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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나약하고 다정했다 (111/129)


111화. 나약하고 다정했다
2023.06.22.


드디어 비가 그쳤다.

그 쾌청한 하늘 아래, 까탈스러운 바옌 공작도 모처럼 환히 미소 지었다.


“예, 오랜만이지요. 간만에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은 자신을 아는 체하는 타르데스의 따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자 따님도 노인에게 이마를 맞대며 화답했다.

예장을 갖춘 공작은 가신 일곱 명과 호위 열두 명을 대동한 채 티엔다의 끝, 타르데스의 딸들이 머무는 바람 언덕을 찾았다.

그 후 비행에 나설 때만 해도 공작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티엔다를 벗어나 비스의 바람 계곡에 가까워지며, 생각도 못 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저게 뭐지?’

타르데스의 따님들이 거니는 티엔다의 바람 언덕과 비스의 바람 계곡은 본디 평화로운 곳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 저 계곡 아래 백 명은 족히 될 법한 무리가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전당에 있어야 할 놈들이 왜 여길…….’

공작은 계곡을 장악한 놈들의 정체를 곧장 알아챘다.

흑색 제복, 그리고 고삐를 문 타르데스의 따님들. 저들은 동녘의 감시자들이었다.

그 낯설고 살벌한 광경에 가신들이 수신호를 보내왔다. 일단 티엔다로 돌아가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부아가 치민 바옌 공작은 도리어 땅으로 내달렸다.

쿠웅! 수행원들마저 따돌린 노공작은 감시자들의 대열 사이로 내리꽂히듯 착지했다.

그러곤 누굴 먼저 족칠지 궁리하며 놈들을 노려보는데, 한 감시자가 공작을 맞이했다.


“용맹한 바옌의 주인을 뵙습니다.”

경계의 부사령관인 모렌 아르코였다.


“공작님께서 오실 줄 몰라 영접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내려오신 용무를 밝혀 주시면 이제라도 신속히 돕겠습니다.”

“이거야 원, 뭐부터 따져야 할지 모르겠군.”

불온한 짓을 벌인 주제에 공작을 대하는 모렌의 태도는 태연했다. 그래서 공작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보고는 자네 남편이 내게 하는 거지 내가 자네에게 하는 것이 아닐세. 언제부터 자네가 내게 용무를 물을 수 있었나?”

“송구합니다, 공작님.”

“됐고, 왜 여기까지 기어 나왔는지나 고하게.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내 이 일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걸세.”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합법적인 군사 행동입니다. 바옌 군의 사령부와 이미 합의한 일이니 모쪼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공작이 매섭게 따져 묻자 모렌도 만만치 않은 태도로 증서를 내밀었다.

바옌 공작은 존재조차 모르는 그 협약서에는 타르데스 전당과 바옌 군이 협력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 협력은 말장난일 뿐, 그 안에 담긴 건 바옌 군이 경계의 감시자들에게 비스 전역을 마음껏 쏘다닐 권리를 부여한다는 아주 호구 같은 내용이었다.

공작은 이 얼토당토않은 협약을 보고 얼이 빠졌다. 그의 모자란 조카 놈이 대책 없이 저지른 일이 분명했다.

이러니 절차상 문제 될 건 없지만, 공작은 무책임한 조카 놈과 달리 무장한 감시자들이 티엔다 바로 밑에 진을 친 꼴을 봐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라우렐이라 한들 이렇게 제멋대로 무리 지어 다니는 건 대륙에 대한 모반이자 위협이었다.

그래서 공작은 모렌을 지나쳐 감시자들의 대열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대열 앞으로 이동하자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왕관 같은 금발을 가진 장신의 청년, 라우렐 백작이었다.


“여기서 보는군. 인사할 기분은 아니니 먼저 묻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공작이 카랑카랑하게 소리쳤지만, 백작은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공작은 사납게 눈을 치떴다가 놈의 묘하게 수척한 얼굴을 보고 호통을 보류했다.


‘설마…….’

공작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백작을 빤히 쳐다보다가, 뒤따라온 모렌에게 말했다.


“아까 내 용무를 돕겠다고 했지. 나는 아리아테를 에스코트하러 왔네만, 협조해 주겠나?”

아니나 다를까, 그 예쁘장한 차기 성녀를 언급하자 백작의 안색이 굳었다. 그래서 공작도 얼이 빠졌다.

며칠 전 바옌 공작은 비스의 투기장을 고발한 이비에게 보상을 약속했다.

덕분에 바옌의 내부 사정이 공작에게 퍽 유리해진 터라 재물로든 우정으로든 양껏 치하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깜찍한 성녀 후보는 또 뜻밖의 요구를 해 왔다.


―나흘 후에 비스로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 공작님께서 직접이요.

소박한 듯 무엄한, 동시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기분파인 공작은 기꺼이 어울려 주기로 했고, 바로 오늘 예장까지 갖추고 내려온 거였다.


“왜 대답이 없나? 내가 어려운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공작의 채근에 모렌이 입을 굳게 닫았다. 그 꼴에 공작이 결국 혀를 찼다.


“아리아테가 왜 이런 부탁을 하나 했더니, 비스에 아녀자를 노리는 도적 떼가 어슬렁대고 있었군. 이건 나와 바옌의 불명예다. 책임지고 질서를 잡지는 못할망정, 이런 불한당들이 활개 치게 두다니.”

공작의 모욕적인 개탄에 모렌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가당치 않은 태도에 공작도 으득 이를 갈았다.

정말 뭐부터 따져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전당 놈들이 덜떨어진 바옌을 구슬려 역할 이상의 권한을 득한 것도 문제고, 놈들이 정말 경계 밖으로 나와 비스와 티엔다의 길목을 막아선 것도 문제고, 그걸 바옌 공작이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미친 용을 감시한다는 핑계로 막강한 힘을 비축한 군대가, 갓 스무 살 된 여자애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는 작금의 상황이 가장 얼토당토않은 문제이자 비극이었다.

