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짜증 나
(10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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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짜증 나
2023.06.12.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못마땅하거나 의심스러운 것과 마주했을 때 어김없이 보이는, 그래서 이비에게도 어느새 익숙해진 눈초리였다.
“당신, 사람을 좋아하는 법을 알고는 있어?”
시온이 그런 눈으로 나직이 물었다.
신중히 대답해야 하는 분위기지만, 저주가 냉큼 대답해 버렸다.
“호감 사는 법은 잘 알아요.”
“……그래 보이네. 지금 작정한 것도 보이고.”
다행히 크게 엇나간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시온도 단조롭게 대답했지만, 이비는 분위기가 곱지 않은 걸 느꼈다. 그래서 제 위에 엉켜 있는 모포를 치우며 일어나 앉았다.
그런 이비를 향해 시온이 지겹다는 듯 말했다.
“이제 그만하시죠. 이런 식으로 공략당하는 거 그리 유쾌하지 않은데.”
시온의 목소리가 삐딱했다.
그래서 이비는 이 백작님의 꼬라지를 가만히 살폈다.
어젯밤까진 괜찮더니 새로운 하루가 됐다고 새로운 고집을 부릴 모양이다.
이비는 이 쉽지 않은 자식이 슬슬 열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방긋 웃었다.
“그래도 노력이 가상하지 않아요?”
“의도가 불순한데 노력이라고 가상할 리가.”
“불순하다뇨, 약간 체계적인 것뿐이에요.”
“내가 한 말 전혀 안 들었지, 당신.”
이비가 귀엽게 재잘댔지만 시온은 더 받아 주지 않았다. 도리어 혀를 차며 이비를 밀어냈다.
“나는 그 남자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다른 사람입니다. 완벽히 다른 사람이니까 괜한 감정 덧씌우고 대용품으로 쓸 생각 하지 마십시오. 나한테도 그 아저씨한테도 예의가 아니잖아.”
‘이 까칠한 놈…….’
시온의 매몰찬 거절에 이비는 내심 울컥했다.
“그럼 백작님은요?”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씩씩하게 되물었다.
“백작님도 저한테 여러 가지를 덧씌우고 있잖아요. 말로는 빚 때문이라고 핑계 대지만 단지 빚이 아니잖아요.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시온의 인정에 인내로 가득하던 이비의 눈에 비로소 기대가 차올랐다.
“다른 자의 기억을 이어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압니까?”
“모르겠어요.”
“생각보다 역겹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과 날것의 표현이 이비의 기대를 도로 무너트렸다.
이비가 놀라서 눈을 깜빡이자 시온이 건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느끼는 이도 저도 아닌 감정도 전부 원치 않게 넘겨받은 거지 내 게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 휘둘리기 싫고, 당신이 그걸 이용하는 건 더 싫어. 당신은 진짜든 가짜든 별로 상관없는 것 같지만 난 그렇지가 않아서.”
시온의 태도는 어제보다 몇 배는 더 단호했다. 단호하다 못해 매몰찼다.
그래서 이비가 짐짓 놀란 사이 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그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의 팔을 이비가 다급히 붙잡았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그의 팔에 매달린 채, 이비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부리던 여유도 어느새 사라졌다.
시온이 그 모습에 미간을 좁히자 이비도 결국 꾸미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나라고 상관없는 거 아니에요. 나도 혼란스러웠어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생각할수록 헷갈려서, 아저씨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어서, 나도 휘둘리기 싫었어요.”
장난치듯 접근했지만 사실 이비는 절박했다.
어제부터, 아니. 백작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때부터 이미 간절했다.
그래서 준비했고 그래서 시도했다. 거절당해도 다시 붙잡고 마음이 쓸려나가듯 창피한 것도 견뎠다.
최선을 다해 허세를 부리고 있을 뿐 이비는 계속, 지금도 여전히 절박했다.
“휘둘리기 싫다면서 왜 이러는 건데.”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니까요.”
이비의 주장에 시온의 시선이 짙어졌다. 이비는 왠지 그 눈을 마주 볼 수 없어 시선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날 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이, 그래서 내가 기다린 사람이 백작님이라는 거요.”
