이 모양이지?”
로히카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대며 손에 쥔 뱀을 흔들었다.
“너도 그렇고, 쟤도 그렇고, 이비도 그렇고, 그 백작 녀석도 그렇고. 전부 어쩌다 이렇게 됐담?”
로히카는 덧없이 하소연하며 매끈하게 잘생긴 뱀을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으며 관찰을 끝낸 뱀을 뭉개 버렸다.
으드득 소리와 함께 로히카의 뺨에 피가 튀었다. 우아한 블라우스도 엉망이 되었지만 지금은 호들갑을 떨 기분이 아니었다.
로히카는 한참 동안 쓰다듬던 뱀을 그대로 망가트려 내던졌다. 그러곤 반쯤 웃고 반쯤 찡그린 얼굴로 다시 중얼댔다.
“진짜 엉망이네, 짜증 나게.”
로히카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지만 이내 기분을 추슬렀다.
알 수 없는 변수가 잔뜩 생겼지만 괜찮다. 이 불확실성이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로히카는 이번에도 기꺼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구원을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