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잘못 삼킨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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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잘못 삼킨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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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잘못 삼킨 뼈
2023.06.19.
시온은 이비의 집사를 곧장 쫓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부상자 주제에 말도 안 되게 민첩했다.
그는 마치 하늘을 나는 새의 그림자처럼 무성한 나무 사이로 멀어졌고, 시온은 그를 놓치기 전에 그 앞으로 벼락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이비의 집사는 개의치 않고 내달렸다. 그래서 오히려 시온이 그 남자를 피해 벼락을 지워야 했다.
‘공격 못 할 거 안다 이거지.’
시온은 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타르데스의 딸을 불렀다. 그러곤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위로 오니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태양을 향해 가지를 펼친 무성한 나무들이 그 밑의 사정을 완벽히 은폐했다.
이대로 숨어 버리면 찾을 방도가 없다. 이비의 집사, 아마네세르의 눈을 가진 그 남자의 비상식적인 움직임은 시온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가장 뜨거운 낙뢰로 숲을 찢어 버렸다.
고열의 벼락이 젖은 숲을 증발시키며 길을 냈다. 시온은 마치 거대한 체스판을 만들 듯 빽빽하게 얽혀 있던 숲을 조각조각 나눴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걸 고려하면 지나치게 포악한 행동이지만 시온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있으니 내 앞에서 도망쳤겠지. 이 정도도 못 피하면 그냥 죽든가.’
시온은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하며 숲을 정교하게 조각냈다. 그러곤 그것을 멀리 있는 것부터 한 조각씩 태우기 시작했다.
이비와 그의 집사는 이미 독 안에 든 쥐였고, 시온이 그들을 붙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시온의 기분은 갈수록 더 처참해졌다.
어젯밤만 해도 이비를 잡으려고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건 시온 뿐, 이비는, 그토록 살갑게 웃던 이비 아리아테는 그가 자신을 억압할 가능성을 염두하고 대책을 세워 두고 있었다.
그걸 가증스럽게 여겨야 하는데, 그 계산적인 본성이 어딜 가겠냐며 혀를 차야 하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비가 그에게 쏟아 부은 말이 잘못 삼킨 뼈처럼 어딘가에 걸린 탓이었다.
시온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혹시 다른 길은 없었는지 생각하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다. 이제 돌이킬 방법은 없고 모든 여지와 가능성을 태워 버린 건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시온은 형편없이 뭉개진 마음을 보이지 않게 밟아 넣은 채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그러곤 실수로라도 이비를 죽여 버리지 않게 신중히 숲을 녹였다.
숲이 절반쯤 사라졌을 때였다.
숲을 조각낸 벌판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비의 집사였다.
시온은 곧장 그곳으로 활강하며 따님의 등을 박찼다. 그러곤 따님과 함께 남자의 앞뒤를 가로막았다.
포위된 남자가 드디어 도주를 포기했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시온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두 손을 들며 품에 안고 있던 것을 펼쳐 보였다.
그가 시온에게 보여 준 것은 빈 담요뿐, 그 안에 이비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
이비가 도시에 들어온 건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그 도시는 호밀밭이 있는 마을과 이어진 몇몇 도시와 마을 중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느긋한 걸음으로도 한나절이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이비는 여기까지 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호밀밭에 숨으려면 몸을 잔뜩 낮춰야 해서, 거의 기듯이 움직인 탓이었다.
이비가 호밀밭 사이로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하늘이 몇 번이고 번뜩였다.
이비는 이게 자신을 향한 백작의 격분 같아서 그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지금은 차라리 그 남자를 뿌리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도시엔 이비를 이층집까지 데려다준 바옌 군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합류한 이비는 겨우 한시름 놓고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곧장 티엔다로 향하지는 않았다.
티엔다로 가려면 타르데스의 따님들이 머무는 바람 계곡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 이비를 놓친 백작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이비는 약속 시간에 딱 맞추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 성녀 발탁식까지 꼭 일주일이 남았다. 탑에서는 슬슬 축제 분위기를 내고 있을 것이다.