아주 엄청난 고백도 아닌데 진심을 말하는 건 생각보다 괴로웠다. 아니, 무서웠다.
그래서 이비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백작님을 대용품으로 삼을 생각은 없어요.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도 안 해요. 다만, 백작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밑바탕은 같은 사람이니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가능성?”
“우리가 서로 특별해질 가능성이요.”
특별해질 가능성이라니, 이 얼마나 엉망인 고백이고 구애인지.
이비는 저주가 끄집어낸 제 본심이 정말 서툴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뒤늦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뭘 바라고 이렇게 매달리는 거지?
그냥 하하호호 어울릴 수 있는 관계로 적당히 만족할 것이지, 이렇게까지 밀어내는데 뭘 얻겠다고 구차하게 부딪히는 거야.
차라리 지금이라도 됐다며 부담스럽게 굴어서 미안하다며 물러나면 이미 다 부스러진 자존심을 한 조각쯤 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정말 도망치지는 못했다.
역시나 절박해서.
그렇게 홀로 멈춘 시간을 견디길 한참, 위에서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그걸로 괜찮은 거야?”
이윽고 되돌아온 목소리는 어쩐지 누그러져 있었다.
그 목소리의 결은 오만한 백작님이 아니라 다정한 누군가와 더 닮아 있었고, 가슴을 졸이던 이비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비는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기쁠 거라는 말도 하고 싶었다.
이 역시 진심이라면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비에게 내린 저주는 잔인하고 엄중해서, 굳이 보다 깊은 속내를 끄집어냈다.
“네, 그걸로 타협할 수 있어요.”
멋대로 튀어나온 대답에 이비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 대답에 놀란 사람은 이비뿐이었다.
“그렇겠지.”
시온은 놀라지도 어이없어하지도 않고 그저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다만 이렇게 읊조릴 뿐이었다.
그의 평이하고 시큰둥한 반응은 평소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비는 왜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비가 그 불안의 이유를 깨달을 새도 없이 시온이 낯설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 전에 당신, 나한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어?”
“모르겠어요. ……솔직히 잘 몰라요, 그런 거. 그래서 알고 싶은 건데…….”
“거기 휘둘려야 하는 나는 무슨 죄야.”
시온이 여상히 웃으며 이비의 말을 끊었다.
마치 농담하듯 가벼운 투였지만 이비는 점점 더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타협이라니, 최악의 단어였다.
백작이 화를 내고 경멸해도 할 말이 없는 소릴 했다. 그것도 본심이랍시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걸까?
알 수 없었다. 이비는 아직 시온 라우렐이 진짜로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바닥에 깔린 모포 위에 앉아 있었다. 이비가 붙잡으며 좁혀진 거리 그대로였다.
시온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이비는 자신이 만든 거리가 이제 버거웠다.
그래서 물러나지도 다가가지도 못해 눈치만 보는데, 시온이 돌연 가볍게 물었다.
“너, 내가 그 남자인 걸 알고 무슨 생각 했어?”
“실망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또 한 번 끌려 나온 진심이 파국을 확정 지었다.
이비가 입을 막는 사이 시온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변명이 없어서 편하네.”
그 남자는 이제껏 본 적 없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위가 좋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리고 그 가짜 웃음이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때 그가 눌러 둔 분노가 비로소 서릿발처럼 드러났다.
이비는 시온의 서슬에 헛숨을 삼켰다가 다급히 해명했다.
“잠깐만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백작님한테 실망했다는 게 아니라…….”
“그만 말해.”
하지만 시온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이비의 입을 막았다.
쉽게 떠밀린 이비는 그 바람에 모포 위로 쓰러졌다.
지난밤 편히 잠들었던 자리인데 바닥에 등이 닿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제 위로 상체를 드리운 큰 남자 때문이었다.
“이제 말하지 마.”
시온이 이비를 내려다보며 싸늘히 말했다.
이비는 그 모습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낯설었다. 고작 두 달 남짓 알고 지낸 사람이니 모르는 면이 있는 게 당연한데, 왜인지 그의 모습이 못 견디게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래서 얼떨떨하게 쳐다보다가 간신히 한 가지를 깨달았다. 시온이 자신에게 명령했다는 걸.
