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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동맹 파기 (109/129)


109화. 동맹 파기
2023.06.15.



“당신, 지금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이비의 표독한 물음에 시온의 눈초리가 또 가늘어졌다.

그 간단한 눈짓, 그 자연스러운 불만 표시에 이비는 날카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눌러 말했다.


“화풀이하려면 제대로 해, 애매하게 겁주지 말고. 대체 뭐 하자는 건데, 내가 겁먹어서 울먹이면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비켜 주려고? 그런 걸로 본인이 날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생색이라도 내고 싶어?”

“조용히 해.”

“너나 조용히 해!”

시온이 나직이 윽박지르자 이비도 바락 맞받아쳤다. 그러곤 더 빈정댈 여유도 없어 참았던 말을 모조리 쏟아 냈다.


“맞아, 나 사람 좋아하는 법 몰라. 잘못 태어나서 그런 것도 못 배웠어. 그래서 마음도 없고 예의도 없고 교활하고 계산적이야. 그러니까 고작 한다는 게 발 뻗을 곳 찾아서 눈치 보고 비위나 맞추는 거야, 저열하게.”

이비는 자기가 한 말에 다시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시온이 한 말 중 틀린 소린 없었다. 이비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이라도 그걸 면전에서 듣는 것과 제 입으로 시인하는 건 또 다른 고역이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처참함이어서 이비는 자길 이렇게 몰아붙인 인간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근데 너는? 그러는 넌 뭘 얼마나 잘하는데. 넌 네가 날 엄청 봐준다고 생각하지? 근데 나는 참고 있어. 봐줄 처지가 아니라서 네가 내 인생에 난입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다 참았다고.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몇 번이나 네 비위를 맞췄는지 알기는 해?”

이비의 독설에 시온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하지만 이비는 더 이상 그 남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네 눈엔 이것도 저열하지? 그럼 너처럼 하면 고결한 거야? 누구에게나 개차반으로 굴지만 나한텐 너희가 모르는 깊은 뜻이 따로 있어, 호감을 사려고 입에 발린 소리 따윈 안 해,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이딴 식이면 고결한 거냐고.”

이비는 거기까지 말하고 억지로 웃었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울지 않으려면 차라리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것도 주위에서 받아 주니까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넌 네가 혼자 사는 것처럼 굴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널 용납해 주니까 네가 그렇게 오만할 수 있는 거라고. 나도 너처럼 태어났으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자기 마음만 생각하면서, 이 감정이 진짠지 가짠지 품평하면서 고상한 척할 수 있다고!”

말하는 동안 격양된 목소리가 절규처럼 변했다.

그렇게 다 토해 낸 이비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치떴다. 그런데 백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빚을 등져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에게선 더 이상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굳히던 싸늘함도 어느새 사라졌다. 대신 이제는 난감한 기색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는 꽤 놀란 듯, 뒤늦게 너무했나 싶은 듯, 이제야 이 불쌍한 천애 고아의 고충을 이해한 듯 누그러진 얼굴이었다.

그 너그러운 모습에 이비는 오히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정말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나는 이렇게 엉망인데 너는 벌써 깨끗이 반성 중이야.

날 여기까지 몰아붙인 게 그렇게 금방 물릴 수 있는 감정이었니?

맞네, 너는 내가 겁먹어 울먹이면 못이기는 척 물러날 생각이었던 거네.

이비는 자신과 이 남자의 간극을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꼈다.

본심을 조금만 드러내도 시궁창 같은 치부를 들키는 자신과 달리, 이 남자는 화를 내다가도 아차 싶어 발을 빼면 다시 높은 곳에서 점잔을 떨 수 있었다.

아, 너희 같은 사람들은 이제 태연히 화해하겠지?

그건 내가 미안해, 나도 심했어, 서로 조심하자.

이렇게 품위 있게 추스르고 괜찮아지겠지?

나는 몰리면 악착같이 물어뜯는 법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전혀 괜찮지 않은데.

이비는 억울하고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자신을 난감한 듯 내려다보던 시온이 더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이비는 그 꼴을 다시 노려보려다가, 어느새 눈앞이 흐려진 걸 깨달았다.

방심한 사이 새어 나온 눈물이 눈가에 가득 맺혀 있었다.

이비는 그걸 삼킬 수도 떨어트릴 수도 없어 황급히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곤 치욕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가,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밀쳤다.


“됐어, 관둬. 이제 너 같은 거 줘도 안 받아.”

“아까는 내가…….”

“그만 말해.”

변명 비슷한 것은 듣지도 않고 끊어 버렸다. 일부러 아까 그가 한 말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말하지 말고 비켜.”

이비는 자길 안팎으로 괴롭히는 이 비좁은 공간에서 제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시온은 이비의 진저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머뭇대기나 했다.

그래서 이비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사납게 윽박질렀다.


“비켜, 너 때문에 아저씨도 싫어질 것 같으니까.”

그제야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며 이비의 위로 드리웠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간신히 벗어난 이비는 일어나 앉아 숨을 골랐다.

호흡마다 높낮이를 다르게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가렸던 팔을 치웠다.

다시 침착해진 이비는 일어서서 시온의 셔츠부터 벗어 버렸다.

이비가 단추를 풀자 시온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비는 여전히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제 옷을 챙겨입고 시온에게 셔츠를 집어던졌다. 시온은 제 몸에 부딪힌 옷을 묵묵히 낚아챌 뿐이었다.