그 주인공으로서 자리를 지켜야겠지만, 지금은 신중하게 움직여 백작을 따돌리는 게 우선이었다.
‘날 가둬 둘 생각이었어, 그 인간.’
이비는 백작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실소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거기까지 할 생각이었다니.
이비는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짜증 나, 진짜.’
잊으려고 했는데 시온이 어깨를 잡아 누르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이비는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자주 싸워 온 적과 마주했다.
그 적의 이름은 비참함이고, 이번 일로 시온 라우렐은 이비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인간으로 등극한 참이었다.
사실 그까짓 일은 한껏 진저리 내고 떨쳐도 그만이다. 진짜 맞은 것도 아니고 더러운 일을 당한 것도 아니니까. 그가 냉소를 섞어서 던진 말도 평소라면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니지, 하고 넘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초연해지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바로 직전에 그에게 잘 보이겠다고 난생처음 앞치마를 둘렀던 본인의 작태 때문이다.
이비는 창문에 머리를 박은 채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하고 연신 중얼댔다.
이비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뭘 좋아할지 고민하며 장을 보던 자신을 적어도 두 대는 때려 주고 싶었다.
‘됐어, 그만 생각해.’
이비는 자괴감을 느끼는 것도 지겨워 생각을 비웠다.
그러곤 차라리 잘된 셈 치기로 했다.
만약 백작이 이비를 받아 준다면, 이비는 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탑에 억류된 신세를 알리고 자신도 디에스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그래서 백작이 로히카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준다면, 성녀가 되는 건 단념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다 물 건너갔다.
물론 지금이라도 상황을 이야기하면 그 백작이 도와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비가 차기 성녀로 거의 확정된 지금, 이비에게 시온 라우렐은 로히카 세드로보다 오히려 안 좋은 선택지다.
탑주와 한 내기를 파기하고 백작의 그늘에 숨을 바에야, 당당하게 성녀가 되어 탑의 비호를 받는 게 훨씬 이익이다.
전자는 오직 백작의 선의에 기대며 탑주의 분노를 피해야 하지만, 후자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신분과 내기에 이긴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는 거니까.
이비는 이렇게 셈하다가 문득 씁쓸해졌다.
―교활하고 계산적인 건 네가 살아온 방식이니 그렇다 쳐도, 사람을 이렇게 건드리는 건 아니지.
이비는 자길 상처를 주려고 작정한 그 말을 떠올리고 크게 코웃음 쳤다.
‘진짜 나쁜 자식…….’
마음을 다스리던 이비는 다시 울컥해서 입술을 씹었다.
물론 그가 화를 낸 것도 이해는 된다.
타협했다. 실망했다. 이 말이 그의 화를 돋울 만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어쨌든 이비의 진심이 그러하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
사실 실망했다는 말은 그가 오해한 거지만, 이제 와서 뭐가 오해인지 해명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역시 경멸당하기 좋은 이야기인 건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이비는 자신의 저열함을 묻어 둔 채 시온에게 기대고 싶었다.
다시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해 보고 싶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외로움을 떨치고 단꿈 속의 그 날로 돌아가 따스함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시온 라우렐은 이비와 달리 제대로 된 사람이어서 소위 진심을 먼저 원했다.
하지만 이비는 그에게 접근하면서도 정작 그가 가장 원하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반드시 망할 테니까.
―좋아해요.
―진심이야?
―아니요, 마음에도 없는 말이에요.
이것 봐, 이렇게 될 게 뻔하잖아.
백작의 말이 맞다. 이비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을 모른다.
보면 두근거리고, 안 보이면 보고 싶고, 곁에 있으면 마냥 좋고?
미안하지만 이비의 심장은 무뎌서 그런 걸 능숙히 해내지 못한다.