정녕 기가 막힌 공작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실소 비슷한 한숨만 연신 터트리는데, 감시자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달려왔다.

적발을 가진 젊은 사내였다.


“처음 뵙습니다, 공작님. 저는 이비 아리아테 님의 집사입니다.”

“무척 반갑군. 내가 자네 주인을 신속히 뵙고 싶은데, 지금 어디에 계신가?”

“이비 님은 아직 오고 계십니다. 그러니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살펴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공작이 질린 얼굴로 빈정대고 감시자들이 삼엄하게 바라보는 와중인데도 이비의 집사라는 자는 차분했다.

그는 그토록 침착한 태도로 하늘을 눈짓했다. 그를 따라 위를 보니 하늘을 배회하는 감시자들이 보였다. 공중을 장악한 놈들은 마치 정찰하듯 계곡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공작은 다시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백작이 똑똑히 듣도록 목소리를 돋웠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그 숙녀를 직접 모시기로 했으니 확실히 책임지겠네. 내 명예를 걸고.”

이엘 바옌은 기꺼이 선언했다. 수십 년간 군대를 휘어잡던 아집을 고스란히 내보이면서.

뒤처졌던 공작의 수행원들도 때마침 나타났다. 그들까지 공작의 뒤에 버티듯 서자 안 그래도 껄끄러운 분위기가 더 살벌해졌다.

양쪽 진영 모두 첨예한 대치를 예상했다.

라우렐 백작도 바옌 공작도 지금이야 시치미를 떼지만, 이들은 양보하거나 타협하는 성격이 아닌 데다가 목적도 같았다.

성녀 후보인 이비 아리아테의 확보.

이게 대륙의 단 둘뿐인 군대가 충돌할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감히 토를 다는 자는 없었다. 제왕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대는 초조함을 지운 채 제왕의 변덕에 맞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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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가장 초조한 사람은 뜻밖에도 바로 그 제왕이었다.

멋대로 티엔다를 봉쇄한 라우렐 백작은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하고 무도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여 주기 위한 모습일 뿐, 그의 속은 한없이 초라했다.

시온은 결국 이비를 놓쳤다.

대신 그의 집사를 확보했고 바람길을 장악했다.

이제 시온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티엔다로 올라갈 수 없다.

바옌 공작이 끼어들어도 마찬가지다. 저 백전노장이 어떤 고집을 부리든 시온에겐 평정할 힘이 있었다.

그러니 느긋하게 이비를 기다리면 되는데, 시온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꼴로 이비와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난 새벽, 자신을 노려보던 이비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비가 내뱉고 간 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이비가 한 말은 하나하나 아팠다. 동시에 무섭도록 예리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개차반으로 굴지만 나한텐 너희가 모르는 깊은 뜻이 따로 있어, 호감을 사려고 입에 발린 소리 따윈 안 해,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이딴 식이면 고결한 거냐고.

항상 가식적으로 생글대기에, 그리고 필요할 때만 접근하기에 시온은 이비가 자신에 대해 잘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비는 그가 모르는 사이 그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온이 충격받을 말만 골라 잘도 해 주었다.


―근데 그것도 주위에서 받아 주니까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넌 네가 혼자 사는 것처럼 굴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널 용납해 주니까 네가 그렇게 오만할 수 있는 거라고.

이 노골적인 질타로 시온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새삼 깨달았다.

사실 그는 이런 말을 처음 들었다.

태어났을 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만큼 고귀했고, 저주받았을 땐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저주가 풀린 후엔 자신에게 고통을 떠넘긴 세상을 멸시하느라 남의 말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고정하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빚을 떠넘긴 자. 그 빚을 원치 않게 넘겨받고 마지못해 봐주는 자.

이게 시온이 생각하는 세상과 자신의 관계였다.


―넌 네가 날 엄청 봐준다고 생각하지? 근데 나는 참고 있어. 봐줄 처지가 아니라서 네가 내 인생에 난입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다 참았다고.

그런데 이비가 던진 말이 그의 공격 당한 적 없는 독선과 오만을 처음으로 흔들었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몇 번이나 네 비위를 맞췄는지 알기는 해?

자신만 이 세상을 참는 게 아니라 세상 역시 자신을 참아 주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토록 뒤늦게, 난생처음으로.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니, 인정했다.

그가 세상과 분리되길 원한 이유, 그것을 자신의 권리로 여긴 이유도.

시온은 세상이 자신에게 기생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우선하고, 어떤 일에도 감사하지 않고, 타인과 동등하지 않을 권리를 스스로에게 주었다.

그래서 모든 것과 분리되길, 타인과 연결되지 않기를 바랐다.

달리 말하면 그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과.

이비의 말처럼 세상 혼자인 것처럼 굴지만 시온은 사실 이런 사람이었다.

존경하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또 배신당했지만 결국 그의 뜻대로 의무를 다했다.

저주를 푸는 법을 알면서도 형을 해치지 못해 고립과 고독을 받아들였다.

연결되지 않길 바란다지만 그는 유언을 지킨 아들이자 형을 선택한 동생이며 아이들에게 기꺼이 시간을 양보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나약하다면 나약하고 다정하다면 다정한 사람이어서 세상을 용서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한 채 언제나 지켜보았다.

단 한 번도 놓지 않아 여전히 연결된 세상을, 오늘도 그저 원망하고 그리워하면서.

그러니 그 말도 거짓말이다.

차라리 미움받는 게 편하다는 말.

사실 시온은 이비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찾아낸 사람인데 이 이상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비를 기다리면서도 이비를 만나는 게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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