“내가 많이 우스웠나 봐. 하긴 일일이 휘둘렸으니 우습게 볼만했지.”
놀라서 얼어붙은 이비와 달리 시온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며 이비의 뺨을 건드렸다.
섬세한 손끝이 아니라 단단한 손등이 여린 살갗을 스쳤다. 그 손길에 감정은 없었다. 가만히 건드려 보는 게 무언가 가늠하는 것 같았다.
이걸 애지중지할 필요가 있는지, 이렇게 한 줌도 안 되는 걸 두고 내가 뭘 하는 건지 새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냥 치워 버릴까 하는 궁리도 그 뒤에 덤덤히, 딱히 비밀도 아닌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제야 이비는 한 가지 더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보던 시온의 시선이 못될지언정 무정한 적은 없었다는 걸. 그리고 처음 마주한 이 남자의 무감한 시선은 이비가 아는 것 중에 가장 위압적이었다.
덜컥 겁이 난 이비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시온이 이비의 어깨를 도로 눌렀다.
입을 막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행동이었지만 가볍다는 것도 그 남자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이비는 그대로 구속되었다.
시온이 이비에게 그림자를 드리운 채 나직이 말했다.
“내가 우습게 군 건 인정하는데 너무 저열하잖아. 교활하고 계산적인 건 네가 살아온 방식이니 그렇다 쳐도 사람을 이렇게 건드리는 건 아니지.”
시온이 어렵지 않게 내뱉은 말이 이비의 마음을 듬성듬성 베어 냈다.
하지만 이비는 아픈 줄도 몰랐다. 자길 내려다보는 남자의 존재감이 버거워서 말을 듣고 이해할 정신이 아니었다.
“성에 안 차지만 대충 타협해서 길들여 보겠다니, 용감하네. 그렇게 들쑤셔도 내가 봐줄 줄 알았나 봐.”
“잠깐만요, 백작님.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압박을 견디다 못해 청했건만 되돌아온 건 자연스러운 횡포였다.
남자가 몰인정한 지배자처럼 구는 모습에 이비는 다시 얼어붙었다.
이비가 그대로 하염없이 바라보자 시온이 눈썹을 구기며 웃었다.
“어젠 눈도 잘 감더니 이제 그럴 생각은 없나 보지.”
이 와중에도 수치심은 느껴졌다. 하지만 뺨이 붉어지기엔 얼굴에 남아 있는 핏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비는 속눈썹만 떨다가 비웃음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온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이비의 턱을 붙잡았다.
“집요하게 군 것치곤 너무 안일하잖아. 이런 상황은 생각 안 했어?”
“생각했어요.”
곧장 돌아온 대답에 시온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차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안에 담긴 경멸이 이비의 숨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답은 멋대로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 관둘 생각이었어요. 내가 만나고 싶은 아저씨는 이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넌 끝까지…….”
화가 나서 짓씹는 목소리가 너무 가까웠다.
결국 이비는 애써 외면하던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초라한 사냥감이 되어 개들에게 덮쳐졌을 때, 그때도 이렇게 뜨거운 숨결이 위에서 가깝게 드리웠었다.
차마 다스릴 수 없는 불쾌감이 이비를 덮쳤다. 그 지경까지 내몰린 이비는 결국 모든 걸 내려놓고 애원했다.
“죄송해요. 교활하게 굴어서. 이제 안 그럴 테니까 그만 비켜 주세요.”
용기를 쥐어짜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창백하게 굳은 얼굴 때문에 빈정대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이비를 미워하는 백작은 당연히 그렇게 오해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그래서 이비는 한없이 비참해졌다.
모든 게 끔찍했다.
그저 내려다보는 것으로 날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저 사람이.
실제로 꼼짝 못 하는 나도.
여전히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것도.
하필이면 이 사람한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비는 이를 악물었다. 혹여 들킬세라 눈물도 연약함도 악착같이 삼켰다.
잠시 후, 더 이상 떨지 않게 된 이비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아, 짜증 나.”
그러곤 백작을 노려보며 그와 똑같이 짓씹었다.
“당신, 지금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