이비의 세상에 사람은 그저 두 종류다. 안전한 사람과 위험한 사람. 이걸 다시 둘로 나누면 필요한 사람과 방해가 되는 사람 정도.
이비는 어릴 적부터 영리했고, 그 영리함으로 세상에 가득한 함정을 피했다.
그러면서 그 세계의 흔한 법칙 몇 가지를 스스로 깨우쳤다. 그중 하나가 약한 사람에겐 사랑마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이비가 태어난 세계엔 정에 굶주린 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을 꼬드겨 이용하려는 자들도 꼭 그만큼 많았다.
그래서 멋모르고 마음을 줬다가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뺏기고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언니들이 잔뜩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만 갈구했었다.
그걸 가까이서 지켜본 탓인지 이비에겐 좋아하는 감정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게 스스로 부지런히 싹을 잘라 낸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점성술사를 받아들일 때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비는 자길 구해 준 그 남자조차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기는커녕 의심하고 경계하며 보란 듯이 으르렁댔다. 어서 본색을 드러내라고 도발했다.
하지만 그는 이비를 미워하지 않았고, 버티고 버티던 이비는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이비는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했다.
그에게 글을 배우던 중이었다. 그의 말을 받아 적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특별한 계기 같은 건 없었다.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창문을 통과하는 햇살도, 지붕 위 풍향계가 삐걱대는 소리도, 나무목 책상 위로 불어오는 바람과 뒤따라 팔랑이는 공책도.
그리고 그 사람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아서 이비는 갑자기 울고 말았다.
밑이 깨져서 평생 비어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어느새 가득 찬 걸 깨닫고 속절없이 울어 버렸다.
이비는 그때의 기분도 똑똑히 기억했다.
마음의 빈 곳이 사라진 기분이었고, 난생처음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선 기분이었다.
이비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사람은 이비의 마음을 그렇게 차지했다.
이렇듯 이비의 순서는 조금 독특했다.
무딘 듯 여린 심장을 가지고 있어서, 남들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갖기 전에 시간이 필요했다. 곁에서 머물며 충분히 사랑받아야 어렵사리 마음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걸 제대로 설명했다면 받아 줬을까?’
내가 사람을 영 못 믿어서요, 먼저 아껴 주시면 나는 천천히 보답할게요.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어쩌면 인간 불신으로 가득한 주제에 사랑해 달라고 요구한 것 자체가 이기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열렬히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불타는 사랑으로 주변까지 피곤하게 만드는 연인도 있지만, 서로를 마주 보며 조용히 미소하는 연인도 있다. 열정보단 우정을 갖고 동행하는 부부도 많이 있다.
그래서 이비는 자신의 결함을 알면서도 고민 끝에 희망을 가져 봤다.
무엇보다 그 백작님이 자길 노골적으로 좋아하니까,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은 거였다.
초연히 성찰하던 이비는 다시 꿍해졌다.
이비는 그 어려운 남자가 자기 앞에서만 쉬워지는 걸 알고 있다.
귀한 몸에 손을 대도, 물어도 덤벼도 한 번 노려보고 넘어가는 걸 알고 있다.
뭐든 고집부터 부리는데 정말 싫은 게 아니라 유치하게 생색을 낼 뿐인 것도 물론 알았다.
그러면서 언제나 자신을 의식하고 챙기는 것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됐어!’
이비는 왠지 우울해질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억지로 떠넘겨 받은 거라잖아. 나도 이제 됐으니까 내 인생에서 그만 사라져!’
이비는 별로 착하지 않아서 자기에게 못되게 군 놈을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나쁜 놈을 뇌리에서 마구 쫓아냈다.
그 까만 밤, 쉬지 않고 유랑하는 마차에서 이비가 백작을 추방하는 데 거의 성공했을 때였다.
고요한 대로를 지나던 이비의 마차가 갑자기 뒤집혔다.
뒤이어 절규가 울려 퍼졌지만, 이미 기절한 이비는 그 소릴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