이비는 시온을 뒤로한 채 오두막의 출구로 향했다.

그러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어느새 어깨 위로 넘어온 손이 문을 짚으며 막았다.


“그래, 마음껏 싫어해. 나도 그쪽이 더 편하니까.”

바로 등 뒤에서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움받는 게 편하다고 말하는 주제에 그의 목소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이미 미움받을 각오를 마친 채, 이비가 한 뼘 열어 둔 문을 다시 닫았다.


“미안하지만 휴전은 끝이야. 성녀도 안 돼.”

그의 상냥하고도 비열한 횡포에 이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예상했으니까.”

직후 시온의 무릎이 덜컥 꺾였다.

견딜 수 없는 현기증이 그를 덮쳤다.

감각이 날아가는 생소한 느낌에 그는 결국 속수무책 무너졌다.

그리고 이비는 쓰러진 남자를 뒤로한 채 문밖으로 힘껏 내달렸다.

***

이비는 정신없이 숲길을 가로질렀다.

방심한 틈을 타서 정화했다. 보통 사람이면 반나절 정도 뻗겠지만, 상대는 용에게 짓밟혀도 죽지 않는 인간이다.

그래서 이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층집을 향해 달려갔다.


“디에스!”

그러곤 집에 도착하자마자 디에스를 붙잡고 말했다.


“백작이 날 잡으러 올 거야, 예정대로 마차 이동시켜.”

그때 디에스는 아직 엔테에게 당한 부상이 낫지 않아 몸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비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곧장 채비했다.


“이비.”

두 사람이 곧장 떠나려 하자 유비아가 이비를 불렀다.


“뱀이 가까운 곳에 있어.”

“어느 방향이야?”

이비의 물음에 유비아가 손으로 창문 쪽을 가리켰다. 저쪽은 북서쪽. 서부의 대도시가 있는 방향이다.


“거리는?”

“느린 마차로 하루.”

“고마워, 주의할게.”

이비는 그 말을 끝으로 백작을 피해,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이층집을 등졌다.

하늘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비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싫을 것 같았다.

***

비 오는 날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된 건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시온이 집에 돌아온 건 이비와 디에스가 떠난 지 불과 반 시간 만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의 반려인 타르데스의 딸을 불렀다. 그러곤 마을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집까지 날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집 안에는 유비아만 남아 있었다.


“이비 아리아테는?”

“너를 피해 도망쳤어.”

시온이 다급히 묻자 유비아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그 정직한 답변이 비를 헤치고 온 남자의 기분을 더 진창으로 만들었다.

시온은 이비의 행방을 더 묻는 대신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자 유비아가 등 뒤에서 물었다.


“쫓아가게?”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보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비아는 그 완고한 남자의 등에 대고 중얼댔다.


“그런 얼굴로 쫓아가면 더 미움받을 거야. 끼니를 챙겨 준 사람한테 그렇게 무섭게 굴면 못 써.”

시온은 그 말을 분명히 들었지만, 못 들은 척 제 반려의 등에 올라탔다.

그대로 창공으로 솟구쳤다. 그러곤 높은 곳에서 마을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길목마다 어디론가 떠나는 마차가 보였다. 꽤 급한 일이 있는지, 빗길을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이 한적한 마을 주위로 저렇게 많은 마차가 다니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니까 전부 이비 아리아테가 준비한 거라고 봐야 타당했다.

시온은 이를 악물고 마차의 수를 헤아렸다.

마차는 모두 열 대. 세 대는 대도시로 이어지는 길 위를 달리는 중이고 두 대는 초원으로, 나머지 다섯 대는 제대로 된 길도 없는 숲을 꾸역꾸역 지나고 있다.

자신을 따돌릴 의도가 너무 명백해 시온은 또 한 번 진흙탕을 구르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진 심정으로 팔을 치켜들어 허공을 내리쳤다.

그 순간 여러 갈래의 낙뢰가 땅으로 내리꽂혔다.

용을 떨어트리는 자가 불러들인 벼락은 광활하게 펼쳐지며 그에게서 달아나려는 마차들을 모조리 멈춰 세웠다.

바로 앞에 벼락이 떨어지자 말들이 난동을 부리고 마차의 방향이 틀어졌다.

시온은 철망처럼 뒤엉킨 낙뢰로 마차들을 묶어 두고서, 숲으로 들어간 것부터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마차를 붙잡았을 때, 그 마차의 마부는 제 앞에서 일렁이는 벼락에 놀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혼란에 빠진 마부를 뒤로한 채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시온은 겁에 질린 마부를 다그쳐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마부는 덜덜 떨며 서부로 간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냥 보수를 받고 이동할 뿐이라고도 덧붙였다.

시온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다음 마차를 확인했다.

그렇게 네 번째 마차를 붙잡았을 때였다.

왜인지 네 번째 마차는 마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차의 문을 당겨 봤지만, 안에서 잠근 듯 열리지 않았다.

시온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뜯어 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번뜩이는 것들이 시온에게로 쏟아졌다.

노골적인 살기에 시온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제게로 날아든 것을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깨를 내려다보니 날카로운 단검이 박혀 있었다.

그걸 막 확인한 찰나 마차의 반대편으로 누군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품에 안은 적발의 남자였다.

찾았다.

이비의 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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